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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박해자가 편찬한 순교자의 기록 - 사학징의(邪學懲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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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28

[신앙 유산] 박해자가 편찬한 순교자의 기록 : 사학 징의

 

 

머리글

 

역사는 사료(史料)를 통해서만 밝힐 수 있다. 그러기에 사료에 대한 관심은 역사 이해의 출발점이 된다. ‘사료 없이는 역사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나라 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사료에 관해 조심스럽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료에는 그 종류에 따른 분류와 그 가치에 따른 등급이 부여되기 마련이다. 우리 교회사의 사료에 있어서도 교회사적 사건을 집중적으로 전해 주는 사료가 있고, 당시 신도들의 정서적 특성과 신앙의 실체를 밝혀 주는 자료도 있다. 또한 사료를 산출한 주체에 따라 그것이 교회 안에 속하는 사료인지 아니면 정부 당국이나 박해자측의 사료인지를 나누어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분류된 사료에 대해서 그 가치에 따라 주요도를 나누어 등급을 정한다.

 

흔히 ‘일등 사료’라 할 때에는 사건이 일어난 그 시점과 장소에서 사건의 관여자가 직접 기록한 사료를 말한다. 그리고 ‘이등 사료’라 할 때에는 이 세 가지 조건이 다 채워지지 못한 사료를 뜻한다. 그러므로 역사 연구에 있어서 ‘이등 사료’나 ‘등외 사료’(等外史料)보다는 ‘일등 사료’가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 교회사를 밝히기 위해 필요한 주요 자료 가운데 “사학 징의”(邪學懲義)를 우리는 주목할 수 있다.

 

 

교회사의 사료

 

우리 선조들이 남긴 신앙의 유산은 우선 그들 자신이 남긴 글들과 그들이 학습하고 기도 드렸던 여러 책을 - 교리서, 기도서, 신심 묵상서, 성인전 등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와 함께 선조들의 신앙 유산은 박해자측의 기록을 통해서도 풍부한 자료로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사적 사건이나 신앙 선조들의 정신적 자취를 확인하기 위해서 신앙 선조들 및 교회의 기록뿐만 아니라 정부 당국자나 ‘척사위정’(斥邪衛正)에 열중했던 박해자들의 기록에도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교회사를 보면 일백여 년에 걸쳐 교회에 대한 정부 당국의 박해가 진행되어 왔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1791년의 신해 교난, 1801년의 신유 교난은 초창기 교회의 뿌리를 뒤흔든 큰 박해였다. 1839년의 기해 교난, 1846년의 병오 교난 그리고 1866년에 시작된 병인 교난 등도 우리의 교회사에 피멍울을 서게 한 사건이었다.

 

이 박해의 과정에서 정부 당국자들은 박해에 관한 충실한 자료를 남겨주었다. “조선 왕조 실록” “승정원 일기” “비변사 등록”과 같은 연대기(年代記) 자료 안에는 박해에 관한 적지 않은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에서 우리는 신앙 선조들의 용기 있는 증언들을 쉽게 확인하게 된다.

 

또한 박해를 진행시켜 가던 ‘척사위정적’ 인물들도 개인적인 편찬물을 남기고 있다. 예를 들면 ‘신유 교난’에 관한 기록을 집중적으로 정리한 이기경(李基慶, 1756~1819년)의 “벽위편”(關衛編)을 우선 주목할 수 있다. 또한 홍시제(洪時濟, l758년~?)의 “눌암기략”(訥菴記略)이나 그 밖의 야샤류(野史類) 서적들에서도 우리는 교회사에 관한 귀중한 자료들을 얻을 수 있다. 박해 때마다 정부의 관헌들이 신도들을 직접 심문했던 기록들도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한 ‘일등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사학 징의”는 어떤 책인가

 

박해 당시 정부측 인사들에 의해 작성된 기록 가운데 “사학 징의”가 있다. 이 책은 1801년의 신유 교난에 관한 기록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사학’(邪學)이란 말은 정학(正學)으로 자부하던 성리학(性理學)의 입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배격하기 위해서 쓰던 말이다.

 

또한 ‘징의’(懲義)라 함은 ‘사학’을 다스리고 성리학의 의리(義理)를 밝힌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징의라는 용어가 중국의 고전에 근거를 둔 보편적 낱말은 아니다. 고전에서 ‘징악’(懲惡)이나 ‘정치’(懲治) 등의 용례를 쉽게 찾을 수 있으나, ‘징의’라는 단어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사학 징의”를 엮은이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엮은이는 1801년의 천주교 박해에 직접 참여했고, 포도청과 형조의 자료를 손쉽게 열람하고 이용할 수 있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사학 징의”는 1801년 신유 교난의 전개 과정을 소상히 밝혀 주고 있다. 이 책은 모두 두 권인데, 순 한문으로 쓰여진 이 책의 첫 번째 권은 96장 192쪽으로 되어 있다. 두번째 권은 97장 194쪽(각 21.5×34.5cm, 漢裝本)이다.

 

이 책은 일찍부터 학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소장하고 있던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이 1923년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 때 완전히 불타 버리자 이 책의 자세한 내용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물론 이 책의 다른 사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느 기관에 비장되어 있던 이 사본도 한국 전쟁을 겪는 동안 물에 젖어 판독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 책을 아쉬워하는 연구자들의 안타까움은 더해 갔던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자료가 아마 없어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1년 관동 대지진을 겪은지 50여 년 후, 이 “사학 징의”의 또 다른 사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이 책은 서울 절두산에 있는 순교 기념관에 소장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본의 표지에는 “징의”라는 제목이 붙어 있으나, 그 내용 중 각 권의 첫 부분에 “사학 징의”라는 원래의 제목이 밝혀져 있다. 아를 대본으로 하여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영인본을 간행했다. 이로써 이제는 화재나 수재의 위험으로부터 이 자료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손쉽게 이 자료를 이용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사학 징의”에 실린 내용

 

“사학 징의”는 신유 교난에 관해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내용들을 전해 주고 있다. 이 책의 중심적 내용은 ‘정법죄인질’(正法罪人秩) 안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1801년 형조나 포도청에서 심문했던 ‘사학 죄인’ 즉 천주교 신도들의 심문 기록과 판결문[結案]들이 정리되어 있다. 정법(正法) 즉 ‘사형 당한 죄인’에 관한 이 부분의 기록에서 순교자들의 육성을 우리는 들을 수 있다.

 

또한 이 책에는 귀양간 신도들이나 배교한 신도들에 관한 기록이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당시 신도들의 살림살이와 믿음살이[信仰生活]을 알려 주는 많은 자료가 있어,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의 교회를 생동하게 복원시킬 수 있다.

 

“사학 징의”에서는 중인(中人) 이하의 신분층에 속한 신도들이나 여성 신도들에 관한 풍부한 자료들을 싣고 있다.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를 비롯한 당시에 관한 자료들은 양반 신분 신도들에 관해 많은 분량의 증언을 담고 있다. 그러나 “사학 징의”는 기존의 자료들에서 소홀히 다루었던 우리 교회사의 소중한 부분들을 보완해 주기에 충분한 자료를 풍부히 담고 있다.

 

우리는 “사학 징의”와 같은 시대의 자료를 통해 “벽위편”을 알고 있다. 이 “벽위편”은 제목 그대로 ‘벽사위정’(闢邪衛正)을 표방한 책으로서 당시 조정이나 양반 사족들 사이에 논의되었던 각종의 척사론(斥邪論)들을 잘 모아 놓았다. 흔히 상소문의 형태로 제시되는 이러한 논의들이 “벽위편”의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사학 징의”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천주교 신도들의 심문 기록이나 처벌 과정을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신분이 상대적으로 낮은 신도들에 관한 내용들을 간직하고 있다. 이 점이 “사학 징의”와 “벽위편” 사이에서 드러나는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우리는 “사학 징의”를 통해 이백여 년 전에 일어난 신유 교난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사학 징의”는 당시의 교회사를 알기 위해서 일등 사료로 평가될 수도 있는 중요한 사료인 것이다.

 

 

맺음말

 

서기 2001년이 앞으로 몇 년이나 남았는가? 이 해는 신유 교난이 일어난 지 이백 주년이 되는 해이다. 신유 교난의 과정에서 주문모 신부, 정약종 회장을 비롯해서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순교했다. 강완숙(姜完淑)이나 윤점혜(尹店惠)와 같은 여회장들도 순교의 대열을 따랐다. 이들은 순교를 통해 자신의 굳은 믿음을 증언했고, 우리에게 소중한 신앙 유산을 남겨 주었다.

 

1801년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황무지를 옥토로 바꾼 인물들이다. 외부의 도움 없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고 지켜 나갔던 장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문화 전통과 그리 .스도교 신앙의 조화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마땅한 그들에게도 감사와 영광이 주어져야 한다.

 

오늘의 103위 성인들 가운데는 1801년의 순교자가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아니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순교자를 현양해 온 한국 교회의 전통에 따라 마땅히 신유 교난의 순교자들을 위한 시복 시성 작업을 진행시켜야 할 것이 아닌가.

 

이 시복 시성 운동은 그들에 대한 사료의 정리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에서 “사학 징의”의 철저한 번역과 주석 작업이 요청되는 것이다. 한글 번역본 “사학 징의”의 간행을 위한 좀더 큰 관심을 기대해 본다.

 

[경향잡지, 1992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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