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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시복시성운동: 한국전쟁과 신앙의 증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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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10-02 ㅣ No.845

[경향 돋보기 - 한국 교회 근현대 신앙의 증인 시복시성운동] 한국전쟁과 신앙의 증인들

 

 

머리말

 

한국전쟁은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옛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 간의 갈등이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 대리전 양상으로 발생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종교적 이유로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우리 교회는 박해시대와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전쟁이 발생하기 전 북한에서, 전쟁 이후에는 남한과 한반도 전역에서 죽임을 당한 신자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중에서 신앙이나 교회의 직무상의 이유로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가 피살된 이들의 수는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다.

 

전쟁이 마무리된 1953년에 한국 교회는 1945년 남북분단 이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피살된 성직자와 수도자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각 교구별로 평신도들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졌기 때문에 현재는 대체적 윤곽이 드러나 있다.

 

처음 조사 단계에서 이들에게 붙여진 명칭은 한국전쟁 ‘희생자’였으나 일각에서는 ‘순교자’라는 말을 공공연하게 사용하였다. 순교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희생자라는 말에는 아무런 평가가 들어가 있지 않은 말이다. 반대의 입장에서 보면 순교자라는 말에는 지나친 주관이 내재되어 있다.

 

두 용어를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는 피살된 이들의 ‘의지’의 문제이다. 여기서 대상으로 삼는 이들이 전쟁의 와중에 아무런 의지 없이 또는 피난을 가다가 우연히 총탄에 맞아 죽었다면 ‘희생자’ 또는 ‘사망자’라는 말로 불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피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신자들과 운명을 함께하려고, 또는 신앙의 유산들을 지키려고 남아있다가 피살된 이들이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와 공산주의

 

19세기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태동할 때부터 가톨릭교회는 공산주의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을 근간으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기 때문에 가톨릭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고,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방법론 역시 가톨릭에서는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때문에 19세기 중엽 이후 역대 교황들은 어떤 형태로든 공산주의와 협력해서는 안 된다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였다.

 

교황들의 가르침은 한국에 그대로 전해졌고 우리 교회는 이를 충실히 따랐다. 그런데 한국에 전파된 공산주의는 1919년 3·1운동 이후 고조되어 일제강점기 아래의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에 영향을 미치며 성장하였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제는 공산주의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는데, 한국 교회 역시 반공주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드러나는 현상을 보면 한국의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비쳐졌다.

 

일제강점기 아래 깊어진 우리 교회와 공산주의 간의 골은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더욱 깊어졌다. 한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연길교구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체포 · 감금되고 성당이 약탈을 당하거나 방화되었다. 북한의 교회 역시 공산정권에 의해 점점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이 직간접적으로 남한에 전해지면서 남한 교회의 반공주의는 극에 달하였다.

 

북한의 공산정권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전하였으나 1947년부터는 관변 민간단체들에 의해 ‘반종교 운동’을 일으켜 신자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왜 우리 교회를 그토록 말살하고자 했는지는 한국전쟁 당시 장금구 신부를 체포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내세운 논리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① 3·1운동 때 천주교회는 개인이나 단체가 참가한 일이 없다. ② 일제강점기에 그들에게 항거하지 않고 충성을 다했다. ③ 로마 교황이 미국 상인들과 결탁하여 세계 인민을 착취했다. ④ 노기남 주교가 이승만 역도와 공모하고 북침을 계획했다. ⑤ 신부들이 신자들을 착취하여 사복을 채우므로 신자들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 ⑥ 문화, 경제, 산업발전에 아무 공헌도 못했다”(장금구, 「사목 반세기」, 1989년, 109쪽 참조).

 

이와 같은 논리는 어느 정도 맞는 면도 있지만 실제의 역사 사실과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논리가 맞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천주교인들에게 그러한 혐의를 적용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지도층에 있는 성직자와 수도자, 본당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신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하였다.

 

 

신앙 증인들의 체포

 

한국 교회의 반공주의와 공산주의자들의 천주교에 대한 몰이해로 양쪽의 골이 깊어진 상태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우리 교회는 박해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면 정치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피살된 이들이 모두 정치적이거나 다른 이유들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신앙의 증인들’이라는 이름으로 염두에 둔 이들은 신앙과 교회 직무상의 이유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체포된 ‘신앙의 증인들’의 유형은 크게 다섯 가지이다.

 

첫 번째, 북한 교회의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들이다. 분단 이후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북한 교회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더니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는 본격적인 박해의 양상을 띠었다. 교회 건물과 토지 등이 몰수되고 지도급 인사들이 체포되었으며 신자들 중에는 배교를 강요당하는 이들도 있었다. 체포된 이들 중 일부는 전쟁 전에 피살되었고 수용소에 갇혀있던 이들은 전쟁 기간 동안 피살되거나 옥사하였다. 그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은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단행된 민간인 수감자 석방 때에 풀려났다.

 

두 번째 유형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경우로 자기가 책임진 신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려고 피난을 하지 않은 경우이다. 대부분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여기에 해당되지만 대표적으로 교황대사 번 주교와 강원도의 이광재 신부를 들 수 있다.

 

전쟁 당시 주한 교황대사였던 번 주교는 미국인이었는데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미군은 서울에 있는 모든 자국인들을 비행기를 동원하여 피신시켰다. 번 주교는 주변의 외국인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키는 등의 노력을 하였으나 정작 자신은 한국교회를 지켜야 한다며 교황대사관에 머물러 있다가 체포된 뒤 죽음을 맞았다.

 

전쟁 이전 38선 이북에 있던 강원도 양양본당의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는 공산당국에 의해 본당이 폐쇄되자 평강으로 가서 임시로 본당을 관할하였다. 남한으로 피난하라는 신자들의 권유에도 그는 본당에 머물면서 사목활동을 계속하였다. 자신은 피신하지 않으면서도 그는 남쪽으로 피난하는 사람들을 목숨을 걸고 도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주었다. 이광재 신부는 결국 전쟁 하루 전인 6월 24일에 체포되었고 10월 9일에 피살되었다.

 

이들 외에 수많은 성직자들이 피난하지 않고 본당과 교구에 머물며 사목활동을 계속하다가 죽음을 맞았는데 그들의 논리는 어떤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5 참조)는 말씀을 분명히 제시하며 피난을 거부하였던 것이다. 일부 성직자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교의 기회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세 번째 유형으로는 성직자들의 체포 과정에서 신자들이 함께 동참한 경우이다. 충남 합덕본당의 사례가 그 대표적이다. 성모승천대축일을 앞두고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있던 본당신부가 공산군들에게 연행되자 이를 저지하던 회장과 복사가 함께 체포되었다. 두 신자의 경우 우발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체포 소식을 듣고 일부러 달려와 항변하다가 함께 연행되어 피살되었다.

 

네 번째 유형은 성당이나 성물, 또는 성체를 보호하려다가 즉결 처분되거나 체포되어 피살된 경우이다. 전쟁 초기 공산군들은 남한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업무나 집회 장소로 쓰려고 성당을 징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성물이나 성체에 대한 파괴가 자행되었는데 이를 저지하거나 미연에 방지하는 조치를 취하다가 피살되는 신자들이 있었다.

 

다섯 번째 유형은 본당이나 공소에서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피살된 이들이다.

 

 

신앙의 증인들 피살

 

전쟁을 전후하여 체포된 ‘신앙의 증인들’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시기는 1950년 8월 중순 이전으로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거나 남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두 번째는 9월말까지의 시기로 북한군이 후퇴를 앞둔 시기이고, 세 번째는 9월 말부터 이듬해 1월까지의 시기이다.

 

8월 중순 이전의 첫 번째 시기에서는 먼저 북한 교회에 속해 있던 인사들이 피살되었다. 6월 25일의 남침을 앞두고 북한에 적대적인 인물로 간주되는 주요 인물들이 처형되는 과정에서 교회 인사들이 함께 피살되었다. 이어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진하는 과정에서 남한 교회의 신자와 성직자들이 피살되었다. 이때에는 주로 교회 시설물들을 강제로 징발하거나 성당과 성물을 모독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행위에 대해 항거하다가 피살되었다.

 

두 번째인 8월 중순부터 9월 말까지의 시기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띤다. 북한군이 남한에서 승리를 장담하던 시기에는 남한 교회의 주요 인사들이 연행되어 취조를 받고 풀려나 감시의 대상이 되었으나 감옥에 수감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때문에 피난을 거부하고 본당이나 교구에서 사목활동을 계속하던 성직자들은 제한적이나마 전례와 성사집행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개입으로 북한군이 점점 수세에 몰리면서 8월 중순부터 성직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이 피살되기 시작한 것은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부터이다. 퇴로가 끊긴 북한군은 그동안 서울 이남 지역에 가두어두었던 남한의 주요 인사들을 전원 사살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수인들은 크게 두 부류였다. 첫째는 각 지역의 군 단위의 기관에 갇혀있다가 피살된 이들로, 주로 평신도 지도자들과 수도자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도 단위 감옥에 갇혀있던 이들인데, 이들은 군 단위에서 체포된 이후 재분류되어 도청 인근의 감옥이나 기관에 수감되어 있었다. 북한군 측에서 보면 중죄인에 해당하는 이들이었는데 주로 성직자들이 도 단위의 감옥에 수용되어 있다가 피살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대전형무소의 경우로 총 13명의 성직자(외국인 12명, 한국인 1명)와 다수의 신자들이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피살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9월 20-30일 사이에 피살되었고 늦게는 10월 초순인 경우도 있다.

 

세 번째 시기인 9월 말 이후에 피살되거나 옥사한 이들은 흔히 ‘죽음의 행진’이라 부르는 억류생활과 관련이 있다. 서울에 갇혀있던 국내외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주요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미 7월부터 평양으로 이송되기 시작하였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이들을 북한의 최북단에 있는 중강진으로 이송하는 대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즉결 처분되거나 옥사하였기에 이를 ‘죽음의 행진’이라 부른다. 전쟁 이전 북한에서 체포된 북한 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들도 이 행렬에 합류되어 운명을 같이하였다. 이들은 민간인이었음에도 유엔군 포로들과 함께 이송되면서 고난을 겪었고 그중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 일부만이 휴전협정 이후에 석방되었다.

 

 

맺음말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은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해 많은 논의와 재평가를 하고 있다. 현재 우리 교회는 전쟁 전후에 피살된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놓고 논의를 벌이는데 그것이 시복시성운동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피살된 이들은 외적으로 보면 일반 ‘우익’ 인사들과 다를 바가 없다. 체포, 구금, 피살에 이르기까지 크게 구분되는 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도 전쟁 전후 ‘신앙의 증인들’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에 회의적인 반응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신앙의 증인들’은 내적으로는 분명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의지적으로 죽음의 길을 갔다는 것이다.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나 다른 영예를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과 교회 직무상의 이유로 그 길을 걸어갔다. 이들 가운데는 남다른 덕행으로 신앙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분들이 있기에 그들을 시복시성의 대상자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을 위한 일이 아니라 지상에서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교회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경향잡지, 2010년 9월호, 김정환 세례자 요한 신부(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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