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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요셉 공경 - 요셉성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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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22

[신앙 유산]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요셉 공경 : 요셉성월

 

 

머리글

 

가정은 한 사회의 가장 기초적 단위일 뿐만 아니라, 혈연을 통해 연결된 가장 강인한 구성체이다. 가정의 주장이 되는 가장은 그 가족 구성원 중 아버지나 장남이 맡아 왔고, 가정을 꾸려 나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의 판단과 권위는 매우 존중되어 왔다.

 

인류 사회에서 가장의 역할이 중시되었던 사례로는 고대 로마 제국이나 동(東)아시아의 전통 사회를 들 수 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는 가장이 가족에 대한 생살 여탈(生殺與奪)의 권리를 갖기까지 했다. 동아시아 사회에 있어서도 가장은 가족의 중심이었으며, 그 가장의 가르침이나 명령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의 로마나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모두 가부장제(家父長制)의 전통이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이 두 지역의 가부장제 문화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확인된다. 예를 들면, 고대 로마의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가장의 권리를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특성이 있었다면, 동아시아의 가부장제에서는 가장에 대한 가족 구성원의 의무가 상대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그리하여 효도와 같은 가장에 대한 가족 구성원의 의무는 매우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정규적 교육 기관에서나 사회 교육 과정을 통해 특히 강조되어 왔다.

 

우리 나라 사회도 가부장제적 전통이 매우 강했다. 가장에 대한 순종은 특히 강조되었고, 남성 우위의 문화 풍토와 관련하여 가장의 위상이 매우 높았다. 전통 사회의 우리네 선비들은 가장에 대한 효도가 임금에 대한 충성의 바탕이 된다고 생각했다. 한 가문의 가장일 수밖에 없었던 그 선비들은 충성과 효도를 한 맥락에서 파악하였지만[忠孝一脈之敎化], 충성보다는 효도를 더욱 강조해 왔다. 가장의 권위를 높이려던 그들의 시도는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가부장제 사회였던 조선 왕조에 수용된 천주교 신앙에서는 성가정(聖家庭)의 존재를 가르쳐 주며 그 성가정의 가장인 요셉 성인의 역할을 뒤늦게 강조해 주었다. 여기에서 요셉 성인의 공경이 신도들 사이에 번져 나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요셉 성인 공경은 그 사회 구성원인 신도들의 정서에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조선의 문화가 서로 만나 ‘요셉 공경’이라는 굳은 신심의 형태로 나타났다.

 

 

우리 교회의 요셉 공경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 가운데 하나로는 천상의 성인들과 지상의 신도들이 한 살림을 이루고 있으며, 신도들은 성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들 수 있다. 그러기에 신도들은 성인들의 특별한 보살핌을 간구하며, 앞서간 그들이 살았던 삶의 자취에 따라 자신의 삶을 이끌어 보고자 한다.

 

또한 우리 교회에서는 신도들의 가정이 성가정의 모범을 따르도록 권고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요셉 성인으로 구성된 성가정은 모든 신도들에게 가정의 본보기로 인식되었다. 이 성가정의 주장인 요셉 성인은 모든 가장과 아버지들에게 모범이 되는 분으로 떠받들어졌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養父)였고, 헤로데 왕이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릴 때 아기 예수를 보호해서 그 학살을 피하게 했다. 또한 누구든지 “첫아들을 주님께 바쳐야 한.”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요셉은 그를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했다.

 

이렇듯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이전 그를 결정적으로 보호하고 구세주로서의 역할을 예비케 하였다. 무엇보다도 요셉은 땀 흘려 일해서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벌어먹였다. 요셉은 목수일을 뼈빠지게 하다 등이 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성실한 가장이었고 자애로운 아버지였음에 틀림없다.

 

요셉에 대한 신심은 동방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15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서방 교회에서도 요셉 축일을 3월 19일로 정하고 요셉 성인에 대한 공경을 널리 보급시켜 갔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예수의 성 데레사(1515~1582년)나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1567~1622년)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고 보편화되어 갔다.

 

요셉 성인에 대한 특별한 신심은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크게 성행했다. 1870년 교황 비오 9세가 요셉 성인을 보편 교회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레오 13세 교황도 요셉을 가장의 본보기로 선포하면서, 성인들 가운데 성모 마리아의 다음가는 자리로 그를 높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요셉 성인을 ‘노동자의 수호자’로 선언했고, 비오 11세는 ‘사회 정의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2세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축하하는 새로운 관례에 따라 바로 이날이 ‘성 요셉 노동자의 대주보’ 축일임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요셉 성인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교회에서 남다른 존경을 받고 있다.

 

 

한국 교회와 요셉 공경

 

가부장제의 전통이 강했던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일찍부터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을 도타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중국의 북경 교구에서도 요셉 성인을 주보로 받들어 모셨고, 요셉 성인이 중국의 보호자라는 이해를 갖게 되었다. 중국 교회의 요셉 성인에 대한 공경은 중국의 문화 풍토와 교회의 가르침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결과로 더욱 보편적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그 자발적 창설 이후 중국 교회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아 왔다. 이 인연으로 인해 우리 교회에서도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일찍부터 싹터 왔다. 요셉 성인은 조선 교회의 주보로 받아들여졌고,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실천되었다. 그러나 1831년 조선교구가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되어 설정되고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선교구의 독자성을 강화시키고자 했고 여기에서 조선교구의 새로운 주보를 ‘성모 무염 시태’(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로 정하고자 했다. 그들은 주보의 변경을 교황청에 청원했지만, 교황청에서는 조선 교회가 성 요셉과 함께 ‘성모 무염 시태’를 공동의 주보로 섬기도록 배려했다. 그러므로 박해 시대의 우리 교회에서도 성 요셉은 교회의 주보로서 계속하여 받들어 왔다.

 

한편,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활발하게 타오르고 있던 19세기 후반기에 교회에서는 성 요셉 대축일(3월 19일)이 들어 있는 3월을 ‘성 요셉 성월’로 지정하여 의인이며 신앙인의 모범인 요셉 성인의 덕을 기리고 본받게 하였다 이 교회 가르침에 따라 1872년 북경의 구세당(救世堂)에서는 “성 요셉성월”(聖若瑟聖月)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곧 조선 교회에 전래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중국 교회에서는 요셉 신심에 관한 또 다른 서적들이 보급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조선에 전래되어 “요셉성월”이라는 한글 제명으로 번역되어 신도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있었다. 이 책은 16×22cm 크기에 두 권으로 나뉘어 있으며 모두 125장의 분량으로 되어 있다.

 

현재 한국 교회사 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이 책에서는 “제1일은 성 요셉이 의덕(義德)의 사람임을 의론함이라.” “제4일은 성 요셉이 성모의 잉태하심을 보고 마음에 금심하심을 의론함이라.”는 등과 같은 제목을 달고 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요셉성월”은 요셉 성인의 덕행과 행적을 일과(日課) 형식으로 제시하며 3월의 요셉성월에는 매일 같이 요셉 성인을 묵상하며 받들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요셉 성인이 가장으로 보여 주었던 훌륭한 모범들을 강조해 주고 있다. 이 책이 당시의 우리 교회에 따뜻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맺음말

 

이 “요셉성월”은 중국의 다른 한문본에서 번역된 “성 요셉성월”이 1887년에 활판으로 간행되자 거의 활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요셉성월”은 우리 교회와 신도들에게 성가정의 삶을 일깨워 주었고 가장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인식을 깨우쳐 주었다. 여기에서 “요셉성윌”은 우리 조선 교회의 정신사에 있어서 한자리를 차지하는 책자가 되었고, 요셉 신심을 널리 보급하는 도구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요셉 신심이 배경이 되어 1887년에는 “성 요셉성월”이 활판으로 간행되어 더욱 널리 보급될 수 있었다. “성 요셉성월”은 같은 제목의 중국 신심서를 번역한 것이었다. 이 책은 1963년까지 제5판을 간행할 정도로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보다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신심들이 더욱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차제에 요셉 신심의 의미와 전개 과정을 음미하며 오늘의 ‘요셉성월’을 보냄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경향잡지, 1992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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