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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 교회 시복 시성 운동의 추진 현황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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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49

한국 교회 시복 시성 운동의 추진 현황과 과제

 

 

1. 신유 순교 200주년과 시복 시성 운동

 

103위 성인의 시성식 때부터 논의되어 오던 남은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더욱이 바람직한 것은 이것이 각 교구마다 별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교회의 주관 아래 통합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는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통합 추진한다'는 것을 결의하였고, 1999년 초부터 '시복 시성 통합 추진 회의'가 시작되면서 이 문제는 한국 천주교회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각 교구마다 순교자 현양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게 된 점은 시복 시성을 앞당기는 일이 될 것이고, 신자들의 순교 신심 함양에도 하나의 기폭제가 된다는 점에서 아주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에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대희년을 맞이하여 민족사 안에서 우리의 교회사를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 반면에 올해는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 전통의 의미를 다시 한번 부각시키면서 순교 선조들의 시복 시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은 것으로,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거나 어느 한 방향으로만 치우쳐서도 안 된다. 한 쪽의 바퀴가 커진다면 그 수레는 이에 비해 작아진 다른 한 쪽의 바퀴를 축으로 하여 계속 선회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복 시성 운동은 대희년의 성찰과 맞물려 교회사의 수레를 안정시켜 나가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도 좋을 것 같다.

 

시복(諡福, beatificatio), 시성(諡聖, canonizatio) 운동은 교회 차원에서 정해진 규정에 따라 추진하는 현양 운동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하여 제도적인 현양 운동이 자발적인 순교 현양 운동(사적 경배 운동)을 위축시켜서는 안되며,1)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시는 성인 공경을 영웅 숭배처럼 생각해서도 안된다.2) 시복 시성 운동에는 신자들의 자발적인 현양 운동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올바른 방향에서 합일되어 나갈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성 운동이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먼저 103위 시성식 이후 지금까지 추진되어 온 시복 시성의 현황을 통합 추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아울러 앞으로의 추진 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과 과제, 그리고 현재 추진되고 있는 시복 시성 운동이 지니는 의의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2. 시복 시성 추진 현황

 

1) 통합 추진 이전

 

한국 성인 103위에 포함되지 못한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추진 작업은 이미 198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이 작업은 시복 시성 책임 주교로 임명된 김남수(안젤로) 주교와 1980년 11월 17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 사업 위원회의 '시복 시성 추진 위원회' 총무로 임명된 변기영(베드로) 신부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1982년 9월 9일에는 제1차 시복 시성 추진 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이때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정해박해(1827년) 등 초기 박해로 인한 순교자 중에서 우선 22명이 선정되어 그 순교 행적 조사와 약전 작성이 전문가들에게 위임되었다. 사실 이들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작업은 순서상으로 103위 시성 작업에 앞서 추진되어야만 했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주도로 시복 시성이 추진되면서 파리 외방 전교회가 조선 포교지를 담당하기 전에 순교한 기해박해(1839년) 이전의 초기 순교자들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03위 시성식이 늦어질 것을 염려하여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추진 운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 작업이 재개된 것은 1984년의 시성식 직후였다. 이때 200주년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에서는 초기 교회의 순교자들 중에서 98명을 선정하였는데, 여기에는 논쟁의 대상이 되는 순교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추진 위원회에서는 1985년 5월 20일 주교회의 전례 위원회로부터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98위"에 대한 시복 시성 운동을 인준 받아 추진 위원들을 위촉하였다. 그런 다음 대상 순교자를 조정하여 그 청원서와 약전을 교황청에 제출하였지만, 본래 의도한 결실을 얻지는 못하였다.3)

 

당시는 교황청에서 이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완덕의 천상 스승](Divinus Perfectionis Magister, 1983년 1월 25일부 교황령)과 시성성의 [주교들이 행할 예비 심사에서 지킬 규칙](1983년 2월 7일부)이 발표된 상태였다. 그러므로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추진은 이 특별법에 따라 추진되어야만 하였다. 이에 따르면 1985년 시복 시성 추진 위원회에서는 시복 청원서를 제출하기 전에 먼저 '장애(障碍) 없음'(nihil obstat)을 시성성에 신청하고 교회 법정에 관한 교령 발표를 요청했어야 하였다.

 

200주년 시복 시성 추진 위원회가 결실을 얻지 못하고 해체되자, 전주교구에서는 1985년부터 교구 독자적으로 시복 시성을 추진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7년 10월 20일 총대리 김환철(스테파노) 신부와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진소(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중심으로 시복 청원 준비 위원회를 구성하고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등 5명의 순교자들을 '하느님의 종'(servus Dei)으로 선정하였다. 동시에 전 교구 차원에서 시복 시성 기도를 시작하였으며, 다음해 9월 19일에는 교황청의 특별법에 따라 시복 시성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어 동 위원회에서는 "윤지충 등 5인 순교자 시복 시성 청원서"를 작성한 뒤 주교회의 전례 위원장의 추천서를 첨부하여 1989년 2월 14일 교황청에 발송하였고, 4월 12일에는 시성성으로부터 "하느님의 종 5명의 시성 청원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라는 답변을 받게 되었다.4)

 

이후 청주와 수원, 대구대교구에서도 독자적으로 시복 시성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청주교구에서는 1995년부터 배티 성지 담임 장봉훈(가브리엘) 신부(현 청주교구장 주교)의 주관 아래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에 대한 시복을 추진하면서 관련 자료집들을 간행하고 자발적인 현양 운동을 시작하였다. 최양업 신부가 순교자가 아니므로 다른 순교자들의 시복 건과 함께 추진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청주교구에서는 이 문제를 1996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 상정하여 "청주교구에서 최양업 신부의 시복 시성을 추진하는 데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라는 만장일치의 합의를 얻게 되었다.

 

수원교구에서는 1996년 1월에 윤유일(尹有一, 바오로)과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 등 8명의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우선 추진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윤민구(도미니코) 신부를 주관 신부로 임명하였으며, 2월 7일에는 시복 시성 추진 위원회의 역사 위원들을 임명하였다. 그런 다음 "하느님의 종 8위의 시복 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발송함으로써 같은 해 10월 1일 시성성으로부터 "하느님의 종 8명에 대한 시복 조사를 착수하는 데 어떤 장애도 없다."라는 회답 공문을 받게 되었다.5) 이어 수원교구에서는 이들 8명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등 9명 순교자의 행적을 정리하여 위의 시복 건과 한데 묶어 추진할 준비를 하였다. 한편 천진암에서는 이와는 별도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을 비롯한 창립 선조 5명'의 시복을 한 건으로 묶어 추진한다는 계획 아래 자료 정리를 계속해 왔다.

 

대구대교구에서도 이 무렵부터 을해박해(1815년)와 정해박해(1827년), 병인박해(1866년 이후)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와 함께 시복 시성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교구장 이문희(바오로) 대주교는 1996년 10월 영남교회사연구소에서 대구 지역 순교자들을 조사해 나가도록 하였으며, 다음해 8월에는 교구 순교자 현양 위원회를 구성하고 동 위원회의 주관 아래 순교 행적과 자료 조사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97년 11월 17일에는 23명의 하느님의 종이 확정되었고, 다음해 9월 30일에는 교구장에 의해 이들에 대한 시복 시성 추진이 공식 선포되었다.6)

 

한편 서울대교구에서는 1996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가 31명의 순교자를 1차로 선정하고, 시복 추진 계획서를 포함하여 교구에 시복 시성 추진을 건의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순교자 현양 위원회에서도 관련 자료 수집과 정리를 꾸준히 추진해 왔지만, 시복 시성 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지는 않았다.

 

2) 통합 추진 이후

 

이처럼 각 교구별로 시복 시성 추진 작업이 전개되어 나갈 무렵, 수원교구에서는 1997년의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에 '윤유일(바오로)과 7위 순교자 시복 청원에 대한 인준'을 요청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어 1997년의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는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추진이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었고, 여기에서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을 주교회의 차원에서 통합 추진한다."라는 내용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당분간은 각 교구별로 순교 조사와 시복 추진이 진행되었다.

 

1999년 1월 28일에는 마침내 주교회의 사무총장 김종수(사도 요한) 신부의 주관 아래 제1차 시복 시성 통합 추진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서울대교구를 비롯하여 수원, 원주,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제주교구 등 8명의 관계자 신부들이 참석하였으며, 같은 해 9월 7일에 열린 제2차 회의에는 청주, 안동, 광주교구의 시복 주관 신부들이 추가로 참석하여 통합 추진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 결과 시성성의 특별법에 따라 해당 교구에서 예비 심사에 필요한 모든 자료와 순교 행적을 조사하고 자발적인 현양 운동을 전개하며, 자료 통합과 시성성과의 연락, 청원인 선정 등은 주교회의 차원에서 추진하고, 해마다 주교회의 정기 총회 전에 통합 추진회의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결정되었다.

 

통합 추진회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통합 추진 작업이 해당 교구의 시복 시성 작업을 위한 노력에 장애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울러 해당 교구 신자들의 신심 함양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시복 시성이 추진되어야 하고, 각 교구들의 중복 노력을 피하며, 궁극적으로는 한 교구의 복자 성인을 탄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성인을 탄생시키고 모든 신자들이 공경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나간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7)

 

이후 통합 추진 회의는 정기적으로 개최되었고, 여기에서 논의된 내용들은 정식으로 주교회의에 보고되었다. 그러자 2000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는 통합 추진 회의 결과를 받아들여 시복 시성 작업을 통합 추진할 청구인(actor)에 주교회의 사무총장 김종수 신부를, 청원인(postulator)에 청주교구 배티 성지 담임 류한영(베드로) 신부를 각각 임명하였다. 이어 주교회의 사무총장 김종수 신부는 주교회의에서 논의된 문제와 통합 추진 회의의 의견에 따라 2000년 12월 4일 통합 추진 건 자체는 물론 순교 시기에 따른 통합 문제를 시성성에 문의하였고, 시성성에서는 12월 19일자의 회신을 통해 이러한 답변을 보내왔다.8)

 

첫째, 하느님의 종들이 같은 박해 동안 즉 같은 상황에서, 그리고 같은 장소 곧 한국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조건이 충족된다면, 공동으로 하나의 새로운 단일 안건으로 묶을 수 있다.

 

둘째, 공동 추진을 위해서는 한국 주교회의를 청구인으로 선언하는 것이 좋으며, 개별 주교들은 그들이 선출한 교구장 주교에게 시복 시성 추진의 권한을 부여하는 데 동의하는 서명을 해야 한다.

 

셋째, 선출된 교구장 주교가 시성성에 "교회 법정의 권한에 관한 교령"(Decree of competence of ecclesiastical)을 발표해 주도록 요청할 때는 기존의 어떤 안건들이 어떤 새로운 안건으로 합쳐졌는지를 밝히고, 새 안건의 제목, 대표되는 하느님의 종의 이름, 그 동료 하느님의 종들의 숫자를 제시해야 한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시성성의 의견을 존중하여 각 주교들의 동의 서명을 받고, 주교회의 의장인 마산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를 시복 시성을 공동으로 추진할 교구장 주교로 선출하였다. 이에 따라 2001년 6월 18일에는 제5차 통합 추진 회의가 개최되었으며, 시복 시성 통합 추진 대상자 확인 작업과 확정을 위한 실무진 구성에 대한 내용, 한국 순교자 시복 시성 주교 특별 위원회 설치 건의 문제가 결의되었고, 시성성에 "교회 법정의 권한에 관한 교령"을 요청하기 위한 준비는 교구장 주교와 청원인 신부가 맡아 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앞으로의 통합 추진 방향은, 첫째 창립 선조들의 건, 둘째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순교자의 건(신해박해-병인박해의 순교자), 셋째 최양업(토마스) 신부와 김범우(토마스) 등 증거자의 건으로 묶어 진행시킨다는 것이 논의되었다.

 

이렇게 통합 추진 회의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각 교구의 순교 행적 조사와 현양 운동은 계속되었다. 먼저 제주교구에서는 병인박해의 순교자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에 대한 시복 시성을 추진하기 위해 2000년 4월 10일 허승조(바오로)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시복 시성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고 역사 위원들을 임명하였으며, 자료 조사와 함께 교구 차원에서의 자발적인 현양 운동을 시작하였다. 또 부산교구에서는 부산교회사연구소를 중심으로 이정식(李廷植, 요한) 등 7위 순교자에 대한 행적을 조사하였으며, 서울, 안동, 원주, 전주, 청주교구에서도 새로운 순교자를 보완하거나 하느님의 종을 선정하는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3. 현재의 과제와 시복 시성 추진의 의의

 

지금은 시성성에서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시성 작업이 새로운 방향에서 통합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한국 순교자들이 '조선 안'에서, '조선의 박해'로 죽임을 당했다는 점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 법정의 권한에 관한 교령"을 발표해 주도록 시성성에 요청할 준비를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장애 없음"을 확인받은 다음, 시성 특별법에 따라 이를 추진해 나가야 할 단계가 된 것이다.

 

이제 시성성에 교령 발표를 요청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종을 정확하게 정리하고, 대표자가 되는 하느님의 종을 선정한 다음, 기존의 안건을 포함하는 새로운 안건의 제목을 확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통합 추진 회의에서는 앞으로 "하느님의 종 선정 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작업을 진행시킬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는 현재까지 대상자 명단이 제출되어 있지 않은 대전교구 지역의 모든 순교자들과 서울, 수원교구의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검토, 정리 작업도 이루어지게 될 것 같다.

 

여기에서 이미 제출된 대상자 명단을 보면,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한국 성인 103위의 시복 과정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지나친 엄격주의 때문에 시복 대상에서 누락된 순교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다. 그러므로 선정 위원회에서는 그 기준을 시성 특별법에 따라 엄격하게 적용은 하되, 지나치게 엄격하여 하느님의 종에 포함될 수 있는 순교자들을 제외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순교 사실에 대한 입증이다. 신유 순교자와 같은 경우는 순교와 배교 사실이 어느 정도 뚜렷이 구분되고 있지만, 순교의 용덕을 끝까지 지켜 나갔느냐 하는 점을 밝히는 것이 어렵다. 특히,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같은 경우는 비록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을지라도 추국 과정에서의 진술 때문에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병인 순교자와 같은 경우는 후대의 증언 내용이 [포도청등록]과 같은 관찬 기록의 내용과 다른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들에서는 우선 목격 증언자가 있느냐 하는 점과 그 증언 내용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느냐 하는 점을 밝히는 것이 관건이 될 것 같다.

 

이 밖에도 그 선정 기준에는 조선 사회의 배경과 한국적 상황, 순교자의 행적 내용과 전기(傳記) 편찬의 문제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신유박해의 순교자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과 관련해서는 한국적 상황과 훗날의 공경 문제를, 기해박해의 순교자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와 관련해서는 조선 사회의 전통과 순교자의 용덕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순교는 분명하지만 행적이 불분명한 성인들을 전례력에서 제외시켰는데, 그 이유는 성인의 행적이 분명해야만 신자들이 그들을 본받고 공경할 수 있다는 데 있었다.9)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한국 103위 성인들의 전기에서도 자주 거론해 왔다.

 

다음으로 통합 추진 회의에서 논의된 것과 같이 순교자 건과 증거자 건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창립 선조의 건과 다른 순교자들의 건을 과연 별도로 추진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같은 장소, 같은 박해 상황에서' 순교한 창립 선조들을 다른 순교자들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창립 선조 자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교자까지를 창립 선조로 보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예를 들어보자. 그는 순교의 용덕이 남달랐고, 어느 한 순간에도 신앙의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는 1784년에 영세 입교한 것이 아니라 2년이 지나서야 입교하였다. 따라서 그를 창립 선조로 선정하려면, 그보다 먼저 영세 입교한 신자들을 모두 창립 선조로 선정해야만 한다.

 

이러한 과제와 문제점들이 남아 있지만, 지금의 시복 시성 추진 운동은 몇 가지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신유 순교 200주년을 맞이하여, 그리고 새천년기를 시작하면서 한국 교회가 주도적으로 시복 시성을 추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성급한 결론일지는 모르지만, 이 시복 시성 운동이 신자들에게는 자발적인 순교 신심을 함양해 주는 지름길이 될 것이고, 교회 안팎으로는 한국 교회의 위상을 확인시켜 주는 작업이 될 것으로 믿는다.

 

사실 1990년대 이후 교구별로 시복 시성 작업이 추진되면서 순교자 현양 운동도 함께 전개되어 왔으며, 통합 추진과 함께 그 현양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마찬가지로 앞으로는 순교자 현양 운동이 2001년 한 해에 국한되지 않고 시복 시성 작업과 더불어 지속되어 나갈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서 지금의 시복 시성 추진이 갖는 두 번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 동안 한국 교회 안에서는 교구별로 시복 시성을 추진해 오면서 특히 순교지에 따른 해당 교구의 선정이 문제되어 왔고, 이와 관련하여 시복 시성의 중복 추진에 대한 이견도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통합 추진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들이 자연히 해소될 수 있게 되었다. 앞에서 통합 추진이 시복 시성의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의견을 제시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교구'라는 의식을 떠나 모든 순교자를 '한국의 순교자'로 공경하고 현양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 아래서 시복 시성 작업이 궁극의 결실을 얻게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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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석우, "순교자 현양의 교회사적 의의", [교회사 연구] 10집, 1995년, 17면. 

2) 윤민구, "시복 시성 운동의 과제와 현대적 의미", [교회와 역사] 233호(1994.10.), 9면. 

3) 시복 시성의 추진 절차와 103위 성인의 시복 시성에 대하여는, 윤민구, "103위 시성 수속 경위와 새 시복 추진", [사목] 95호(1984.9.); 차기진, "한국에서의 시복 시성", [한국가톨릭대사전] 8권, 2001년 참조. 

4) 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호남교회사연구소, 1998년, 1254`-`1256면. 

5) 교황청 시성성, Prot. N. 2119-1/96(1996.10.1.)과 2119-1/96(1996.10.24.). 

6) 구본식, 마백락,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순교자 현양 운동", [대구 순교사 연구], 천주교 대구대교구 시복 시성 역사 위원회, 2001년, 34-40면. 

7) 시복 시성 통합 추진 회의, "1차 회의 자료"(1999.1.28.)와 "2차 회의 자료"(1999. 9.7.). 

8)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공문, 중협주 제2001-11호(2001.1.8.); 교황청 시성성, Prot. N. VAR 5201/00(2000. 12. 19). 

9) 윤민구, 앞의 책, 9면.

 

[사목, 2001년 9월호,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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