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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주고받는 말 속에서 밝혀진 믿음 -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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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23

[신앙 유산] 주고받는 말 속에서 밝혀진 믿음 : 성교요리문답

 

 

머리글

 

박해 시대의 신도들이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증거하기 위해서는 교리 교육이 지속적으로 요청되었다. 당시의 교리서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유일하고 참된 가르침으로 제시하고 사람들의 모든 생활 양식에 그 가르침을 관련지으려 했다. 또한 박해 시대의 교회는 ‘이교적’(異敎的) 문화 풍토 안에서 자신의 순수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결의에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더욱 굳은 신앙과 그 신앙에 따르는 철저한 실천을 요구해 왔다.

 

원래 신앙은 교리에 대한 지식임과 동시에 그 교리를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여 실천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교회는 믿음과 실천을 요구했고, 자신의 교의(敎義)와 윤리적 규범을 가르치고자 했다. 이 가르침을 위해서 가장 효과적 방법으로 문답식 교리서가 편찬되었다.

 

문답식 교리서는 질문과 응답의 형식을 사용하여 특정 교리의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전해 주고자 했다. 문답서에서 최소한의 말수로 집약된 가르침들은 신도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문답서는 새로운 삶을 깨우쳐 주는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다.

 

박해 시대 우리 교회에서 널리 쓰여졌던 대표적 교리서로서는 “성교요리문답”을 들 수 있다. 사본 문답(四本問答)으로도 불리었던 이 책은 조선 교회가 처음으로 채택한 교리서였다.

 

 

이 책은 어떤 책인가?

 

문: 성교회 안에 사람으로 은총을 얻게 하는 예규가 있느냐. 답 : 성사(聖事)가 있느니라(성사는 성총을 이루는 거룩한 예절이니 무형한 성총의 유형한 모상과 보람이니라) - ‘영세 문답’에서.

 

박해 시대의 교회에서도 은총을 얻는 방법으로 성사를 강조했다. 교회의 칠성사는 바로 은총을 얻는 지름길이었다. 그러기에 오늘날까지 가톨릭 교회에서는 철성사의 중요성을 거듭거듭 확인하고 있다. 이 칠성사 가운데 영세와 고해, 성체와 견진은 일반 신도들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성사였다. 혼배성사, 신품성사, 병자성사는 신도들이 특수한 경우에 받을 수 있는 은총이지만, 앞서 지적한 네 가지의 성사는 신앙의 실천에 근본이 되는 성사였다. 이 네 가지 성사에 관해 가르쳐 주고 있는 “성교요리문답”은 이 때문에 ‘사본 문답’이라는 다른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성교요리문답”은 모두 161개의 조목에 걸쳐 네 가지의 성사에 관해 깨우침을 주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 부분은 ‘영세 문답’ 편이다. ‘영세 문답’은 70조목에 걸쳐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교회의 근본 교리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이 부분에서는 천주 존재, 강생 구속, 원죄, 본죄, 수난과 부활, 영혼 불멸, 상선 벌악 등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교회와 성사에 관해 상세히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영세 문답’이 새내기에게 필요한 주요 교리를 전반적으로 제시한 것이라면, 여기에 이어서 수록되어 있는 ‘고해 문답’은 바른 삶의 길을 통해 하느님과의 도타운 관계를 이을 수 있는 방안의 제시였다. 모두 37개 조목으로 된 ‘고해 문답’에서는 자신의 삶에 대한 그침 없는 반성과 새로운 신앙에 대한 거듭된 확인을 요청하고 있었다.

 

또한 ‘성체 문답’(24조목)이나 ‘견진 문답’(23조목)에서도 신도들이 추구해 나가야 할 새로운 가치관과 새 삶의 형태를 강조해 주었다. “성교요리문답”에서는 이렇듯 교회의 근본 교리와 실천적 덕목들을 요약해서 전해주었다.

 

 

새로운 가르침의 참뜻

 

“성교요리문답”에서는 먼저 초월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설명하고 ‘하늘과 땅을 만들고 천신과 사람을 만들고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뚜렷한 개념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삼위 일체를 논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 수난과 부활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새로운 신관(神觀)은 우리 겨레가 일찍이 깨닫지 못했던 참으로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관은 또한 새로운 인간관(人間觀)의 기틀이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창조된 인간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들은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한 존재였다. 사람은 영혼을 가진 고귀한 존재라는 인식도 여기에서 강화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불평등한 신분제 사회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서 매몰된 자기 인격을 새롭게 확인하는 데에는 천주께 대한 신앙이 적격이었다.

 

“성교요리문답”은 당시의 신도들에게 은총의 기쁨과 함께 죄의 두려움을 일깨워 주었다. 여기에서는 사람의 원죄와 본죄 그리고 공심판(公審判)과 사심판(私審判) 및 상선 벌악을 전해 준다. 그리하여 신도들이 내세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불의보다는 정의를 따르고 화목한 삶과 올바른 표양을 존중해야 함을 가르친다. 그리고 ‘견진 문답’을 통해서는 신도들이 새롭게 추구해야 할 성신 칠은(聖神七恩)의 가치를 제시해 주었다. 슬기와 통달함과 의견과 굳셈 그리고 지식, 효경, 두려워함의 일곱 가지 은혜는 신도들에게 보장된 새로운 덕목이기도 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오 주 예수 친히 세우시고’, ‘종도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강조하고, 열교(裂敎)에 대한 경계를 펴고 있다. 조선 사회가 프로테스탄트와 만나기 이전부터 천주교에서는 교리서를 통해 이를 경계하도록 말했던 것이다. 이는 하느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믿는 형제들 사이의 슬픈 분열을 순박한 조선 신도들에게도 부끄러움 없이 전하려 했던 우매한 생각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도 신도 상호간의 일체감과 연대 의식을 일깨워 주고 있다. 조선인 신도들뿐만 아니라 ‘보천하’(普天下)의 봉교인(奉敎人), 세계의 모든 신도들이 하나임을 말했고, 그들이 결코 외로운 존재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고자 했다.

 

 

간행된 과정

 

“성교요리문답”은 프랑스인 도이예르(d'Ollieres, 1722~1780년) 신부가 한문으로 지은 “성사 요리”(聖事要理)를 한글로 옮긴 교리서이다. 프랑스 롱귀봉 지방의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도이예르 신부는 1759년 중국에 도착한 이후 북경에서 선교에 종사했고, 그 선교의 방편으로 여러 종류의 책을 지어 간행했다.

 

한문 서학서인 “성사 요리”가 조선에 전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801년 신유 교난의 과정에서 한글로 된 “성체 문답”이 정부 당국에 의해 압수된 바 있다. 이는 도이예르 신부가 지은 “성사 요리”에 포함되어 있는 ‘성체 문답’일 기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1801년 박해 당시에 압수된 “고해 요리”(1권), “요리 문답”(3권) 등도 도이예르 신부의 “성사 요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중국 교회에서는 “고해 요리”나 “요리 문답”과 같은 제목의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 교회가 창설되기 직전에 북경에서 간행되어 널리 읽히고 있던 “성사 요리”가 조선에 전래된 때는 교회 창설 직후부터 1801년 이전의 어느 때로 생각된다. 이 책은 중국을 왕래했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 가운데 어떤 이나 주문모 신부 등에 의해 조선에 전래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은 신도들의 요구에 따라 조선어로 번역되었고 “성체 문답”과 같이 낱권으로 나뉘어 제본되어서 읽혀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교요리문답”이 조선 교회에서 최초로 인정한 교리서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월이 요청되었다.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인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년) 주교가 감준한 한글판 “성교요리문답”이 목판본 네 책으로 간행된 때는 1864년이었다.

 

그 이후 이 책은 목판이나 활판으로 계속 간행되었으며, 한글본뿐만 아니라 국한문 혼용본으로도 간행되어 전교에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중엽 박해 시대에 간행된 이 책은 1934년 “천주교 요리 문답”이 나오기까지 70여 년 동안 조선 교회의 대표적 교리서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맺음말

 

한 권의 책이 특정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책의 내용과 당시 사회의 특성을 동시에 주목해야 한다.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지식과 사회의 특수한 상황이 서로 조응할 때에야 그 책은 비로소 사회적 기능, 역사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성교요리문답”을 오늘의 발전된 신학(神學)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가톨릭 교회의 심오한 신학을 소박하게 표현한 서유럽 교리서의 모조품 정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성리학(性理學)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있던 조선 후기 사회의 하잘것없는 백성들에게 던진 파문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간략함을 지적하기에 앞서 이 책이 조선 후기 사회에서 떨칠 수 있었던 그 큰 힘의 실제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그리고 조선의 잣대를 가지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삶과 믿음을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성교요리문답”이 가지고 있는 한국 정신사에서의 중요성이 확인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2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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