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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박해를 이긴 믿음의 기록 - 김기호의 봉교 자술(奉敎自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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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18

[신앙 유산] 박해를 이긴 믿음의 기록 : 김기호의 봉교 자술

 

 

머리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그 전반기 백여 년 간에 걸친 박해의 사실을 주요한 사건으로 서술해 주고 있다. 그리고 교회사에서는 우리 교회를 이끈 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과 성직자들의 업적을 크게 주목하고 있다. 그리하여 기존의 교회사에서는 우리 교회사의 주인공으로 순교자나 선교사 내지는 성직자만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사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인가? 순교자나 성직자, 선교사들만이 우리 교회사의 주인공이었나? 아니다. 이백여 년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 교회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기쁨을 구가하는 한 어우름 춤판이었다. 이 춤판에서 신망애 삼덕을 공유하며 율동을 같이했던 모든 이들은 우리 교회사에 있어서 공동의 주역이었다. 이 공동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는 김기호(金起浩, 1824~1903년)를 주목해 보고자하며, 그가 남긴 자전적 기록인 “봉교 자술”(奉敎自述)을 우리 신앙의 공동 자산으로 검토해 보려 한다.

 

 

김기호, 그는 누구인가?

 

김기호는 안동을 본관으로 하여 1824년 황해도 수안 땅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수안에서 십여 대에 걸쳐 세거(世居)해 왔으며,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그 지역에서 양반으로 대접받고 있었으며, 김기호는 이러한 사회적 신분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여 일찍부터 과업(科業)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십오 세 때 향시(鄕試)에 입격(入格)하였다 하는 바,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명민한 자질을 설명해 줄뿐만 아니라 그 집안의 사회적 위치를 짐작케 해주는 것도 된다. 즉, 그의 집안은 황해도 수안에서 일정한 명망을 누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당시 그곳의 향반(鄕班)들이 흔히 그러했듯이 그도 중앙의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려 했던 듯하다. 그러나 그는 진사시에 합격하지는 못했다. 항간에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그가 진사였다 하지만, 당시의 ‘과거 합격자 명단’[榜目]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한동안 과장(科楊)에 드나들고 있었으며, 다른 응시자를 위해 대리 시험을 쳐주는 대술(代述) 행위를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는 이러한 대술 행위를 통해 당시의 문란한 과거 제도를 한껏 비웃어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장을 넘나들며 세상의 명예를 쫓으려던 그의 삶에 있어서 큰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홀연히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내가 지난날 해오던 일들은 모두 다 헛되고 잘못된 것이었다. 내 삶과 마음에 남는 것이 무엇이며, 요긴한 일은 무엇이겠는가?”라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이러한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적 회의는 새로운 진리에 대한 추구의 노력으로 이어졌다.

 

 

김기호의 영세 입교

 

그는 삼십여 세가 넘어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는 자신의 한 친구로부터 “성세 추요”(盛世芻?)를 빌려 읽었고, 종전부터 우의를 나누고 있던 홍봉주(洪鳳周)와의 토론 과정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홍봉주의 인도를 받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났고, 그로부터 영세와 견진을 받았다. 그런데 베르뇌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 때는 1856년이었으며, 홍봉주가 베르뇌 주교의 측근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도 1850년대 후반기의 일이다. 그렇다면 김기호의 영세 연대는 종전에 알려져 왔던 1854년이 아니라 1850년대 후반기의 어느 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요한이란 본명으로 영세한 후 교회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베르뇌 주교로부터 전교 회장에 임명되어 황해도 지방의 전교에 종사했다. 또한 그는 신도들의 모임인 명도회(明道會)를 꾸려 나가며 그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봉사로 그는 베르뇌 주교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1866년에 시작된 병인년 대박해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활동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박해의 과정에서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많은 신도들이 순교했다. 그가 봉사하던 황해도 지역에서도 박해로 말미암은 신도들의 순교와 피신 행각이 그치지 아니했다. 그도 박해를 피해 향후 십여 년 동안 은신의 생활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훈장이 되어 학동들을 가르치며 신고(辛苦)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김기호의 본격적 교회 활동은 1876년 이후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개항 이후 새롭게 전개되는 국내외 정세에 발맞추어 교회 재건 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는 선교사들의 입국을 비밀리에 도와주었다. 그리고 블랑(Blanc, 白) 주교로부터 평안도 지방의 전교 회장에 임명되어 이곳에서의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전국의 평신도 대표격인 도회장(都會長)으로 임명받아 사도직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는 “구령 요의”(救靈要義)와 “소원 신종”(溯原愼終)과 같은 교리서를 지었고, 성경 번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는 1903년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김기호의 생각

 

김기호는 새로운 믿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믿어 실천했다. 신앙에 대한 그의 이러한 자세는 그가 남긴 “봉교 자술”을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지은 교리서인 “구령 요의”나 “소원 신종”을 통해 그의 정통 신앙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버거워하거나 되알지게 여기지 아니했다. 신앙은 그에게 큰 기쁨이요 지식의 원천이었고, 삶을 이끄는 북두(北斗) 지남(指南)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신앙을 통해 성리학에서 가르쳐 오던 불평등한 사회관이나 윤리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새로운 사회를 이끌 새로운 신념 체계를 수립해 갔다.

 

그가 일찍이 황해도 지방의 전교회장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전교할 때, 그는 “귀천과 노소를 막론하고 대하는 사람마다 존경하여 접대하니 가는 곳마다 환영하였다.”고 한다. 천주교 신앙은 그에게 신분 제도를 부인하는 평등 사상을 심어 주었고, 그는 이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남녀 평등 의식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 평등 의식의 근저에는 남녀 모두가 다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동등한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남녀 평등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부부의 상존 관계도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인 것으로 주장했다. 즉, 그는 “부부는 본시 한 몸이요 지위가 같은 짝이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부부 사이에는 동일한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여성관은 성리학적 여성관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그는 남존 여비적 관념을 타과하고 남녀 평등을 설파하고자 했던 근대적 지식인이었다.

 

그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돈독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영세할 때 받은 묵주를 죽을 때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었으며 묵주의 기도를 그침없이 드리고 있었다. 십여 년에 걸친 병인년 대박해의 풍파 중에서도 그가 그 묵주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기도를 계속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러기에 블랑 주교는 그에게 “성모께서는 너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연옥에 있지 않게 하실 것이다.”고까지 말했다 한다.

 

그는 돈독한 성체 신심(聖體信心)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성체의 은혜가 모든 은혜 중에 으뜸인 것으로 생각했고 신령성체(神領聖體)를 자주하며 마음으로 성체를 모시고자 했다. 또한 그는 성가회(聖家會)에 들어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의 성가정을 그리며, 가정의 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맺음말

 

김기호는 이렇듯 돈독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당시 교회의 대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신심과 지식이 합쳐진 저서들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풍찬 노숙(風餐露宿)을 마다하지 않으며 믿음을 선포해 나갔다.

 

그는 병인년 대박해에서 살아 남았다. 그러나 그는 순교자의 스승이었고 순교 성인의 벗이었던 사람이다. 박해 시대뿐만 아니라 영세 입교 후 그의 모든 삶은 순교와 증거의 연속이었다. 그는 피를 직접 흘린 순교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우리 교회사를 이끌어온 자랑스러운 주역들 가운데 하나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이 주역이 남긴 자전적 기록과 교리서들은 우리 신앙의 공동 자산이며 박해를 이긴 믿음의 기록인 것이다.

 

[경향잡지, 1991년 1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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