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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우리말을 하시는 하느님 - 성경직해(聖經直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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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05

[신앙 유산] 우리말을 하시는 하느님 : 성경직해

 

 

머리글

 

하느님의 국적은 어느 나라일까? 이는 분명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모든 사람을 골고루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시시하게 특정 국가의 국적을 취득하셨을 리는 없다. 시공을 초월한 존재, 우주적 존재에게 국적을 묻는다는 것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국어는 무엇일까? 사람에게 말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분이 그분이신데 그 지혜의 원천인 존재에게 ‘당신의 모국어가 무엇이냐?’고 묻는 일은 난센스일 뿐이다. 사람의 깊은 심중까지 헤아리시는 하느님은 인간적인 어학 실력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가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인간에게 말로써 직접 전하지는 않으셨단 말인가? 하느님은 성경을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했다. 성경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세 가지의 질문에 대해 그렇게들 대답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말로 옮겨진 것은 하느님이 우리말을 하시게 된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파악될 수 있다. 우리의 교회사에서 이 ‘중요한 사건’은 “성경직해”의 번역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성경직해”는 우리말을 하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자료이다. 그것은 새 생명에로의 초대를 보장하는 우리 신앙의 중요한 유산이다.

 

 

보유(補儒)와 반류(反儒)의 논리

 

성경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 신앙은 성리학적(性理學的) 유교의 전통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경이 같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교와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고 있다.

 

물론 유학의 경우도 인간의 떳떳한 도리를 논하고 있으므로, 이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의 실천 윤리와 기맥을 통하고 있다. 바로 이 측면에 근거하여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신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보유론(補儒論)을 제시했다. 이 보유론이란 그리스도교 신앙이 유교의 전통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유교 신앙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완성시켜 준다는 논리였다. 리치 신부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와 같은 철학적 교리서를 저술했다. 그리고 이러한 책들은 조선의 지식인에게도 큰 영향을 끼쳐 주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한국 교회의 창설 초기에 많은 유교적 지식인 신도들이 등장했고 우리 나름대로의 보유론이 전개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초창기 교회사를 주의 깊게 검토해 보면 또 다른 많은 신도들이 보유론이 아닌 반유론(反儒論)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고 있었다. 옥천희(玉千禧)를 비롯한 여러 신도들은 천주교와 유교가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입교하기도 했다. 그들은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 신앙이 볼평등한 신분제적 질서를 옹호하는 성리학과 같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유교적 질서와 가르침을 거부하는 신도들의 반유론적(反儒論的) 입장 때문에 당시의 정부 당국자들도 조선의 천주교회를 반유학(反儒學)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탄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천주교 신앙을 반유론의 입장에서 수용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직해”나 “성찰기략”, “교리문답” 등과 같은 전례서, 신심서, 교리서들을 즐겨 읽었다. 박해 시대의 신도들이 즐겨 읽었던 책들은 이와 같이 한글로 저술, 간행된 책자들이었다. 그들이 읽던 책들은 교회 초창기 교회 창설 작업에 깊숙이 간여했던 유교적 지식인들이 즐겨 읽었던 철학적 교리서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한국 교회사 초창기에 있어서 발견되는 반유교적 경향은 아마도 “성경직해” 등과 같이 유교 철학의 유입 가능성을 애초부터 부인하고 있던 책자의 학습을 통해서 양성되었을 것이다. 성경과 “사서오경”이 다른 것이듯이, 성경의 이해를 통한 독자적 사고 방법의 출현과 “사서오경”을 배경으로 해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려는 사고 방법의 존재는 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성경직해”는 어떤 책인가

 

“성경직해”는 주일과 주요 축일에 봉독되는 복음을 발췌하여 수록한 책자로서, 일종의 발췌본 복음서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해당 축일의 성경이 제시되고 있으며. 이 성경 구절에 대한 자세한 주석과 함께 묵상 자료가 제시되어 있다.

 

한글본 “성경직해”는 원래 한문본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성경광익”(聖經廣益)을 하나로 편찬해서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한 책자이다. 이 책이 한글로 간행되어 있었으므로 박해 시대의 많은 신도들은 이 책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공소 예절 때나 영적 독서 때에 이 책의 활용도는 매우 높았다.

 

이 책의 저본 가운데 하나인 한문본 “성경직해”는 1636년 임마누엘 디아즈(Emmanuel Diaz) 신부에 의해 북경에서 14권으로 간행된 책자였다. 디아즈 신부는 주일과 축일의 복음 성서를 한문으로 번역하고, 그 번역된 구절마다 자세한 주석을 달아 주었다. 그리고 ‘잠’(箴)이란 항목을 설정하여 그날의 성경에 대한 묵상을 유도하고 있다.

 

한편, 한문본 “성경광익”은 1740년 북경에서 2권 2책으로 간행된 책자이다. 이 책이 한문본 “성경직해”와 다른 점은 성경 본문에 대한 주해와 ‘잠’이 없는 대신에, 성경 본문에 있어서 ‘의행지덕’(宜行之德) 즉 ‘마땅히 행해야 할 덕목’과 ‘당무지구’(當務之求) 즉 ‘당연히 힘써야 할 기도’가 수록되어 있다.

 

한글본 “성경직해”는 이상의 두 자료 가운데, 한문본 “성경직해”에서는 성경 본문 및 ‘주해’와 ‘잠’을 택하여 번역했다. 그리고 한문본 “성경광익”에서는 ‘의행지덕’과 ‘당무지구’를 번역해서 수록했다. 이 때문에 한글본 “성경직해”가 한때 “성경광익직해”로 불리기도 했던 것이다.

 

한글본 “성경직해”에 수록된 가장 중요한 것은 4복음서가 발췌된 부분이다. 이 한글본 “성경직해”에는 4복음서 전체 구절 3,709절 가운데 30.68%에 해당되는 1,138절이 번역 수록되어 있다. 즉. 박해 시대의 와중에서도 한국 교회는 자신의 힘으로 4복음서의 1/3정도를 번역해 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글본 “성경직해”의 ‘주석’이나 ‘잠’ 또는 ‘의행지덕’, ‘당무지구’ 등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들은 “사서오경”의 가르침과는 뚜렷이 구별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들이었다. 여기에서 “성경직해”가 당시 교회의 반유교론의 전개와 깊은 관계가 있음을 확인해 줄 수도 있다.

 

 

번역 · 간행의 의미

 

“성경직해”의 한글 번역작업은 1784년 교회 창설 직후에 착수되었다. 이 책의 번역자 중 하나로는 최창현(崔昌顯)을 들 수 있다. 그 이후 이 책은 1892년에 이르러서야 활판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모두 9책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

 

한글본 “성경직해”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를 한민족에게 전해 준 책자였다. “성경직해”를 통해 박해 시대 신도들은 하느님 말씀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순교에까지 이르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으리라. 또한 그것은 박해 시대 신도들의 전례와 신심 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들에게 성서적 영성의 뿌리를 내려 준 책자였다.

 

한글본 “성경직해”는 성리학적 예교 질서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사상계에 대하여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해 주었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가르침을 가지고 이땅에 새로운 사회와 문화를 건설해 보려는 의욕들이 촉발되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한글본 “성경직해”는 한국 사상사, 한국 사회 운동사 등의 균형 있는 인식을 위해서도 재검토되어야 할 자료인 것이다.

 

[경향잡지, 1990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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