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신앙 유산: 천당 문의 방명록 - 치명일기(致命日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15

[신앙 유산] 천당 문의 방명록 : 치명 일기

 

 

머리글

 

사람은 나면서부터 자기 몸과 목숨의 소중함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람은 그 지혜가 쌓여 갈수록 자신의 몸과 목숨을 보호하려는 의사도 강해지는 모양이다. 물론 그 지혜의 경지가 넓어 인생을 달관하고, 우리가 사는 현세만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영원의 삶인 내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몸과 목숨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발견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 우리 주변에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가?

 

생인손 앓을 때 쏙쑥 쑤시는 통증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팔다리가 잘리게 될 때 느낄 육체적 고통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힘이나 자신의 원의와는 달리 물리적 힘에 의해 강요되는 죽음도 더 말할 나위 없는 고통일 것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옛 사람들은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함”[好生惡死]은 사람의 자연스런 마음으로 이해했고, 사람들이 고통보다는 편리함을 즐기려 함에 대해 결코 이상히 여기지 아니했다. 그러나 19세기의 60년대를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러한 일상적 관념에 도전했고 자신의 믿음을 위해 몸의 고통을 무릅썼으며,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희생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임을 알았으므로 순교자의 대열에 서서 믿음의 완성을 향해 나아갔고, 천당에 들어서며 천당 문의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을 피로써 각인(刻印)하고 천당의 주민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에 대한 간단한 사적을 조사하여 제시한 책이 바로 “치명 일기”이다.

 

 

“치명 일기”는 어떤 책인가

 

“치명 일기”는 1866년에 시작된 ‘병인년 박해’ 때에 순교한 사람들의 명단과 약전을 기록한 책자이다. 이 책의 편찬 작업은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주도했다. 뮈텔은 순교자에 대한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인 순교자들의 시복(諡福)과 시성(諡聖)을 위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91년 2월 조선에 교구장으로 부임한 이후 4년 동안 전국에 걸쳐 ‘병인년 박해’ 때의 순교자에 관한 조사 작업을 진행시켰다. 그리하여 그 조사된 결과를 정리하고 순교자들의 명단을 순교지 단위로 엮어서 한 권의 책자로 만들어 제시해 주었다.

 

즉, “치명 일기”에는 베르뇌(Berneux)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성직자와 조선인 순교자들이 순교 지역별로 일련 번호가 부여되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일련 번호 밑에 서술된 내용에는 순교자의 출생지 및 신앙 상태, 잡힌 날짜와 장소 및 기타 특기 사항들이 간략히 포함되어 있다.

 

이 “치명 일기”에는 1866년에 순교한 사람뿐만 아니라, 1868년의 ‘무진년 박해’ 때의 순교자 등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개항 이후인 1879년에 순교한 다섯 명에 관한 기록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에 열명(列名)된 순교자는 모두 877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들 가운데 24명은 1968년에 시복되었고, 1984년에는 시성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기에서 “치명 일기”의 내용을 엿볼 수 있는 몇몇 순교자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24. 송 베드로 백돌 : 남묘(南廟) 앞에 살던 사람이요, 신 짓는 장색(匠色)이러니, 무진(1868) 정월 초파일에 잡혀 우포청(右捕廳)에서 문답을 외우며 칼머리로 장단쳐 노래하여 같이 갇힌 교우를 위로하더니, 잡힌 후 5일에 옥중 치명(獄中致命)하니, 나이가 40세러라.

 

249. 장 요한 춘명 : 김 안나의 장부요, 서울 뚝섬 사람으로서 남문 안 선혜청(宣惠廳) 앞에 와 국밥 장사하더니 무진년에 포청으로 잡혀가 옥중 치사(獄中致死)하니, 나이 40세러라.

 

348. 김 사도 요한 : 연산(連山) 사람이라. 정축년(1877)에 다른 교우와 한가지로 경포(京捕)에게 잡혀 서울로 와 옥에서 굶주려 죽으니 나이 36세러라.

 

이상에서 잠깐 살펴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치명 일기”는 대부분 평범한 신도들의 굳은 믿음과 의연한 순교를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병인 교난과 순교

 

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백여 년 간에 걸쳐 진행된 박해 가운데 1866년에 시작된 ‘병인년 대박해’ 혹은 병인 교난(丙寅敎難)은 가장 참혹한 것이었다. 이 박해의 과정에서 적어도 2천여 명 이상의 신도들이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중 877명의 순교자들이 “치명 일기”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 병인 교난이 일어나게 된 원인에 관하여 잠깐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치명 일기”가 형성되기에 이른 배경적 사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병인 교난의 정치적 배경으로는 대원군 정권의 등장을 우선 들 수 있다.

 

대원군은 노론(老論)의 세도정치에 맞서 왕권 강화를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벌열(閥閱)들을 억압해야 했으며, 벌열들로부터 예상되는 반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상적 순수성을 강조하여야 했다. 이를 위해 대원군은 당시 사학으로 규정되고 있던 천주교에 대해 준엄한 탄압 정책을 강행했고, 이를 통해서 보장된 자신의 사상적 순정성을 내세우며 본질적으로 유학자의 집단인 벌열 가문들에 대한견제를 시도했다. 그리하여 대원군은 서원 철폐 등과 같은 정책을 강행할 수 있었다.

 

더욱이 대원군이 집권할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 동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프랑스의 식민주의 정책이 강화되어 가던 때였다. 프랑스는 자신의 본국에서는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었지만, 해외에 있어서는 천주교 선교에 종사하는 선교사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국의 세력 팽창을 기도하기도 했다.

 

병인 교난 과정에서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를 잡아 사형에 처했고, 이 사건은 프랑스의 조선 침략이라는 ‘병인 양요’(丙寅洋擾)로 이어졌다. 병인 양요는 신도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촉발시켰고, 이러한 탄압은 오페르트 사건으로 이어졌다. 오페르트(Oppert) 사건이란 독일 상인 오페르트와 대원군의 탄압을 피한 페롱(Feron) 신부 등이 합작하여 대원군의 생부(生父)가 묻힌 묘를 파헤친 사건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천주교 신도들에게는 더욱 큰 박해가 가해졌고 홍주(洪州)나 해미(海美) 등지에서는 신도들을 산 채로 매장하여 죽이는 극단적 복수극이 자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적어도 2천여 생명이 죽어갔다. 그렇다면 그 순교자들은 폭압적 집권자의 정략에 희생된 힘없는 존재였는가? 아니면, 도도한 세계사의 조류에 휩쓸린 나약한 개인의 슬픈 운명의 상징에 지나지 아니한 것인가? 그러나 순교자들을 이렇게만 평가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순교자들은 성리학 중심의 문화 풍토를 인간의 평등성을 기본으로 한 새로운 사회로 바꾸어 나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는 묵은 가치보다는 복음이 가르치는 사랑의 정신에 감복하며 사람 사이의 우애를 강조하고 있었다. 순교자들은 대부분 당시 그들이 살았던 현세를 부정하며, 내세를 지극히 그리워했다. 이와 같은 그들의 내세 지향성은 모순에 찬 현세에 대한 비판 의식의 또 다른 측면이기도 했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 교난의 순교자들은 이와 같이 새로운 사상의 특성을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드러내 주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신심을 간직하고 있던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의 순교가 갖는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

 

 

마무리

 

“치명 일기”는 바로 이러한 순교자들에 관한 간단한 기록들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신념과 만날 수 있다. 굶주려 죽고 매 맞아 죽을 형제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목에 들씌워진 큰칼로 장단을 맞추며 노래할 수 있었던 의연한 사람들의 자세를 우리는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치명 일기”를 롱해 죽음까지도 이길 수 있었던 그 많은 순교자를 만나게 된다.

 

“치명 일기”는 1895년 뮈텔 주교에 의해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뮈텔 주교는 이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을 준비하기 위해 이 책을 간행하여 그들의 순교 사실을 거듭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이 책은 l986년 성 황석두 루가 서원에서 현대 활자로 옮겨 원문의 영인본을 첨부해서 간행한 바 있다.)

 

[경향잡지, 1991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49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