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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밝혀 주는 등불 - 한불자전(韓佛字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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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2 ㅣ No.351

[신앙 유산]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밝혀 주는 등불 : 한불자전(韓佛字典)

 

 

머리글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뜻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말이 필요하다. 어떤 이가 특정한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말로 상징되는 문화에 속하고 있음을 뜻하며 그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기본 자격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 사상을 다른 사회에 전파시키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도 조선말을 이해하고 구사해야만이 그들이 그토록 열정적으로 전하고자 했던 복음을 조선인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조선의 말과 말본을 연구해야 했고, 그 말을 모아 놓은 사전을 편찬하게 되었다. 그들이 조선말을 한다는 것은 조선 교회의 일원이 되는 데에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혹심한 박해를 무릅쓰고서도 말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편찬에 전력했고, 문법서를 간행했다. 박해 시대 선교사들의 이와 같은 노력이 결집되어 “한불자전”과 같은 훌륭한 사전이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사전의 역사

 

사전은 단어를 모아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고 그것에 대해 해설한 책을 말한다. 사전은 일반 사전과 특수 사전으로 나눈다. 단어 설명에 제일차적 목적을 두고 있는 일반 사전들은 흔히 사전(辭典)이란 글자로 표기된다. 반면에 특수 전문 분야의 단어 해설을 시도하는 경우에는 사전(事典)이라는 다른 한자로 기록한다.

 

이 사전들은 사람의 지혜가 발달되어 감에 따라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서양의 경우 현재 알려진 최초의 사전은 1440년에 간행된 “영라사전”(英羅辭典)을 들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와서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백과 사전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 왕조 초기인 15세기 때에 “동국정운”(東國正韻)과 같은 사서(辭書)가 간행되었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백과 사전 격인 ‘유서’(類書)들의 간행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들은 근대적 사전(辭典 · 事典)의 편찬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근대적 의미의 사전 편찬이 시도된 것은 19세기 중엽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한글을 기초로 하여 단어를 배열하고 주해하는 진정한 의미의 사전이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1874년에 간행된 푸칠로의 “로한사전”(露韓辭典)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사전은 매우 간이한 단어집에 불과했다.

 

 

선교사들의 사전 편찬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숨어들어 왔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조선말을 배워야 했다.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 가운데 일부는 이미 중국에서 선교한 경력이 있고, 중국말을 배웠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1860년대를 전후하여 입국한 선교사들 대부분은 자신의 모국어인 프랑스말과는 생판 다른 조선말을 직접 배워야 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말을 익히는 데에 요구되는 사전과 문법서를 마련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조선어를 학습하는 데 가장 좋은 선생은 조선의 꼬마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입국 초기에 자신의 은신처에서 집 주인의 어린 아이들에게서 조선말을 우선 익히기 시작했다. 어린이는 그들의 스승이었지만,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말에 대한 체계적 학습을 지향했다. 또한 그들은 라틴어를 기준으로 하고있던 가톨릭 신학의 내용들을 조선어로 풀어서 전교해야 했고, 조선인 신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라틴어 사전이 필요했다. 여기에서 선교사들은 “한불사전”이나 “한라사전”(韓羅辭典)의 편찬을 시도하게 되었다.

 

한국어와 관련된 사전 편찬 작업은 1845년에 조선에 입국한 다블뤼 신부에 의해서 착수되었다. 그리고 이 일은 1856년 쁘띠니콜라 신부와 푸르티에 신부가 입국한 이후 활기를 더해 갔다. 다블뤼 신부는 자신이 이미 연마한 바 있었던 한자 어휘들을 기초로 하여 “중한불사전”(中韓佛辭典)의 형식으로 이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1851년 “나한사전”(羅韓辭典)을 완성했다. 한편, 푸르티에도 “나한중사전”(羅韓中辭典)을 편찬하고 있었고, 쁘띠니콜라도 “나한사전”을 편찬해서 3만 단어 이상의 라틴어와 10만 단어에 가까운 한국어를 담은 사전이 1864년에 완성되었다. 쁘띠니콜라의 “나한사전”은 다블뤼의 그것보다 훨씬 풍부한 어휘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의 결과들은 박해의 과정에서 흩어지거나 소진되어 버렸다.

 

한편 1860년대에 이르러서 프랑스 선교사들은 “불한사전”(Dictionnaire Francais-Coreen)을 편찬하기 시작했다. 1869년 중국의 만주에서 필사된 이 사전이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남아 있다. 이 사전은 모두 9592개의 표제어가 수록되어 있고, 프랑스어 단어에 대한 한국어 어휘가 제시되어 있다. 이러한 노력과 병행하여 한국어와 프랑스어 사전을 편찬하려는 시도가 1866년 병인박해 이후 다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한불사전”(Dictionnaire Coreen-Francais)이라는 제명으로 되어 있는 필사본이 1878년 4월 8일에 완료되었다. 이 필사본의 표제어는 붓으로 쓰여 있고, 프랑스어 단어는 잉크로 쓰여져 있다. 사전 편찬을 위한 이러한 노력들이 기초가 되어 1880년에는 “한불자전”(韓佛字典)이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이 사전의 집필과 간행을 위해 가장 애쓴 사람은 리델 주교였다.

 

 

“한불자전”의 특성

 

“한불자전”의 편찬 작업이 완성되어 갈 무렵 조선교구의 선교사로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가 새롭게 임명되었다. 리델 주교는 사전의 원고를 1876년경 코스트 신부에게 넘겨주며 그 간행을 당부했다. 코스트 신부는 이 원고를 갖고 일본에 건너가 1877년 요코하마(橫濱)에서 인쇄에 들어갔다. 이 사전의 제목은 “한불자전”으로 정해졌다. 이 제목에서는 한(韓)이라는 단어가 특징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당시 우리 나라를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는 조선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불자전”(朝佛字典)이란 용어 대신에 이 책을 “한불자전”으로 이름지었다. ‘한’이란 단어는 매우 역사적으로 유래가 오래된 것이었다. 이 아름답고 유서 깊은 말을 발굴해 낸 데에서만 보더라도 그들에게는 사전을 편찬할 자격과 능력이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불자전”은 4-6배판으로 694쪽에 이르고 있으며, 약 11만 단어가 수록되었다. 이 사전은 서설(序說)과 본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설에서는 각종 범례(凡例)와 한글을 프랑스 문자로 옮겨 적는 데에 관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615쪽에 이르는 본문에서는 표제어와 그에 대한 사전적 설명들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어 표제어 배열은 일단 홑소리[母音]와 닿소리[子音]의 순서로 나누었고, 홑소리와 닿소리를 다시 서양의 로마자 알파벳 순서에 따라 배열했다. 그리고 한글 단어의 옆에 알파벳으로 발음을 표가하고 소리의 장단을 나타내 주었다. 또한 표제어가 한자어인 경우에는 한자 표기를 아울러 써주었다. 이 본문에 이어서 부록편이 제시되어 있다. 이 부분은 일종의 ‘말본 사전’과 같은 것으로서 ‘하다’와 ‘이다’의 활용법을 밝혀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부록의 일부분으로 우리 나라의 땅 이름들이 사전식으로 정리되었다.

 

“한불자전”에 채록되어 있는 한국어 단어들은 매우 방대한 양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국어 단어를 채록할 때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단어를 선택하기를 거부했다. 즉 그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주관적 호오(好惡)의 판단을 버리고 모든 단어를 수집하여 해설하고자 했다. “한불자전”의 편찬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것이었다. 사전 편찬에 있어서 모든 단어를 과학적 역사적으로 수집해야 한다는 역사주의적 사전 편찬 방법을 직접 학습한 바 있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그들은 이 방법을 실천하고 있었다.

 

 

맺음말

 

“한불자전”의 편찬은 일대 사건이었다. 이는 우리말과 관련된 최초의 본격적 사전으로서 그 뒤 여러 사전 편찬가들의 작업에 토대를 닦아 준 책이었다. 예를 들면 19세기의 마지막 10년 간에 언더우드, 스코트, 게일 등이 전개한 한국어와 영어사전 등의 편찬에 있어서 “한불자전”은 밑바탕을 이루어 주었다. 그리고 한국인이 한국어 사전을 간행하던 1930년대에도 “한불자전”은 사전 편찬의 기본틀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한불자전”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컸다.

 

한편 “한불자전”은 이땅에 도입된 천주교가 토착화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맡았다. 서유럽의 신학 사상과 철학 체계가 우리말로 옮겨져 표현될 수 있는 확실한 단초를 이 사전은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불자전”의 간행은 한국 그리스도교 정신사를 밝히는 데에도 주목해야 할 책자이다. 우리는 “한불자전”에서 드러나고 있는 특징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그 편찬의 정신까지도 거듭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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