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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천주학쟁이들의 시간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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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64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천주학쟁이들의 시간에 대한 생각

 

 

예전 중국의 황제들은 천하를 통일한 다음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했고, 시간을 관장했다. 황제의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는 천문을 측정하고 절기의 변화를 파악하여 이를 책력으로 만들어 나누어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세력권 안에서는 다른 책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요즈음 말로 바꾸어보면 일종의 표준화 작업이었다. 특히 시간의 표준화는 사람들의 모든 일상생활을 지배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양력’은 율리오 교황이나 그레고리오 교황이 인간생활에 표준을 제공하고자 단행한 사업의 결과였다.

 

 

서력기원(西曆紀元)에 대한 이해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의 시간을 사용하였다. 이는 달의 변화에 기초한 태음력이었다. 그런데 태음력은 시간을 측정하는 데에 정확성이 떨어지고 적지 않은 오차를 드러냈다.

 

청국 황제는 아담 샬 신부(1591-1666년)에게 이러한 결함을 극복한 역법을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아담 샬은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적용하여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하게 계산한 ‘시헌력(時憲曆)’을 고안하여 황제에게 올렸고, 이 역법은 1645년부터 청나라와 그 세력권에서 시행하였다. 우리 나라도 김육(1580-1658년)의 청에 따라 1654년부터 이 역법을 사용하게 되었지만, 시헌력 또한 태음력이 그 근간이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천주학쟁이들은 천주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고, 천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을 새로운 삶의 기초로 삼고자 했다. 그들은 ‘서력기원’ 또는 ‘서기’를 받아들여 ‘천주강생 후’ 몇 년이라는 새로운 시간 개념을 갖기 시작하였다. 물론 음력을 기준으로 할 때에는 일곱 날을 하나로 엮어서 파악하는 주간의 개념이나 4년마다 찾아오는 윤일(閏日) 개념 등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박해시대 한국교회에서는 「성년광익」과 같은 책을 통해 양력을 기준으로 소개하고 있는 365명의 성인들을 이해함과 동시에 양력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년첨례광익」과 같은 한글 교회서적을 통하여 교회의 축일과 시간 계산법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교우들은 교회의 전례력을 존중하여 태양력에 따라서 진행되는 전례의 주기를 계산하여 실천해야 했다. 음력을 표준으로 하던 사회에서 독자적으로 양력을 사용하면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이를 오늘의 우리가 이해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서양적 시간의 실천

 

당시 교회의 지도부는 「첨례표」(오늘날의 「전례력」)를 발행, 보급함으로써 교회 전례를 준행토록 하였다. 1801년 윤현의 집에서 압수한 서적 목록에 「첨례단」(1책)이 있다. 이 「첨례단」은 후일의 「첨례표」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첨례표」가 서울의 신도들에게 소개된 것이 18세기 말부터라는 이야기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첨례표」는 서울의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1866년 판을 들 수 있다. 목판 인쇄인 것으로 보아 당시 신자들에게 대대적으로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창설 이전에는 ‘주간’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지는 못했다. 이 같은 사실은 홍유한의 기록을 보면 확인된다. 성호 이익의 제자였던 그는 1770년 천주교 서적에서 7일마다 축일이 온다는 기록을 읽고, 매달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일을 쉬고 기도에 전념했다고 한다. 곧, 그는 아직 주간의 개념이나 ‘일요일’ 또는 ‘주일’이라는 용어도 몰랐기에 음력에서 7의 배수가 되는 날을 택해서 종교적 축일로 기념했던 것이다.

 

1784년 서울에 교회가 세워진 뒤, 신자들은 ‘주일(主日, dies Dominica)’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확실히 가질 수 있었다. ‘주일’은 주간의 개념을 구성하는 일곱 요일 가운데 기초가 되는 개념이었다.

 

‘주일’이라는 히브리적 시간 개념은 원래 「천주십계」를 통하여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한글판 「천주십계」가 소책자로 제작되어 유통되었고, 또 각종 기도문이나 교회서적에 신도들의 생활규범으로 수록되어 있어 박해시대의 신자들은 이미 교회의 전례력에 따라 서양식 주일을 지키고 있었다.

 

초기 신도들의 주일 개념은 ‘노동을 파하고 거룩히 지내라.’는 ‘파공(罷工)’에 대한 ‘천주십계’의 규정을 통해서 신도들의 일상생활 안에 젖어 들어갔다. 그러나 일반 ‘요일’에 대한 개념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주일’과 함께 ‘금요일’에 대한 개념이 서있었음은 일찍부터 발견된다. 이에 대한 구체적 사례는 1799년 청주에서 순교한 원 야고보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주일을 잘 지켰을 뿐만 아니라 매주 ‘금요일’마다 금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뒤 19세기 중엽에 간행된 「첨례표」에는 매월 첫째 금요일을 ‘첫첨례 육’으로 표현하여 그날 특별한 신심을 실천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첫첨례 육’이라는 표현은 중국으로부터 수용한 주간 개념이었다. 중국교회에서는 서양의 주간개념을 번역하면서 매 요일을 ‘성기(星期)’라는 말로 표현하였고, 금요일은 ‘성기육(星期六)’으로 불렀다. 여기에서 ‘첫첨례 육’이라는 우리 교회 용어가 나왔다. 이는 ‘첫 금요일의 첨례’ 또는 ‘첫 금요일의 미사 참례’라는 말이 된다.

 

한편, 당시 신도들의 일상생활에는 음력을 기준으로 한 24절기에 전례력의 새로운 기념일과 축일이 추가되었다. 그들은 부활절을 비롯한 주요 축일을 기념하였다. 여기에서 종교적 의례와 새로운 시간 개념 형성의 상관성을 확인하게 된다.

 

 

남은 말

 

천주강생을 기준으로 한 시간은 교회의 전례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자리를 잡아갔다. 예컨대, 부활절이면 신자 가족이 함께 모여 즐겼다. 그리고 전례력은 농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기도 북부지방에서 가장 좋은 품종의 담배로 ‘강림초(降臨草)’가 있었다. 이는 이 지역의 천주학쟁이들이 ‘성령강림절’ 전후에 심었던 담배를 말하며, 일반인들도 그 연원을 모른 채 강림초라고 불렀다. 또한 중부지방의 천주학쟁이 농민들은 봄철 가뭄이 들 때, ‘베드로 바오로 첨례’ 날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그해 농사를 망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에게는 24절기보다 전례력이 더 의미가 컸나 보다.

 

당시 천주교도들이 갖게 된 새로운 시간 개념은 19세기 말엽에 가서야 일반화되기 시작한 서양적 시간관에 선행하는 형태였다. 전통시대 천주학쟁이들은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구약시대의 히브리적 시간관과 서양의 태양력의 시간관을 부지불식간에 이해하고 실천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시간관을 부여하는 천주교 신앙의 실천은 곧 일상생활에서의 혁신도 의미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천주의 강생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표준을 가질 수 있었다.

 

[경향잡지, 2002년 9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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