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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날마다 다진 믿음 -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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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21

[신앙 유산] 날마다 다진 믿음 : 천주성교공과

 

 

머리글

 

우리의 교회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초기의 신앙 공동체가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유지, 발전되어 온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이 결속력으로 인해 그들은 박해의 격랑을 헤쳐 나갈 수 있었으며, 친족과 이웃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자기 신앙의 옳고 바름을 주장하고 지켜 나갈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삶의 간고(艱苦)함이나 죽음의 두려움마저도 이로 인해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선앙의 선조들이 보여 주었던 그 결속력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게 된다. 그들의 결속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 모두가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대군 대부(大君大父)로 받드는 한 형제요 자매였다. 그들은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께 충성과 효성을 드리며, 신앙 공동체라는 큰 가정 안에서 형제간의 우애를 나누고자 했다.

 

이러한 그들의 믿음과 삶에 있어서 기도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과 인격적 친교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기도는 그들 서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일치시켜 주는 유대가 되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날마다 다지며, 하느님과 신앙 공동체에 대한 신뢰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박해 시대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신도들의 공동 기도를 이끌고 신도 서로간의 유대를 다져 준 가장 대표적 기도서로는 “천주성교공과”를 들 수 있다.

 

 

박해 시대의 기도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와 성사가 요청된다. 그러나 이 기도와 성사의 관계에 있어서는 기도가 성사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칼 라너와 같은 현대의 신학자는 “성사 없이는 구원될 수 있어도 기도 없이는 구원될 수 없다.”고까지 말하게 되었다. 이렇듯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박해 시대는 신앙의 선포와 고백 그리고 그 신앙의 공개적 실천이 금지되던 때였다. ‘신앙의 자유’가 부정되던 박해 시대에는 성사를 집전하는 성직자들의 사목적 활동도 엄격히 제약을 받게 되었다. 가톨릭의 7성사 가운데 고해성사나 성체성사, 그리고 견진성사나 병자성사 등의 집전권은 성직자들만이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박해로 인하여 신도들은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비롯한 성사에의 참여 기회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해 시대의 교회와 신도들은 구원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당시 신도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들의 믿음과 실천적 덕목을 그침 없이 확인하는 행위였으며, 신도로서의 공동체적 의지를 새롭게 하는 방법이었다.

 

박해 시대의 교회에서도 우리의 선조들은 신도들에게 기도서를 만들어 제공해 주었다. 이 기도서는 “주여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루가 11,3)라는 사도들의 정신에 따라 신구약 성서와 교회의 전통을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일반 신도들은 성서보다도 기도서를 더 자주 접하며 구원의 길을 예비하고 신도로서의 자의식을 다져 갔다.

 

 

“천주성교공과”의 편찬

 

우리 교회사에서는 교회 창설 직후부터 기도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우리 나라 교회에는 18세기 후반기 북경(北京) 교회에서 쓰여지던 “천주성교일과”(天主聖敎日課)나 그 축약본인 “수진일과”(袖珍日課)와 같은 한문 기도서가 전래되어 있었다. 이 기도서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편찬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한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한글본 기도서의 간행이라는 사실이다. 초기 교회에 관한 기록을 검토해 볼 때 이미 1801년 이전에 한글본 “천주성교일과”가 번역 보급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실, 1788년을 전후하여 당시의 교회에서는 많은 한글본 교회 서적들이 보급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천주성교일과”와 같은 기도서도 나타나게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기도서들은 1801년의 박해를 거치는 과정에서 흩어져 갔다. 그러나 얼마 아니 가서 교회 재건 운동이 진행되고 그 결과로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이후 기도서의 중요성이 다시금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새로운 기도서를 편찬하기 위한 노력을 앵베르(Imbert) 주교의 지휘 아래 전개해 나갔다. 이때가 1838년이었다.

 

선교사들은 1780년 이후 중국 사천(四川) 교구에서 통용되던 기도서인 “천주경과”(天主經課)를 번역해 갔다. 이 책은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중국 선교사였던 모예(Moye, 1730~1793년) 신부가 간행한 기도서였다. 그리고 여기에 “천주성교일과”, “수진일과” 등 예수회 계통의 기도서에 수록된 기도문의 일부를 발췌하여 함께 묶어 “천주성교공과”를 편찬 보급하게 되었다.

 

 

“천주성교공과”의 보급

 

이렇게 편찬된 기도서는 우선 필사되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기도서의 대량 보급을 위해서는 인쇄 간행이 요청되었다. “천주성교공과”가 인쇄 보급된 때는 대략 철종(哲宗) 말기부터 고종(高宗) 초기의 시기였다. 이때 우리 나라의 교회는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이 발전을 북돋우고 신도들의 신심을 드높이기 위해 교회에서는 목판 인쇄소를 설치해서 교회 서적을 간행했다. 그 첫 번째 인쇄소가 1859년에 설치되었고, 이어서 1864년에도 또 다른 인쇄소가 서울에 세워졌다.

 

“천주성교공과”가 1864년에 간행되었음은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 즉 첫 번째 인쇄소가 설치된 직후 이 책이 간행되었을 개연성도 매우 크다. 그러나 이 책은 1866년에 일어난 병인 교난으로 인해 더 이상 간행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되거나 포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박해의 과정에서도 신앙의 불길을 지피기 위해 교회 서적의 간행을 위한 노력은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81년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천주성교공과”가 활판본으로 인쇄되어 국내에 은밀히 전파되어 갔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던 1888년 교회는 활자와 인쇄 시설을 요코하마로부터 서울 종현으로 옮겨 교회서적을 간행해 갔다.

 

“천주성교공과”는 힘찬 인쇄 기계 소리와 함께 더욱 많이 찍혀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이후 한국 천주교 신도들의 영성을 특징지우고 그 정서를 규정해 주는 중심적 기도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천주성교공과”도 신학의 발전과 시대 정신의 변천에 따라 자신의 기능을 점차 줄여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천주성교공과”는 100여 년 이상 누리고 있던 중심적 기도서로서의 역할을 “가톨릭 기도서”에 물려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걸어 들어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새로운 기도서로서 “가톨릭 기도서”가 간행된 때는 1972년이었다.

 

 

맺음말

 

“천주성교공과”의 간행과 보급은 우리 교회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던져 주는 사건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기도서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에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기도서에 포함된 기도들을 바침으로써 유일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계속하여 고백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교회의 모든 성인 성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애를 이해하고 그들의 삶과 믿음을 본받으려는 결의를 다져 나갔다. 또한 그들은 이 기도서의 기도를 통해 자신이나 이웃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전혀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다. 또한 교우뿐만 아니라 교우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는 인류애를 그들은 터득해 나갔다.

 

이와 같이 고상한 바람과 사랑 실천의 의지를 담고 있는 기도서가 “천주성교공과”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서가 박해 시대 신도들의 사상적 특성을 이해하게 해주는 주요 자료임을 알게 된다.

 

박해 시대는 유교주의적 원리가 지배하던 때였다. 우리는 이 전통적 지배 원리에 대한 도전과 거부의 의사를 “천주성교공과”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 기도서는 바로 그와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전통적 유교주의의 사고 방식이 무너진 1960년대까지도 커다란 저항 없이 사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도들은 박해 시대 당시 우리 나라 사회보다 100년을 앞선 선견적(先見的) 기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천주성교공과”를 외우며 읽고 기도하던 박해 시대 평범한 신도들의 종교 신앙과 사상이 새롭게 주목되어야 한다. 이 새로운 관심을 풍부하게 채우기 위해서는 “천주성교공과”를 비롯한 기도서들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경향잡지, 1992년 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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