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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새 생명이 탄생하는 신비로움 - 구베아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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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49

[신앙 유산] 새 생명이 탄생하는 신비로움 : 구베아 서한

 

 

머리글

 

그리스도교에는 교회를 하나의 살아 있는 몸으로 비유하는 가르침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 백성들을 지체로 하여 구성된 살아 있는 몸이다. 교회는 살아 있는 몸이기 때문에 성장해 나갈 수가 있고 새로운 지역에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킬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곳에 새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선교사들은 아마도 새 생명의 탄생을 바라보는 신비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새로운 교회를 통해서 지상에서 전개되는 구원사(救援史)의 장엄한 장면을 바라보며 살아 있는 몸인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조선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교회 창설 당시 신도들은 분명 중국의 선교사들이 지은 한문 교리서를 통해서 선앙을 알게 되었고, 교회 창설 이후 그 선교사들과 긴밀한 유대를 통해서 조선 교회를 발전시켰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세계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있었고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의 일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교회가 성장하는 기쁨과 시련당할 때의 아픔을 세계 교회와 공유할 수 있었다.

 

교회 창설 당시 조선은 북경교구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 창설 이후 북경교구는 조선을 관장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북경의 교구장이었던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또는 Govea) 주교는 조선 교회의 실질적인 재치권자(裁治權者)로서 조선 교회의 탄생에 감격했고, 그 수난을 마음 아파했으며 조선의 신도들을 돌보기 위해서 선교사를 파견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와 같은 자신의 마음을 나타낸 세 통의 편지를 남겼고 이 편지는 초창기 한국 교회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검토해야 할 자료가 되었다.

 

 

구베아 주교는 누구인가

 

중국에 선교하기 위해 온 서양 선교사들은 중국식 이름을 갖게 마련이었다. 이는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에서 선교했던 선교사들이 현지인의 이름을 쓰지 아니하고 자신의 고유한 서양식 이름을 고수했던 것과는 다른 관행이었다. 이름을 그곳의 방식대로 바꾸어 부른다는 것은 현지 문화에 대한 일차적 수긍을 뜻한다. 그러므로 중국에 온 선교사들은 일단 중국의 문화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한편 중국 교회에서는 알렉산데르라는 세례명을 ‘아리산[亞立山]’이라 표기해 왔다. 그러기에 북경 교구장이던 ‘알렉산데르 데 구베아 주교도 그 본명을 아리산으로 하고 성명을 탕사선(蕩士選, 1751~1805년)으로 바꾸어 불렀다.

 

구베아 주교는 1751년 8월 2일 포르투갈의 에보라(Evora)에서 태어났다. 22세가 되던 1773년에 프란치스꼬회 제3회원이 되었다. 그는 포르투갈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교구 소속의 재속 사제로 서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그가 수학을 전공하여 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포르투갈의 왕립 학술원 회원이었다는 기록을 감안할 때 자연 과학 분야에서도 특출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1782년 12월 15일 포르투갈의 보호권(Padroado) 아래 속해 있던 북경(北京) 교구의 교구장에 임명되어, 이듬해인 1783년 2월 2일 인도의 고아(Goa)에셔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는 그 후 중국에 있던 포르투갈의 영지였던 마카오로 건너 가서 북경에 부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마카오 신학교를 부흥시켰으며 고아에 있던 라자리스트 회원들을 마카오에 초대했다. 그가 북경에 부임한 것은 1785년 1월 18일이었다. 그는 북경에서 건륭(乾隆) 황제의 특별한 대우를 받고 천문 관측 관서인 흠천감(欽天監)의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수학 관계의 관청의 책임자인 산학관장(算學館長)도 역임했다. 그는 포르투갈에 머물 때부터 연마한 자연 과학 지식을 활용하여 중국의 조정에 봉사하게 되었으며, 과학 기술 전파를 병행한 그리스도교 선교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그는 당시 활동하던 포르투갈 계통의 선교사 가운데에는 일급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을 당시는 그가 아직 북경에 부임하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승훈의 영세에는 직접 간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임한 뒤에 이승훈의 영세에 관해 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하지만 이를 그가 남긴 문자를 통해서 확인할 수는 없다. 그가 조선 교회의 창설과 그 이후의 경과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1790년 윤유일(尹有一)이 전해준 편지를 통해서였다. 그 후 그는 윤유일 편을 통해서 거듭 조선 교회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지황(池璜)과 박(朴? Po; 59면 <주> 참조) 요한 등의 조선인 신도들을 만나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편지에 담긴 내용

 

이 과정에서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에 관한 세 통의 편지를 남기게 되었다. 우선 그는 1890년 10월 6일 두 통의 펀지를 로마 교황청의 포교성성 장관인 안토넬라 추기경에게 보냈다. 이 편지 가운데 하나는 조선의 교회 상황에 관한 일반적인 보고서였다. 여기에서 그는 우선 조선 교회의 기적적 창설에 대하여 보고했다. 그리고 이승훈의 전교 활동을 통해서 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천여 명의 신도들이 세례를 받고 신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갈은 자생적인 교회를 관장하기 위해서는 선교사를 파견할 필요가 있음을 논하고 있다.

 

이 첫 번째 편지는 비교적 짧게 씌어져 있다. 그러나 이 편지는 한마디로 자생적 교회 창설에 대한 벅찬 희열과 새로운 교회를 위한 선교의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는 다른 하나의 편지를 통해서 새로운 포교지인 조선의 관할 방안에 관한 문제를 논했다. 조선에 그리스도교가 전해진 것은 가슴 벅찬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이 지역의 선교를 관장하는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이리하여 그는 벅찬 감정을 잠시 누르고 냉정한 이성의 도움을 받아 조선 포교지의 관할권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북경에 있던 선교단의 상황을 먼저 점검했다.

 

그때 북경에는 포르투갈 선교단과 교황청 직속 선교단 그리고 프랑스 선교단이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선교를 위해서 포르투갈 선교단을 파견하는 데에는 포르투갈 본국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그럴만한 여유가 없는 것으로 여긴 듯하다. 그래서 그는 포르투갈 선교단에 조선 포교를 위임하는 데에 회의적이었다. 반면에 그는 프랑스 선교단이 조선에 파견되는 데에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리고 조선에는 교황청 직속 선교사들이 파견됨이 가장 타당하다고 말했다.

 

이 편지를 받은 교황청 포교성에서는 구베아 주교에게 일단 조선의 선교를 위촉했다. 그리고 조선의 신도들도 선교사 파견을 요청해 왔으므로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선교사 파견을 시도하였다. 그는 조선 선교를 위해 중국인 이(李, Johan dos remedios) 신부를 파견했으나 이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다. 이어서 구베아 주교는 1794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여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주문모 신부는 1795년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구베아 주교가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까닭은 조선 교회의 기적적 탄생에 감동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조선 교회를 방치할 경우 조선에서 가성직(假聖職) 제도가 시행되고 있던 상황을 감안하면 조선 교회에 머지않아 이교(離敎)가 생길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서 선교사를 파견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구베아 주교는 1797년 8월 15일 사천(四川) 교구의 교구장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마르탱(Martin) 주교에게 조선 교회의 탄생과 수난에 관한 긴 편지를 남겼다. 이 편지에서 조선 교회가 성령의 역사로 탄생했음을 말하고 주문모 신부의 보고서에 근거하여 1791년의 박해로 인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를 서술했다. 그리고 1795년 주문모 신부의 입국이 탄로나 일어난 박해 상황까지를 자세히 서술해 주고 있다.

 

 

남은 말

 

이 서한들에 언급된 내용 가운데 사실과는 다른 약간의 착오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서한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들은 대부분 초창기 한국 교회사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굳이 이 서한의 사료 가치를 논하자면 한국 교회사에 관한 일급 사료라고 말하더라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원래 라틴어로 쓰여진 이 편지들은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번역되어 유럽에서는 비교적 많이 읽히고 있었다. 따라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가 간행되기 이전까지 유럽인들은 이 서한들을 통해서 초창기 한국 교회사의 전개 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서한을 통해 새로운 교회의 탄생에 감격했던 구베아 주교의 기쁨과 깊은 신앙에 동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서한을 읽으면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남긴 순교의 발자취를 확인하게 되며, 오늘의 우리들에게 우리 교회의 역사와 순교가 어떠한 의미를 던져 주는가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구베아 서한의 가장 좋은 한글 번역문은 한국교회사 연구소에서 1992년에 간행한 “교회사 연구” 제8집에 수록되어 있다.

 

<주> 구베아 주교의 세 번째 서한에 등장하는 조선인 관료 ‘포(Po) 요한’은 박(朴)씨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포’라는 성이 없고 이는 아마도 어떤 한자 단어의 당시 중국어 발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박 씨는 현재 중국음으로 Pu 혹은 Piao로 발음한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성 가운데 18세기 후반기 중국의 일부 지방에서 Po로 발음되었을 한자어로는 박씨가 제일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경향잡지, 1994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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