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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신앙심과 애국심의 어우름 - 안중근 의사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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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17

[신앙유산] 신앙심과 애국심의 어우름 : 안중근 의사 자서전

 

 

머리글

 

이땅에서 전개된 200여 년 간의 천주교회사에서 우리는 많은 인물들의 활동을 목격하게 된다. 예를 들면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진행되던 교회사의 전반기 100여 년의 역사에서는 이승훈, 이벽, 최양업 같이 교회의 창설과 발전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러고 정약종, 최창현, 주문모나 강완숙, 김대건 등과 같은 순교자들도 우리 교회사와 민족사에서 그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과정에서 그 후반기에 해당되는 19세기 말엽부터 오늘에 이르는 시대를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대표적 천주교인은 누구일까? 이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는 몇몇 사람들이 거론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가장 합당한 인물로 안중근(安重根, 1879~1910년 )을 거명하지 않을 수 없다.

 

개항 이후 오늘에 이르는 이 시기의 대표적 가톨릭인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우선 올바르고 굳은 신앙심을 가진 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았던 시대적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 겨레와 함께 고뇌하고 호흡을 같이 나눈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그는 분단된 오늘의 상황에 의해 남북으로 갈라져 살고 있는 6천만 겨레붙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안중근이리라. 그는 신앙심과 애국심의 조화를 이루었던 사람이다. 우리는 그 신앙심과 애국심의 어우름을 그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 혹은, “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자서전은 한국 근현대 교회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적, 신앙적 유산을 담고 있는 오늘의 고전인 것이다.

 

 

안중근과 그의 자서전

 

안중근은 1879년 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어머니 조(趙)씨의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개항 직후로서 우리의 역사에서 반봉건(反封建)과 반침략(反侵略)을 성취해야 할 과업이 제시되어 있던 때였다. 바로 이러한 시대를 살았던 안태훈은 일찍부터 개화 사상을 품고 반봉건 의식을 키웠고, 안중근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안중근이 천주교 신앙에 접근하게 된 계기도 그의 아버지에게서였다. 안중근은 1897년 그의 나이 18세 때에 아버지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당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로서 황해도 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빌렘(Wilhelm) 신부였다. 이 세례를 통해서 안중근과 빌렘(한국명 : 洪錫九) 신부 간의 끈질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는 토마스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은 뒤 빌렘 신부의 미사 집전을 도와 복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빌렘 신부의 격려를 받으며 교육 운동 등과 같은 사회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와 빌렘 산부 사이에 대판거리로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빌렘 신부는 뒷날 안중근이 의거를 단행한 이후 옥중에 갇힌 ‘안중근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동료 선교사와 뮈텔(Mutel) 주교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순 감옥을 찾아가 안중근에게 성사를 주었다.

 

안중근이 애국 계몽 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게 된 때는 을사조약이 맺어진 1905년 이후였다. 그는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짐을 목도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교육 구국 운동에 뛰어들었고 식산(殖産) 진흥 사업에도 종사했다. 그는 교육 운동의 과정에서 고등 교육 기관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뮈텔 주교를 방문하여 조선에 대학교를 세워 주기를 간절히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이러한 부탁에 대해 “한국인이 만일 학문이 있게 되면 교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의론을 꺼내지 마시오.”라는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안중근은 교육 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일제의 침략에 맞서는 무력 저항 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독립 전쟁론을 체계화시키며, 의병(義兵)의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했다. 그의 독립 전쟁론은 봉건적 충의관(忠義觀)을 탈피한 것이었으며, 짙은 민족 의식과 민권 의식을 전제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낭만적 휴머니스트(Humanist)이기도 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 주고자 했다. 그러기에 그는 국내 진공 작전 과정에서 포로로 잡힌 2명의 일본군 병사를 즉결 처분하자는 동료 의병들의 주장을 무릅쓰고 그들을 석방시켜 주기까지 했다. 그에게 있어서 포로를 죽이는 일은 살인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마당에서 포로로 잡힌 적을 풀어 준 그 윤리적 결단의 배경에는 “제오계는 사람을 죽이지 말고……”라는 천주 십계의 가르침이 자리잡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그는 이다지도 굳건하게 교회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있었다.

 

1908년 7월에 진행된 안중근 부대의 국내 진공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아니하고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을 새롭게 추진했다. 그리하여 그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제거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독립 전쟁의 전투 행위로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체포된 이후 일본 관헌들에게 자신을 일반 살인범이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했다. 이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집안 내력과 더불어 교회 활동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그의 애국 계몽 운동과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을 밝혔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동양 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 책은 그가 1910년 3월 26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에 따라 미완의 글로 남는다. 그러나 그의 동양평화에 대한 논리와 애국 애족적 정신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인식 등은 그의 신문 조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위인의 의미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는 영웅의 시대가 아니라 이름없는 민중이 역사의 주역을 담당하는 시대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가장 큰 꽃다발을 누구보다 많이 받고 있는 무덤은 영웅이나 위인의 무덤이 아니라 무명 용사의 무덤인 것이다. 현대사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온 모든 나라들은 무명 용사를 위한 무덤을 특별히 마련해 놓고 이들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19세기는 아마도 위인과 영웅의 세기가 아니었을까?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른 산업계의 영웅들, 약육 강식적 국제 관계에서 배출된 침략과 반침략의 영웅들, 새롭게 각성된 시민들이 중심되어 꾸려 나간 음악 · 미술 · 문학계의 위인들, 그리고 고양된 종교심을 고백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성웅(聖雄)들의 시대가 19세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름없는 민중의 시대인 20세기에서도 지난날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자랑스러운 전통과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뭇사람들의 마음속에 메아리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난날의 영웅 숭배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위인이나 영웅만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파악하려 했던 그 영웅 숭배론은 특정 인물의 독점적 지배나 주도권을 정당화하려는 비민주적, 전체주의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들이 지난날의 위인이나 영웅들을 아련하게라도 추억하고자 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 즉, 그것은 영웅과 자신과의 대비를 통해 역사 발전의 주도자인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 발전의 진정한 주역으로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역할을 다짐하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날 영웅이나 위인을 바라보는 시각상의 특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가 안중근을 위인으로 생각하며 그의 저서를 새로운 고전으로 평가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맺음말

 

안중근은 오늘날 우리의 민족적 위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그의 의거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를 의사(義士)로 지칭했으며, 식민지 시대 만주 땅 깊은 곳에서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와 같은 연극이 공연되기도 했다.

 

그 뒤 오늘에 이르러 그의 의거는 각급 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고, 그에 관한 전기는 10여 종을 넘어섰다. 그의 행적은 연극이나 영화로 그리고 아동용 만화로 형상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이 땅의 사람 중에서 그만큼 긍정적 평가를 받는 인물은 드물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다른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 즉 그는 생각과 행동으로 신앙심과 애국심을 조화시킨 인물이었고, 올바른 주장과 교회관을 지닌 신앙인이었다. 그는 평범한 우리들의 신앙심을 질적으로 고양시켜 준 또 다른 사람이었다.

 

[경향잡지, 1991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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