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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노래에 담긴 믿음 - 천주가사(天主歌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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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12

[신앙 유산] 노래에 담긴 믿음 : 천주가사

 

 

머리글

 

무릇 예술은 사람들의 기쁨과 즐거움, 슬픔과 노여움의 감정을 정제하여 차가운 머리로 표현한 것이리라. 그러기에 희로 애락을 가진 사람들은 예술을 창조하며, 그 삶의 주요한 부분으로 예술을 아끼게 마련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기쁨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후 이를 실천해 왔고, 신앙의 기쁨을 예술로써 표현하기도 했다. 그들은 노랫가락을 통해, 그림과 조각을 통해, 그리고 여러 문학적 작품들을 통해 신앙의 기쁨을 표현하고자 했으며, 신앙에의 결의를 다져나가려 했다.

 

우리 선조들은 정녕 자신의 믿음을 기쁨으로 이해했으며, 이 기쁨을 숨기려 하지 아니 했다. 그들이 아무리 기쁨을 숨기려 했다한들 그들의 환한 얼굴, 가벼운 발걸음, 더덩실 춤을 추는 어깨는 자신들의 기쁨을 자연스레 드러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믿음의 말씀들을 노래로 표현하고, 믿음에의 기쁨을 노랫가락에 담고, 믿음에의 다짐을 노래로 드러내려 했다. 여기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짓기에 이르렀다.

 

 

“천주가사”란 무엇인가?

 

“천주가사”는 천주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신도들이 지은 3 · 4조 내지는 4 · 4조로 된 4음보(音步) 연속체의 가사를 말한다. 신도들은 자신의 믿음을 노래로 표현해 왔고 이 때문에 교회의 전례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은 것이다. 물론 모든 “천주가사”가 전례용 음악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천주가사”를 신앙 생활의 한 가닥으로 수용하여 이를 아껴 왔다. “천주가사”와 같은 노래가 초기 교회의 신도 생활에 밀접하게 개재되어 있었음을 우리는 다음의 글을 통해서 여실히 알 수 있다.

 

“1800년 3월에 이중배(李中培) 마르띠노와 원경도(元景道) 요한은 그들의 친구 정종호(鄭宗浩)의 집으로 부활 축일을 지내러 갔다. 본명을 알 수 없는 정종호는 모두 천주교인인 자기 집안에 그들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개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하여, 부활날에는 가족과 손님들이 이웃에 사는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길가에 모여, 모두 큰소리로 ‘알렐루야’와 ‘부활 삼종경’을 외고 나서, 바가지를 두드려 가며 기도문을 노래했다. 그런 다음에 가지고 간 고기와 술로 음식을 먹고 식사가 끝난 다음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이렇게 신심 행사와 우호적 잔치로 하룻날이 흐르고 있었다”(달레 지음, 최석우 등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458면).

 

이 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박해 시대의 신도들은 신심 행사에 있어서 노래를 함께 불러왔다. 그들이 불렀던 노래는 그레고리오 성가나 서양 교회의 음악이 아니었다. 그 노래는 그들이 배냇짓하던 어린 시절부터 즐겨 들어왔던 우리의 가락이었다.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는 하프시코드나 오르간과 같은 건반 악기가 굳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다. 뉘 집 부엌엔들 없을 수 없는 바가지가 리듬 악기로 등장했다 해도 가락을 이는 데에 어색함이 없던 우리의 삶과 밀착된 우리의 노래였다.

 

순교자 이중배와 원경도 등이 불렀던 그 노래는 아마도 “천주가사”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리라. 물론 처음으로 지어진 천주가사로는 1779년 정약전(丁若銓) 등이 지었다는 “십계명가”(十誡命歌)와 이벽(李檗)의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가 지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가사가 수록된 문헌에 대한 좀더 철저한 비판이 요구되므로 위의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만은 없다. 물론 1902년 목포의 드예(Deshayes) 신부가 흑산도 사람들을 선교하던 과정에서 그 곳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정약전이 “성가의 가사”를 지었다는 사실을 보고한 바 있다. 이 보고는 정약전과 “천주가사”와의 관계를 제시해 주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1840년대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종류의 “천주가사”가 있었는지를 아직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천주가사”는 185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되었고 보급되어 갔다. 이 시기 “천주가사”의 제작에는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공이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우리 교회사에서 우뚝한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사향가”(思鄕歌)를 비롯한 많은 “천주가사”를 남겼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박해 시대의 천주가사는 대략 28종으로 추산되고 있다.

 

박해시대 신도들 사이에 널리 불리던 “천주가사”는 개항기의 교회에서도 계속 영송(詠誦)되고 있었다. 개항기의 “천주가사”로 현재 수집 정리되어 있는 것은 대략 45편 정도이다. 또한 개항기의 교회 신문이었던 “경향신문”에도 40여 편의 가사가 수록되어 있고 식민지 시대 초기까지도 “천주가사”는 계속 제작되어 갔다.

 

 

노래에 담긴 믿음

 

우리 교회는 선조들이 남긴 신앙 유산으로 적지 아니한 “천주가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 “천주가사” 가운데에서 박해 시대의 가사들을 분석해 보면,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간직했던 믿음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된다.

 

박해 시대에 지어진 “천주가사”에서는 강렬한 신앙 고백을 우선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신도들은 “천주가사”를 통해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존재를 설명하고자 했다.

 

한집안에 가장하나 주장하여 으뜸이요

한고을에 관원하나 주장되어 으뜸이요

한도내에 감사하나 주장되어 으뜸이요

한나라에 임군하나 주장되어 으뜸이요

여러나라 주장되어 천자하나 으뜸이요

만물조성 뉘가한고 천주친히 지었고나

천주두자 별말인가 우리시조 이름이라

원시조를 찾았고나 성교인이 찾았고나

머리없는 꼬리있나 우리머리 천주시라

부모없는 사람있나 우리공친 천주시라

임금없는 나라있나 統天下之 大君천주

(‘보세만민가’중에서)

 

그들은 유일신 하느님 천주를 이렇게 표현하며 대군 대부(大君大父)인 천주께 대해 충효를 다짐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충신 효자들은 고귀한 영혼을 가진 자랑스러운 존재이며, 천국에의 영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으로 굳게 믿었다.

 

또한 그들은 “천주가사”를 통해 호교적 자세가 신도들의 몸에 스며들도록 했으며, 교회의 윤리적 가르침을 항상 기억하게 하고자 했다. 또한 그들은 천주에 대한 사랑으로 위주 치명(寫主致命)의 길을 걷도록 천주가사를 통해 항상 격려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은 “사랑사랑 천주사랑 사랑말씀 다못하나 진심견망 열애하면 위주치명 쉬우리라.”고 ‘애덕가’를 통하여 노래했던 것이다.

 

박해 시대의 천주가사는 신도들에게 새로운 세계관을 일깨워 주고 있었으며, 문화에 대한 개방적 생각을 역설해 나갔다. 즉, ‘사향가’에서는 천주교를 외국의 종교라 배척하던 사람들을 향해 ‘한문(漢文)이 외국 문자가 아닌가’라고 반문하며 노장(老莊) 철학이나 불교 · 도교도 외국의 것이었지만 우리 나라에서 수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신도들은 “원근지방 의론말고 옳으면은 쫓느니라.”고 말함으로써 문화에 대한 개방성을 드러내 주었던 것이다.

 

한편, 신도들은 “천주가사”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드러내었다.

 

전후좌우 모든교우 일심삼아 화목하세

세속에 없던부모 여기오니 새로있고

세속에 없던형제 여기오니 무수하다

세속에 적던친구 여기오니 허다하다

세속에 드문물건 여기오니 무진하다

가사농업 구처후에 농업인들 없을소냐

(‘피악 수선가’ 중에서)

 

이 가사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박해 시대의 신도들은 신분을 본위로 했던 당신의 사회를 거부하고 믿음을 매개로 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해 나갔으며, “천주가사”를 통해 이 공동체 의식을 다져갔던 것이다. 이렇듯 “천주가사”는 박해 시대와 개항기 신도들의 믿음을 표출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 노래에 담긴 믿음을 통해 그들이 누렸던 믿음의 삶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마무리

 

“천주가사”는 우리 선앙의 선조들이 간직했던 마음의 진실성과 행동의 성실성을 보증해 주는 노래였다. “천주가사”를 구송(口誦)하며 농삿일을 하거나 길쌈하던 우리네 선조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믿음과 삶과 일을 일치시켜 나가고 있었던 당시의 정황을 올바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지난날 우리 속담에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귀가 싫어한다.”는 말이 있어 왔다. 그러나 믿음과 삶과 일을 일치시켰던 “천주가사”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날 리가 없는 우리 마음의 노래인 것이다.

 

[경향잡지, 1991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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