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신앙 유산: 한 민중 영웅의 믿음살이 - 정산일기(定山日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2 ㅣ No.350

[신앙 유산] 한 ‘민중 영웅’의 믿음살이 : 정산일기

 

 

머리말

 

한국 천주교회사가 시작되던 초창기의 역사에서는 서로 대립적인 두 가지 신분층이 병존하고 있다. 그 하나는 당대 최고 지식인 집단이었는데, 이벽(李檗)이나 정약전(鄭若銓) 형제 등 초창기 교회를 이끌었던 이들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한 사람이었다. 반면, 당시의 교회에는 무지렁이 농투성이로 얄잡아 보이던 신도들도 큰 무리를 이루어 모여들고 있었다. 이들은 설립 당시의 교회를 지도하던 양반 지식층과는 분명 다른 존재였다. 그들 가운데는 한자(漢字)로 된 변변한 이름마저도 없던 사람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1801년 이전 천안 지방의 지도적 신도였던 최구두쇠(崔巨斗金)와 같은 이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름 석 자는 변변했다 하더라도 조선 왕조의 신분 체계 안에서 바닥층을 이루고 있던 ‘민중’인 신도들도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 인물로 이도기(李道起, 1743~1798년)를 들 수 있다. 그는 18세기 후반을 살았던 지극히 평범한 우리 조선의 민중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 신앙을 통해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존귀한 인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알게 된 이 새로운 가르침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생명과 세상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18세기 후반기 이 사회에 우뚝 일어선 ‘민중 영웅’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사람의 일대기를 기록하여 전해 주는 책자가 다행히도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름하여 바로 “정산일기”이다. 이 “정산일기”를 통해 우리는 새롭게 각성된 민중 ‘이도기’를 만나게 된다.

 

 

이도기의 영세

 

이도기는 1743년 충청도 청양(靑陽)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민(常民)이었음이 거의 틀림없다. 천주교에 입교하기 전까지는 향리인 청양에서 살면서 어느 정도 재산도 모을 수 있었다. 그가 언제 천주교에 입교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그가 박해로 청양을 떠나 이웃 고을인 정산(定山)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은 그의 영세 연대를 추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충청도 지방에 박해가 본격적으로 일어난 때는 1791년 진산 사건(珍山事件) 이후였다.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조상 제사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다음, 천주교 박해의 여파는 충청도 전역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충청도에는 많은 신도들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박해가 일어났다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 박해의 와중에서 1791년말 ‘내포(內浦)의 사도(使徒)’ 이존창(李存昌)은 자신이 살던 향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792년말 원(元)시장(베드로)이 홍주(洪州)에서 순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도기는 1791년 이전 영세 입교하여 청양에서 살다가 신해박해로 더 이상 향리에서 머물지 못하고 피신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박해와 피신 그리고 순교

 

이도기는 영세한 이후 천주교의 가르침을 이웃에 전하는 데에 힘썼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외교인을 입교시키는 데에 썼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우리는 그의 전교열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리고 1801년의 박해 때 공주, 홍주, 보령, 은진, 청양 출신의 신도들 가운데 이도기로부터 천주교를 배웠다는 사람들이 있음을 볼 때 그의 전교 노력에는 적지 않은 성과도 따랐다고 생각된다. 그는 1791년 박해 때 정산으로 피신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정산은 청양의 이웃 고을이었다. 청양에서 동쪽으로 시오릿길을 가서 칠갑산(七甲山)을 넘으면 정산 땅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그곳 옹기점에 자리를 잡고 조그마한 장사를 하면서 다시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797년 충청감사 한용화(韓用和)는 충청도 각 고을의 수령에게 천주교 탄압을 명했다. 그 여파로 이도기는 1797년 6월 8일 정산에 있던 그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정산 현감 최윤전의 신문을 받았지만 천주교의 가르침을 끝까지 옹호하며 증거했다. 그는 관원들로부터 배척받았을 뿐만 아니라 장터에 끌려 나가 조리돌림을 당하며 그곳에 모인 사람들로부터도 무수한 모욕을 당했다.

 

그는 배교하면 풍헌(風憲) 자리를 주겠다는 현감의 회유도 물리쳤다. ‘풍헌’이란 상층 양인들이 맡아 보던 지방 행정의 말단 책임자를 말한다. 상당히 수지맞는 자리였던 그것을 거부하고 옥고와 죽음을 마다지 않았다. 그를 감시하던 옥졸들도 그를 동정해 도망가기를 권했지만 그는 이마저도 거부했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그 아내는 장부를 위해 없는 살림 가운데에서도 옥바라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야 될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 이 옥바라지도 거부했던 사려 깊은 남편이요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갖은 고문 끝에 1798년 6월 12일 정산의 옥에서 타살당해 순교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56세였으며, 체포된 이후 1년이 조금 지나서였다. 이렇게 세상을 떠난 그를 우리가 더욱 높일 수 있는 까닭은 그가 남긴 신앙의 증언들 때문이다.

 

 

이도기의 믿음

 

이도기는 영세 이후 순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살림살이보다 믿음살이를 더 소중히 여겼던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투척해 가며, 새로운 믿음의 전파를 위해 애썼다. 생활은 가난에 찌들었지만 그는 믿음살이에 더욱 신명을 바쳤다. 이러한 그의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생각들은 그가 받은 신문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하느님을 “하늘과 땅의 참 임금이시고 만물을 주재하고 보존하는 분이시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 충성의 참 근원임”을 역설했다. 그는 이 하느님께 충성과 효도의 마음을 갖고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느님이 세상의 임금보다 월등히 높으므로 사람들은 당연히 임금의 명령보다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함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충신이 임금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고, 효자가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듯이, 하느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영혼의 아버지요 임금인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것은 “자기 영혼에 영원한 영광을 보증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하느님이 만물의 유일한 주인이시며,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분이심을 말했다. 이러한 그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우리의 전통적 문화인 충효관에 의한 인식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삼위일체적 하느님관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구속 공로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하느님을 받드는 데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당시 조선의 종교 가운데 유교는 오직 선비들의 몫이고, 불교는 스님들이나 이해하는 종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주교는 이들과는 달리 모든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선언하면서 천주교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그는 조선 후기를 살았던 민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임을 자각했고, 하느님을 기준으로 세상의 임금이나 양반 귀족들이 행사하던 권위의 헛됨을 인식할 수 있었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한 민중에게 위대한 자기 발전과 각성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맺음말

 

영웅이란 무엇인가? 영웅은 시대를 앞서 변화를 인식하고, 사회의 변동을 이끌어 내는 존재를 말한다. 그 영웅은 무리 가운데 뛰어난 특정한 개인을 가리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18세기 후반기 우리 나라의 역사를 보면 낡은 사상을 거부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실천하며, 이로써 우리 사회와 문화의 역사적 흐름을 바꾸어 놓으려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역사의 진정한 주인이었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민중 영웅’으로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도기는 자신의 믿음을 실천하여 세상의 흐름을 바꾸어 보려 했던 ‘민중 영웅’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중국을 통해 전래된 그리스도교 신앙과 우리의 전통 문화를 합치시켜 하느님을 섬겼던 창조적 신앙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의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꾸어 보려 했던 실천적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믿음살이는 그가 죽은 직후부터 자그만한 책자로 정리되어 그의 모범을 따르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었다. 그 책의 제목은 그가 피신해 살던 곳의 땅 이름을 따서 “정산일기”라 하게 되었다. 이 책은 1862년 다블뤼(Daveluy, 1818~1866년) 신부가 조선 천주교회사의 기본 자료를 수집할 때 입수되었다. 달레는 ‘조선 전기(傳記)’라는 말로 이 책자의 존재를 확인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자는 달레가 지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이도기의 순교 사실을 서술할 때 기본 사료로 이용되었다. 이 자그만한 책자(18.8x12.3cm, 27장)는 1882년에 이르러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블랑(Blanc, 1844~1890년)의 손에 들어왔고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4년 9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470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