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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이땅의 어린 영혼들 - 영해회 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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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10

[신앙 유산] 이땅의 어린 영혼들 : 영해회 규식

 

 

들어가는 말

 

어린이란 무엇인가? “어린이는 미래이며 회귀(回歸)인 것이다. 아이는 태(胎)이며 바다이다”(R.M. 릴케). 어린이는 우리 인류의 미래이며, 인류의 과거가 응축되어 현재에로 나타난 고귀한 존재이다. 어린이는 어떠한 형태의 그릇으로라도 만들어질 수 있는 태토(胎土)와도 같으며, 모든 가능성을 다 품어 들이는 가없는 바다와도 같은 존재이다. 어린이에 대한 이 해석은 문학적 사색의 결과로 가능한 것이며, 철학적 숙고를 통해 다듬어 진 정의이리라.

 

어린이란 누구인가? 어린이는 단순하게 말하여 우리의 피붙이다. 우리 몸의 일부요 우리 마음의 한 조각이 바로 우리의 어린이이다. 자식을 낳은 자신의 어린 자식에게 마음이 부모가 끌리고, 남의 자식이라도 어려움에 있을 때 측은해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상으로 가지는 마음새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선조들도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했으며, 돌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가 피붙이 이상의 존재이며,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고귀한 인간임을 박해 시대의 우리 교회는 강조해 주었다. 교회는 어린이도 떳떳한 인격체이며, 따라서 어린이의 영혼도 존중받아야 마땅함을 신도들에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여기에서 박해 시대 때부터 신도들은 인간애를 기본으로 하여 자신의 자식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어린이도 보호하고자 했다. 그리고 교회는 죽을 위험에 방치되어 있는 어린이를 보호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땅의 어린이들

 

19세기 우리 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이땅의 어머니들이 자신의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고,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자식을 보호하려 한 노력에 탄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날 우리의 역사는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민중들이 당해야 했던 고통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기근이나 전염병이 돌 때에는 무의무탁한 고아들이 다수 발생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조선 왕조 정부에서도 무의무탁 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노력을 전개하기도 했다. 정부는 고아들의 수양(收養)을 장려했고, 수양된 어린이들을 노비로 삼아도 좋다고 했다. 노비가 된다 하더라도 어린이의 생명을 구해야 하겠고, 이를 위해서는 수양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혜택을 보장해 주어야 하리라 생각했기에 수양된 고아들을 노비로 삼을 것을 허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18세기 후반기 정부에서는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반포하여 보호자가 없는 젖먹이나 어린 고아들을 특별히 돌보고자 했다.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이와 같이 지속되는 가운데 18세기 후반기 천주교 신앙이 전래되었다. 당시의 천주교 신앙에서는 어린이의 인격적 존재를 강조했었고 이 때문에 박해 시대의 천주교 신도들은 어린이에 대한 관심의 질을 종전보다 한 단계 더 높여 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남의 어린이를 돌보되 노비로 삼으려 하지 않았으며, 어른과 마찬가지로 고귀한 영혼을 가진 어린 생명을 가꾸고자 했다. 신도들에게 수양된 어린이는 더 이상 노비가 아니었기에 신도들은 그 어린이들에게 예의 범절과 문자와 생업 교육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어린이에 대한 신도들의 이러한 관념이 결집되어 나타난 것이 “영해회 규식”이었다.

 

 

영해회의 창설

 

1854년이었다. 당시 조선에 나와서 선교하고 있던 메스트르 신부는 영해회의 창설을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 보고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죽어 가는 어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는 이 어린 영혼에게 대세를 줄 세 사람을 고용했다. 그리고 고아들을 위한 기관을 세우고자 했으나, 박해로 말미암아 이를 실천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어린이 구제 사업을 박해가 끝날 때까지 미루어 둘 수만은 없었다. 이에 그는 고아들을 모아 신도 가정에 위탁 양육을 하는 방안을 창안해 내었다.

 

그가 이 사업을 추진하며 모델로 삼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조국 프랑스 교회에서 시행하던 고아 구제 사업이었다. 그때 프랑스에서는 산업 혁명의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빈곤에 놓여 있었고, 이 빈곤 때문에 버려진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프랑스 교회는 이 어린이들을 위해 영해회(La Sainte-Enfance)를 창설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교회의 영해회에서는 자국의 어린이뿐만 아니라 전교 지역의 어린이 구제 사업도 부분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에도 영해회 사업이 시작되었다. 메스트르 신부는 어린이를 아끼고 존중하던 조선 교회의 관행을 주목했다. 그리고 이 사업에 대한 프랑스 교회와 조선 신도들로부터의 지원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고 곧 ‘영해회’ 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메스트르 신부는 영해회의 창설을 본국에 보고하는 한편, 조선인 신도들에게도 “성교 영해회”(聖敎?孩會)를 조직하게 되었다. 성교 영해회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성행하고 있는 각종 후원회의 첫 번째 사례로 지적할 수 있다. 이 “성교 영해회”에서는 “외인 아해 세 받음과, 의탁 없는 아해 기르기를 위하여 기구와 애긍으로 도움과, 회에 든 영해 처음 성체 타당히 받기를 위함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회원이 된 신도들은 어린이를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 했고, 성 요셉 축일을 비롯한 몇몇 축일에 영해회를 위해 기도하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또한 회원들에게 해마다 세밑에 한번씩 영해[어린이]를 위한 헌금을 하도록 규정했다. 이 규정에 따라 “성교 영해회”에 가입한 신도들은 교회에 영해전(?孩錢)을 납부했고, 신도들의 이 정성은 박해 시대에 위탁 양육되던 어린이들을 위한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영해회 규식’의 내용

 

‘영해회 규식’은 영해회가 세워진 직후부터 마련되었다. 현존하는 ‘영해회 규식’ 가운데 가장 오래 전에 작성된 것은 1857년의 사본을 들 수 있다. ‘영해회 규식’은 모두 18조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아동들을 보호하는 데에 관한 구체적 사항들로 되어 있다. 즉, 고아를 위탁 양육할 때에는 한 사람이 한 아동씩만을 맡아야 하고 젖먹이인 경우 젖어미가 없는 가정에서는 수양할 수 없으며, 아동들에게는 경문과 문답과 예의 범절을 자신의 자식과 마찬가지로 가르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수양된 아동들이 성장한 이후 남자인 경우에는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고 일을 시켜야 하며, 여자는 20세가 되기 전에 결혼시켜야 함을 규정했다. 또한 이 ‘영해회 규식’에는 영해를 기르는 데에 소요되는 비용을 보조하는 데에 대한 규정도 자세히 밝혀 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진 ‘영해회 규식’은 아동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자의 의무를 강조한 아동 본위의 규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마무리

 

천주교 신앙이 이땅의 사람들에게 일깨워 준 고귀한 정신으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들 수 있다. 그러기에 초기 교회의 순교자들은 천주교 신앙이 ‘충효(忠孝) 뿐만 아니라 자애(慈愛)를 간직하고 있는 훌륭한 믿음’임을 떳떳이 주장했다. 그 자애의 정신은 메마른 우리 사회에 단비를 뿌리려는 결의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신도들은 자애의 정신을 ‘영해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냈다.

 

영해회는 박해 시대 교회가 이땅의 어린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뚜렷한 사례로 주목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고귀한 인간애의 발현이었으며, 겨레에 대한 연대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영해회 사업을 통해 당시의 교회는 박애 정신을 실천하고 있었고, 이 박애 정신의 실천은 오늘의 교회에도 그침 없이 요구되는 것이다.

 

영해회 사업의 연장으로 1880년에 한국 교회는 천주교 고아원을 세울 수 있었다. 서울에 세워진 이 고아원은 우리 나라 최초의 아동 복지 기관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에게는 ‘최초’라는 과거의 영광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최초의 실험적 정신을 오늘의 우리 교회는 우리 사회와 이웃을 위해 어떻게 계속하여 실천하고 있는지를 항상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면 오늘날 교회의 뿌리요 아버지는 박해 시대 내지 개항기의 교회인 것이다. 당시의 교회가 겨레와 하느님을 위해 봉사했듯이 오늘의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해묵은 ‘영해회 규식’을 다시 들추어보는 참다운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1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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