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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 최양업 신부의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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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14

[신앙 유산]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 최양업 신부의 서한

 

 

머리글

 

조선 후기 18~19세기 사회에 있어서 천주교 신앙은 애증(愛憎)이 교차하는 시대로 평가를 받고 있다. 지배층의 경우에는 천주교 신앙의 성행에 대해 일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이를 끝까지 박멸해 나가고자 했다. 그들은 천주교 신앙이 성행하는 한 자신들이 주장하는 왕조 질서가 유지될 수는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은 평등을 주장하는 ‘위험한’ 상상으로서 신분의 불평등을 기본으로 한 양반 중심의 사회에 대한 사상적 도전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지배층은 천주교 사상에 대해 증오하고 이를 박멸하려 한 반면, 천주교 신도 대부분은 자신의 신앙에 새로운 희열을 느끼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며 사랑하고자 했다.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교회 그 자체에 대해 지극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교회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이 이다지도 새로운 가르침을 아끼고 사랑하고자 했던 것은 그 가르침이 구원(久遠)의 진리를 제시해 줄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불합리한 질서를 바로잡아 주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신분제 사회의 질곡에 처해 있던 당시의 사람들은 신분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평등의 가르침을 제시해 주는 새 종교인 천주교 신앙에 매혹되고 있었다. 당시 천주교에서 가르치던 평등의 개념은 종교적 의미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원리로도 해석되고 있었다. 그리고 신도들은 이러한 천주교의 가르침이 그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정녕 보장해 주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비참한 죽음의 두려움을 장엄한 순교의 자부심으로 바꿀 수 있었다. 평등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마음의 소리가 크게 울려 하찮은 인간들을 연대시키고, 이 인간의 연대는 우리 역사에서 평등 사회에의 새로운 장을 열려는 힘찬 움직임으로 바뀌어 갔다.

최양업 신부는 누구인가

 

최양업 신부는 조선 제2대의 사제이다. 그는 1821년 충청도 홍주 땅 다락골(일명 다래골 ; 누각<樓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최경환은 조상으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의 집안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그는 1836년 모방(Maubant) 신부로부터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김대건 등과 함께 마카오로 가서 신학을 배웠다.

 

그가 해외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는 중 국내에서는 1839년 기해 교난이 일어났다. 이 교난의 과정에서 최양업의 부모는 모두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의 부친은 1839년 9월 12일 서울의 포청 옥에서 숨을 거두었고, 모친 이성례도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참수되었다. 그리고 최양업의 남동생 네 명도 보살핌을 받지 못해 흩어졌다. 천주교 신앙은 이렇게 최양업의 가족들에게 모진 시련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최양업은 이 시련을 자기 수련의 계기로 삼았고, 이 가족적 비극을 복음 전파를 위한 열정으로 치유하고자 했다.

 

그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서품을 받고 그해 12월에 조선에 숨어들어 복음 선포를 위해 자신을 애오라지 봉헌하고자 했다. 그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일대의 내륙 지방 험한 곳들을 맡아 자신의 신명을 바쳐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1861년 6월 과로와 질병이 겹쳐 순직하게 되었는데, 순직하기 전 그는 하루에 80리 내지 l00리를 걸어야 했다.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래서 그가 한 달 동안 제대로 잠을 잔 것은 나흘 밤에 지나지 아니했다. 여기에 장티푸스에 걸리게 되자 그의 기력은 핍진하여 갔고 목숨마저 이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땀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했고, 또 다른 그리스도이자 자신의 형제인 조선인 신도들을 위해 귀한 목숨을 기꺼이 바쳤다.

 

 

최양업 신부의 저작물

 

조선 교회가 배출한 제2대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그 성덕뿐만 아니라 지성의 측면에 있어서도 탁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남긴 적지 아니한 저작물들에서는 그의 이러한 측면이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는 모두 19편의 라틴어 펀지를 그의 스승이었던 르그레주아(Legregeois) 신부와 리브와(Libois) 신부에게 보낸 바 있다. 이 편지들 가운데 한 편을 제외하고는 현재 모두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는 “순교자전”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성교요리문답”과 “천주성교공과”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그는 27펀의 천주 가사(天主歌辭)를 저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유려한 라틴어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 데 대하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라틴어 서한의 문장력이 뛰어났다는 사실보다는 그 서한에 담긴 사상의 가치일 것이다.

 

그는 1854년 11월에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낭 신학교에 파견한 조선인 신학생 세 명의 안부를 묻고 있다. 그리고 그 신학생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겸손의 의미를 올바로 가르쳐 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조선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평가할 줄 모르며, 인간의 지위와 가치를 세속의 영화와 부귀 공명에서 찾을 줄만 안다.”고 매섭게 비판한 바 있다. 그는 겸손의 덕이 인간의 존엄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첩경이 되는 것으로 파악했기에 새롭게 자라나는 미래 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해 겸손을 강조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1857년 9월 15일자의 서한에서 조선의 양반 중심 신분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양반의 특권이 인정되고 평민의 무조건적 복종이 강요되는 신분 제도 아래에서는 인간의 존엄성(dignitas humana)은 완전 무시되고 우애(caritas fraterna)가 보존될 수 없음을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의 편을 드셨으니 신분 제도는 그리스도의 정신에도 위배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의 신분 제도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고질적 제도는 아니며 이를 바로 잡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만일 관직에 사람을 채용할 때 출생 신분 등을 고려하지 말고 재능과 인격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양반 제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양업 신부의 꿈

 

또한 최양업 선부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천주 가사”를 통해서 우리는 굳은 신앙에의 열정과 신도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그리스도적 사도로서의 의무감 등이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상호간의 우애 그리고 겸손의 덕을 일체로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양반의 거드름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교회와 세상에 구현시키고자 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장상인 페레올 주교에게 양반 출신 신도들에 대한 편애를 중단해 주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아마도 신앙심과 평등을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간절한 꿈들은 자신의 겨레붙이들에게 자신의 나라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제시해 주려는 것이었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희생하였다. 박해가 계속되고, 신앙에의 이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이어지고 있던 그 통고(痛苦)의 바다에서도 그는 이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연할 수 있었고 현세의 난관 그 자체를 기쁨으로 이해해 나가고자 했다.

 

최양업 신부는 만 11년에 결친 사목 활동을 통해 사목자로서의 귀감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는 지성과 성덕을 겸비하고 자신의 겨레를 위해 진정으로 봉사해 나간 인물이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그는 초대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그늘에 가려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1840년대부터 18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출중한 인물은 바로 최양업 신부로 생각된다. 그는 당시 어떠한 선교사나 성직자 혹은 신도들보다도 탁월한 인물이었으며, 겸손과 자기 희생의 깊은 뜻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남긴 18편의 서한은 그의 사상뿐만 아니라 당시 우리 교회의 정신적 자산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자료가 된다. 이 서한집은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최양업 신부 서한집”이란 제목 아래 간행된 바 있다. 또한 최양업 신부의 영성 내지는 사상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서한집과 함께 그에 관한 전기적 자료들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1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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