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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성심께 바친 신심 - 예수 성심 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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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19

[신앙 유산] 성심께 바친 신심 : 예수 성심 회요

 

 

머리글

 

가톨릭 신앙이 있는 곳에는 이 신앙을 증거하고 실천하기 위한 신심이 있게 마련이다. 이 신심들 가운데 예수 성심께 대한 선심은 그 뿌리가 자못 깊다.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성심에 대한 신심 유형이 드러나고 있다 하며, 이 신심이 13세기에는 독일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전했다 한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성 에우데스와 성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콕과 같은 명상가들에 의해 이 신심이 체계화되어 갔고, 전세계 교회로 전파되어 갔다.

 

 

우리 나라 교회와 성심

 

우리는 초기 우리 교회사에서 여러 유형의 신심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지니고 있던 신심 중에는 성모 마리아 신심이 초기부터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1791년 이후 순교자에 대한 신심도 널리 번져 가고 있었다. 이러한 신심과 더불어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일찍부터 확인되고 있다.

 

성심에 대한 신심이 한국 교회에 전래된 때는 1801년 이전의 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1801년 정부 당국에서 압수한 천주교 서적 가운데에 “공경 예수 성심”이라는 책자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책자는 한문으로 쓰여진 신심서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 책 제목이 나타내는 것처럼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데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아니하지만, 이 책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땅에서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싹트고 있었음을 넌지시 알려 준다.

 

그러나 예수 성심에 관한 본격적 인식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국 이후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신의 모국에서 성행하던 성심 신심을 이 땅에서도 실천하고 있었고, 선교 지역의 일반 신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강조하였다. 예를 들면 1839년에 순교한 샤스탕(Chastan) 신부는 순교 직전 부모에게 보낸 애절한 편지 끝에 다음 같이 쓰고 있다.

 

“예수 마리아의 성심 안에서 가장 진설한 애정으로 결합하여 있는 지극히 겸손되고 지극히 정성스러운 아들, 교황 파견 선교사 쟉크  · 오노레 · 샤스탕 올림.”

 

순교자 샤스탕 성인은 진실한 애정으로 예수 마리아의 성심과 결합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신심은 조선인 신도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 나라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에게서도 우리는 예수 성심에 관한 신심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1847년 조선으로 입국을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여건이 허락치 아니 하여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태(船)를 묻은 고국 산천을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에서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다.

 

“주여 보소서, 저희들의 슬픔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 저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의 성심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로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최양업은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과 함께 예수 성심께 관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성심께 바친 크나큰 신심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신심은 19세기 세계 교회사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던 신심이었다. 교황 비오 7세(재위, 1800~1823년)는 성모 성심 축일을 인가했고(1805년), 예수 성심 공경에 관한 특별한 가르침을 준 바가 있다. 또한,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년)는 예수 성심 대축일과 그 고유미사 경본을 제정했고, 예수성심 공경에 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영성적 분위기 속에서 ‘성심 수녀회’가 창설되었고(1800년), ‘예수 성심 전교 수도회’도 세워질 수 있었다(1854년). 또한 ‘성모 성심회’와 같은 신심 단체가 창설되어(1836년), 성심께 대한 크나큰 신심이 표현되고 있었다.

 

세계 교회가 가지고 있던 이와 같은 영성적 경향은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서 우리 나라 교회에도 심어졌다. 그리하여 1846년 11월 2일 다블뤼(Daveluy) 신부는 충청도 공주 수리치골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했다. ‘성모 성심회’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지 꼭 10년 후에 그 신심 단체가 우리 나라에 전파되었고, 신도들은 “성모 마리아와의 새로운 결합을 기뻐하며…… 전세계에 퍼져 있는 회원들과 함께 뜻을 모아” 성심 공경에 대한 자세를 가다듬어 갔다.

 

한편, 성심에 대한 신심은 1866년 이래 몇 년 간에 걸쳐 진행된 혹독한 박해의 격랑을 뚫고 의연히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878년 리델(Ridel) 주교는 우리 나라 교회를 예수 성심께 봉헌하려 했다. 그 후 1883년에는 예수 성심에 대한 대표적 신섬서인 “예수 성심 성월”이 한글로 번역될 수 있었다. 그리고 1899년 뮈텔(Mutel) 주교는 전세계의 교회와 함께 우리의 교회를 예수 성심께 특별히 봉헌했다.

 

20세기에 접어든 한국 교회에서도 예수 성심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계속 강조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첫첨례육’과 같이 매월 첫 금요일에는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이 표현되기도 했다. 그리고 ‘포항 예수 성심 시녀회’가 창설되었고(1953년), ‘성모 성심 수도회’와 ‘성모 성심 수녀회’도 창설되기에 이르렀다(1975년). 또한 ‘성심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했고(1956년), ‘예수 성심 전교 수녀회’와 수도회가 이 땅에서 새로운 일터를 발견했다(1965, 1985년). 이 밖에도 교회에서 운영하는 여러 교육 사회 기관, 복지 기관 등이 성심께 봉헌되었고, 그 이름을 빌려 운영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뿌리깊은 것이며,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예수 성심 회요”의 번역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개항기 한국 사회에 있어서도 예수 성심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한문으로 간행된 예수 성심에 관한 신심서들이 한글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즉 중국 홍콩에서 1875년에 간행된 “경례 예수 성심월”(敬禮耶蘇聖心月)이 예수 성심 성월이란 제목으로 1883년에 한글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예수 성심 회요”도 번역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 성심 회요”는 1878년에 중국에서 간행된 같은 이름의 책자를 번역 한 것이다.

 

“예수 성심 회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첫 부분에서는 예수 성심 공경의 유래를 논하면서 17세기의 성 에우데스(J. Eudes, 1601~1681년)와 마르가리따 마리아 알라콕(M. M. Alacoque, 1647~1690년)의 예수 성심 신심을 논하며, 이에 대한 교회 당국의 장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에 이어서 예수 성심 신심이 지향하는 목적과 이 신심의 실천자에게 약속되는 죽은 다음의 구원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예수 성심회’ 자체를 소개하고 있다. 즉, 1765년 이래 존재해 오던 이 회를 1803년 교황 비오 7세가 인준했음을 말하고, 이 회의 급속한 발전상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회의 입회 절차와 회원에게 약속된 대사(大赦)를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예수 성심 회요”는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을 조직화하고 널리 선포하기 위해 번역되었다. 이때 번역된 사본이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번역 작업과 더불어 ‘예수 성심회’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갔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입에 간행된 한국 교회의 지도서들에서는 교회에서 공인하는 여러 신심 단체 중 ‘예수 성심회’가 제일 먼저 꼽히게 되었다.

 

 

맺음말

 

신심 운동은 시대의 상황에 의해 일정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신심 운동은 시대의 요청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난 세기 박해 시대 전례 참여의 기회를 제한당하던 신도들은 예수 성심 신심 등을 더욱 열심히 실천했고 이 신심 행위가 미사나 성사의 참여 못지않는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다. 또한 박해 시대에는 개개인의 신앙을 북돋우려 개인 신심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에는 개인 신심 위주의 영성적 전통이 의연히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쇄신과 발전을 지향하는 교회 내적 신심 운동이 강화되어 갔다. 또한 현대 교회에서는 개인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위주로 한 신심이나 교회 자신의 발전만을 강조하던 신심 행위 못지않게 인류와 사회의 환경을 그리스도의 뜻에 맞갖도록 변개시키려는 새로운 사도직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에서 논의되거나 실천되는 각종 신심들은 교회와 인류 공동체의 진정한 발전을 동시에 지향할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날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 무한한 신락(神樂)을 주었을 예수 성심 신심은 신도 개개인과 우리 교회 자신을 새롭게 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 기여에 예수 성심회가 끼친 공로도 적지 아니할 것이다. 여기에 “예수 성심 회요”를 함께 생각해 보는 까닭이 있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 신심의 전통과 앞으로의 방향을 또한 생각해 보고자 했던 바이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신심의 현주소와 그 나아갈 방향에 대해 자주자주 사색해 보아야 한다.

 

[경향잡지, 1991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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