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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신유박해기에 대한 통계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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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51

신유박해기에 대한 통계적 고찰

 

 

1. 머리말

 

1801년의 신유박해는 한국 천주교회가 맞은 첫 번째 공식적인 박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다. 한국 교회는 1784년에 창설된 이래, 1785년의 '을사추조적발사건', 1787년의 '반회사건' 등으로 서서히 공동체의 모습이 알려지게 되었고, 1791년의 '진산 사건'을 통해 조선 왕조의 가치 체계와 충돌하면서, 반천주교 세력과의 갈등 관계가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고, 이듬해 신부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을묘박해를 겪은 후, 한국 교회는 점차 박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박해는 정조의 교화주의 정책에 힘입어, 전면적이고 대규모적인 형태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00년 6월 정조가 사망하고,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반대파에 대한 정치 공세를 전개하는 가운데, 1801년 1월 사학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신유박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신유박해는 수많은 신자들이 희생된 사건이지만, 다른 한편 천주교 신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곧 이 때 박해를 피해 피신한 신자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다시 복음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궁벽한 장소까지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유박해는 한국 교회에 있어 시련과 성장의 양면을 담고 있는 중요한 사건이며,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신유박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교세를 중심으로 신자 총수, 신자들의 성별, 신분별, 거주지별 존재 양상, 신유박해의 순교자들을 통계적으로 정리해 봄으로써, 신유박해기 교회의 상황을 개략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신자 총수

 

신유박해가 발생하기 전, 조선의 천주교 신자는 1만 명1) 정도로, 1801년의 전체 인구인 7,513,792명2)의 0.13%에 해당한다. 이 숫자는 10%를 웃도는 오늘날에 비하면 상당히 미약한 것이지만,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한불조약(1886년) 직전인 1885년의 신자 비율 0.2%(신자 수:13,623명, 전체 인구:6,717,373명)3)와 비교하면, 결코 적은 수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곧 교회가 창설된 지 16년 만에 이 정도의 신자 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천주교가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일시에 확보된 것이 아니었다. 이승훈이 1784년 영세한 후부터 1789년 말 윤유일이 북경에 밀사로 파견될 때까지 1,000명의 신자가 생겨났고,4) 이어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1794년 말까지 3,000명이 증가한 4,000명의 신자가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으며,5) 다시 신유박해 전까지 6,000명이 증가하여 1만 명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1790-1794년 사이에 3,000명의 신자가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곧 1784-1789년까지는 '을사추조적발사건'과 '반회사건' 등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일정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1786년 이승훈을 중심으로 조직된 '가성직 제도'를 통해 성사가 집전되고 신자들이 관리됨으로써, 신자 수가 증가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6) 그러나 1790-1794년의 시기는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최초의 순교자가 탄생하고, 이어 천주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신자 수가 급증한 것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진산 사건'을 계기로 신문화 수용 운동의 경향을 띠었던 양반 신자 지도층들이 대거 탈락하고, 새로운 지도층이 형성되는 가운데 천주교가 민중 계층에 뿌리를 내리면서 집단 개종 내지는 집단 입교의 현상이 일어나 교세의 급격한 신장이 가능했다고 한다.7)

 

그러나 이러한 현상과 함께 이의 배경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1789년부터 시작된 북경 교회와의 연결이다. 곧 1784년 이승훈의 영세로 조선에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지만,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하는 가성직 제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교회와 관련된 이들의 지식은 상당히 제한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89년 말 밀사로 파견된 윤유일이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조선에 전함으로써, 그간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신앙 생활에 대한 실질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8) 아울러 이 과정에서 조상 제사를 금지하는 천주교의 입장이 알려지고, 이를 계기로 신자들은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과 신앙에서 멀어지는 사람으로 나뉘는 변화가 일어나, 한국 교회는 이제 내부적으로 체질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보유론(補儒論)적 성격을 갖고 있던 조선 천주교회가 이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해되며, 이의 단적인 예가 1791년에 발생한 '진산 사건' 곧 신해박해였다. 그 결과 이후 신앙을 선택한 사람들은 좀더 확고한 종교적인 신념 아래서 신앙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고,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전개된 전교 활동은 그만큼 활발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천주교가 확산될 수 있었던 국내적인 상황과 함께, 북경 교회와 접촉하면서 얻게 된 신앙적 지식, 그리고 이를 통해 보유론적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확고해진 종교적 신념은 조선 교회를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속에서 이루어진 전교 활동의 결과, 신자 수가 4,000명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신유박해가 일어나기 직전인 1795-1800년 사이에는 다시 6,000명이 증가하는 급속한 성장세를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신부의 입국으로 정상적인 성사 집전이 가능하게 되고, 또 회장제9)의 도입을 통한 교회 조직의 체계화, 그리고 명도회(明道會) 조직을 통한 전교 활동의 활성화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특히 1797-1798년경에 조직된 명도회는 교리 연구와 전교, 그리고 지도자 양성소로서의 역할을 함으로써 초기 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10) 명도회는 서울에서 조직되어 지방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서울에는 6개의 모임 장소인 6회(六會)가 있었고, 하나의 모임은 3-4명, 5-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11) 따라서 신자들은 이러한 교회의 환경 속에서, 가족은 물론 이웃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전교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에는 의원·행상 등 자신의 직업이 이용되기도 하였고, 내세관의 강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나눔의 자세, 그리고 신분을 초월한 상호 교류 등이 활용되면서 신자 수는 급속도로 증가될 수 있었다. 특히 [사학징의]에서 입교 시기를 알 수 있는 93명 중, 대부분의 신자가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3-5년 사이에 입교하였다는 사실12)은 이 시기에 전교 활동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3. 성별, 신분별, 거주지별 신자 수

 

앞서 살폈듯이,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는 1만 명 가량이었다. 그러나 이중 남녀의 구성 비율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다만 당시의 관변 자료와 교회측 자료를 이용하여 신자 수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1784년에서 1801년 사이에 존재했던 신자 중 확인 가능한 인원은 692명이며, 이 중 남자는 513명(74.13%), 여자는 179명(25.87%)이었다.13) 그러나 이러한 통계는 전체 신자 수의 6.92%에 불과함으로, 비록 당시 교회의 대체적인 경향을 살펴보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자료상 교회의 전체상을 그리기에는 상당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남녀 구성비의 경우, 초기 교회에 있어 전교 활동이 가족 단위로 이루어져 남편이 믿으면 부인도 대체로 입교하는 경향이 있었고, 명도회의 활동으로 1800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증가한 신자 중에 부녀자가 2/3이고, 무식한 천인이 1/3이었다14)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여성 신자의 비율은 실제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이 692명을 신분별로 구분하면, 양반 192명(27.75%), 중인 92명(13.29%), 양인 172명(25.72%), 천인 38명(5.49%), 미상 192명(27.75%)으로 파악되고 있다.15) 이 중 미상은 대체로 양인의 범주에 속하므로, 당시 신자 중에는 양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양인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많았다는 점과 함께, 천주교가 민중의 종교로서 뿌리를 내려가는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들을 다시 거주지별로 정리해 보면, 서울 351명(50.72%), 충청도 148명(21.39%), 경기 107명(15.46%), 전라도에 84명(12.14%)이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16) 그러나 충청도의 경우는 1791년 말 이존창이 여사울을 떠나 홍산으로 이사할 때, 300가구의 신자들이 나와 그를 전송했다는 기록17)이 있고, 전라도의 경우는 신유박해 당시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는 기록18)에서 볼 수 있듯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수치는 실제 상황을 제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서울과 경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되며, 그나마 서울의 신자 수가 가장 많게 나타난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자료의 상당수가 서울과 인근 지방에 대한 내용이라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당시 신자들의 지역적인 분포를 보면, 경기의 경우는 양근, 광주, 여주, 포천, 고양, 수원, 양성, 연천 등에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충청도는 홍주, 덕산, 천안, 충주 등지에, 전라도는 전주, 영광, 진산, 고산 등지에 신자들이 주로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경상도와 함경도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있다.19)

 

한편 당시 신앙의 중심지였던 서울의 경우는 타 지역에 비해 어느 정도 구체적인 자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신자들의 거주지에 대한 대체적인 파악이 가능하다.20) 곧 [사학징의], [벽위편], [추안급국안] 등 당시의 자료로 볼 때, 대략 83곳(2곳 불명)의 거주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것을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 분류해 보면, 서대문구 19곳, 종로구 20곳, 중구 36곳으로 약 90%가 이 세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거주 인원도 확인 가능한 198명 중 서대문구에 59명(26.9%), 종로구에 62명(28.3%), 중구에 86명(39.3%)이 거주하여, 약 95%가 이 세 지역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81개 지역 중 당시 도성 안에 해당하는 곳은 55개 지역(67.9%)이며, 도성 안 거주 신자 비율은 75.2%였다. 따라서 신유박해 당시 서울 지역 신자들의 70% 이상은 도성 안에 거주했고, 그 중 현재의 중구 지역인 남대문 근처에 상대적으로 많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당시 교회의 지도자인 강완숙(창동→인사동→훈동), 정약종(창동), 최필공(도저동, 편차동, 석정동), 최필제(장흥동), 한신애(수구문 안) 등은 대부분 도성 남쪽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의 활동 범위도 '서대문구' 일부와 '중구' 쪽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거주지가 파악 가능한 198명의 신자 중 '중구' 지역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거주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유박해 당시 한국 교회의 1차적인 중심지는 도성 남쪽, 특히 남대문의 창동(倉洞)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명도회의 하부 조직인 6회(六會)의 3곳, 곧 강완숙(창동), 현계흠(장흥동), 김여행(서소문 內 - 사창동)의 집이 모두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21)

 

 

4. 신유박해의 희생자와 순교자 수

 

1801년 1월 10일(음) 대왕대비 김씨의 박해령(迫害令)으로 시작된 신유박해는 12월 22일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이 나오면서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이 박해를 통해 주문모 신부는 물론 대부분의 지도층 신자들이 희생되었고, 나머지 신자들도 뿔뿔이 흩어지면서 한국 교회는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렇다면 1년이나 지속된 박해 중에 과연 어느 정도의 신자들이 희생되었을까? 이 문제도 다른 사실들과 마찬가지로 명확하게 알려 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황사영의 "백서"에는 "정식으로 처형된 자와 옥중에서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인데, 지방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았다."22)라고 함으로써, 대체로 300명 이상이 희생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 1811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는, "박해 때 순교한 사람이 100명이 넘었으며, 귀양간 사람은 거의 400명이 된다."라고 하여 100명 이상이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달레가 인용한 정약용의 기록에는 순교자의 수효가 적어도 200명은 된다고 하였다.23) 따라서 당시 언급된 순교자는 대체로 적게는 100명 이상에서 많게는 300명 이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유박해 직전 조선 교회의 신자 수는 1만 명 정도였고, 박해의 결과 수천 명의 신자가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천주교를 믿고 있다고 하였다.24) 여기서 수천 명이라는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 막연하지만, 이 기록대로라면 신유박해 때에는 유배된 사람까지를 포함하여, 최소 1,000명 이상의 신자가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귀양을 갔기 때문에, 외교인조차 "조선이 건국된 이래 올해처럼 사람을 죽인 수가 많은 적이 없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25)

 

한편 300명 이상의 순교자 중에, [사학징의], [추안급국안] 등 오늘날 남아 있는 자료에서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는 108명 정도이다. 이 중 남자는 86명(79.6%)이고 여자는 22명(20.4%)이며, 출신 지역은 서울이 33명(30.6%), 경기 26명(24.1%), 충청 25명(23.1%), 전라 13명(12%), 황해도 3명(2.8%), 평안도 1명(0.9%), 미상 및 기타가 7명(6.5%)이었다. 그리고 신분별로는 양반이 47명(43.5%), 중인이 23명(21.3%), 양인이 20명(18.5%), 천인이 3명(2.8%), 미상 및 기타가 15명(13.9%)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통계는, 신유박해 당시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타지역보다는 서울 지역 출신 신자가, 그리고 신분적으로는 양반층이 상대적으로 많이 순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다시 지역과 신분을 합쳐서 분류해 보면, 서울의 경우 양반이 25%, 중인이 50%, 양인이 21.9%, 천인이 3.1%이며, 경기는 양반이 92.3%, 중인이 7.7%이었다. 또 충청도는 양반이 33.3%, 중인이 27.8%, 양인이 33.3%, 천인이 5.6%였으며, 전라도는 양반이 69.2%, 양인이 23.1%, 천인이 7.7%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서울에서는 중인이, 경기와 전라도는 양반의 순교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충청도의 경우는 각 신분층이 고르게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달리 해석하면, 당시 신앙의 중심지였던 서울에서는 중인층의 활동이 활발했고, 경기와 전라도는 양반층이, 그리고 충청도는 각 신분층이 고르게 활동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서울의 경우는 경기 출신의 양반들이 많이 이주해 살았으므로, 박해 당시의 거주지를 기준으로 분류해 보면, 서울에 있어 양반 신자들의 순교 비율은 좀더 상향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이상에서 신유박해 당시, 한국 교회의 상황을 신자 수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결과 이 시기 신자 수는 1만 명이었고, 이 중에서 최소한 1,000명 이상이 희생(유배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희생자 중 300명 이상이 순교하였고, 이 중 오늘날 파악할 수 있는 순교자는 108명 정도였다. 한편 지역적으로는 서울에 가장 많은 신자들이 거주하였고, 서울 중에서도 오늘날의 남대문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신자들의 거주 비율이 높았다. 아울러 신분적으로 볼 때, 전체적인 숫자는 양인이 많은 반면, 순교 비율은 양반과 중인이 높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 결과는 전체 신자 수의 6.92%, 그리고 순교자의 30% 정도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 교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를 통해 당시 교회의 전체적인 신자 수나, 성별, 신분별, 지역적인 분포 그리고 박해에 따른 희생자와 순교자들에 대한 대략적인 경향을 알 수 있었다고 생각되며, 앞으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기존 자료의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더욱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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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 안응렬·최석우 옮김, 분도출판사, 1979년, 393면 참조; "1811년 조선 신자들이 교황에게 보낸 서한"·"1811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주교에게 보낸 서한",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모음집], 윤민구 역주, 가톨릭출판사, 2000년, 201.223면. 

2) 방동인, "인구의 증가", [한국사] 13, 국사편찬위원회, 1990년, 298면. 

3) [서울교구 연보]Ⅰ,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명동천주교회, 1984년, 39면; 방동인, 위의 논문, 302면. 

4) 윤민구 역주, 앞의 책, 31.37면. 그러나 북경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가 1790년 10월 6일자로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에는, 이승훈이 영세 후 얼마 안되어 1,000명 이상이 세례를 받았고, 1790년 8월 윤유일이 2차로 북경에 왔을 때 전한 소식에 의하면, 당시 신자 수는 4,000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790년 10월 20일 마카오 주재 포교성 대표부 대표 마르키니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조선에는 약 4,000명의 신자가 있다고 하였다(윤민구 역주, 앞의 책, 45.48.65면). 

5) 샤를르 달레, 앞의 책, 371.393면 참조. 

6) 가성직 제도는 1786년에 조직되어 1788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런데 북경의 라자로회 선교사들이 교황청에 보낸 서한에는 '신자 수가 1788년에는 적어도 1,000여 명에 이르렀다.'(윤민구 역주, 앞의 책, 19면)고 한 점에서, 당시 신자 수가 급속히 증가한 데에는 가성직 제도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7)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년, 5-6.24-27면. 

8) 구베아 주교는 이 사목 서한을 통해, 조선 교우들에게 신자로서 반드시 믿고 실천해야 할 모든 도리와 사제가 없을 때 신앙 생활을 하는 요령을 간단히 요약해서 가르쳐 주었다(윤민구 역주, 앞의 책, 47면). 

9) 총회장 최창현, 여성회장 강완숙, 명도회장 정약종, 동정녀 공동체 회장 윤점혜 및 다수의 지역 회장들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10) 명도회에 대해서는 방상근, "초기 교회에 있어서 明道會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년, 213-226면 참조. 

11) 명도회의 하부조직인 6회로는 '황사영 집, 홍익만 집, 홍문갑 집, 현계흠 집, 김여행 집,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집'([推案及鞫案], 25권, 731면)이 있었고, 이 중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집에 대해 연구자들은 명례방에 살던 김범우의 동생 김이우의 집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12) 김한규, "사학징의를 통해서 본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몇 가지 문제", [교회사연구] 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년, 76면. 

13) 조광, 앞의 책, 33면. 

14) "백서", 20행. 

15) 조광, 앞의 책, 251-252면 별표 참조. 

16) 위의 책, 34면. 

17) 샤를르 달레, 앞의 책, 365면 참조. 

18) 위의 책, 527면 참조. 

19) 주명준, "白山黑水文庫本 叢書의 邪學懲義와 闢衛彙編", [한국교회사논문집] 2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년, 643면. 한편 황사영의 [帛書] 94행에는 "경기, 충청, 전라 3도에는 본래 교우가 많고, 경상도와 강원도는 근래의 난을 피해간 사람이 더러 살고 있는 까닭에 염탐하는 관리가 이 다섯 도를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황해도와 평안도는 원래 교우가 없었고, 이주한 교우가 없어서 잠잠하고 일반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당시 지역별 신자 수의 대체적인 분포를 알 수 있다. 

20) 신유박해 당시 서울 지역 신자들의 거주지에 대해서는, 방상근, "신유박해기 서울 지역 신자들의 거주지 연구", [교회와 역사] 312호(2001.5.), 한국교회사연구소 참조. 

21) 이와 함께 명례방에 살던 김이우의 집이 6회의 하나라면, 아현의 황사영의 집과 송현의 홍익만의 집을 제외하면, 6회 중 4곳이 남대문 근처에 있게 되는 것이다. 

22) "백서", 75행. 

23) 샤를르 달레, 앞의 책, 616면 참조. 

24) 윤민구 역주, 앞의 책,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1802년 8월 2일자 편지"(185면), "1811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주교에게 보낸 서한"(211면). 

25) "백서", 5행.

 

[사목, 2001년 9월호,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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