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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새로운 삶의 의미와 책무 - 영세대의(領洗大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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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48

[신앙 유산] 새로운 삶의 의미와 책무 : 영세대의

 

 

머리글

 

1860년대를 전후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세례를 하느님과 사람이 서로 중대한 언약을 맺음과 같다는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언약을 통해 사람들이 하느님의 벗으로 대접받으며 그 자식이 된다고 보았다. 또한 사람들은 세례를 통해 자신들이 성총의 신묘한 은혜로 하늘 나라의 복과 상생(常生)을 얻게 될 것을 굳게 믿었다. 당시의 교회에서도 영세자들에게 이러한 은혜에 대한 보답의 마음으로 예수를 따르고 그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했다.

 

사람들은 세례를 통해서 이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이로써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이 새로운 삶은 악의 자녀였던 과거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지성을 갖춘 어른이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을 뜻하며 종전과는 다른 새로운 생활을 결심하는 것이다.

 

박해 시대의 신도들도 이와 같은 교회의 가르침을 이미 교육받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영세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신도들의 이 결의를 돕기 위해서 책자를 간행했다. 이 목적으로 간행된 대표적 저서가 “영세대의”다. 이 책은 1864년 다블뤼 (Daveluy, 1818~1886년) 주교가 황석두(1813~1866년)의 도움을 받으며 저술 간행한 여러 책자 가운데 하나였다.

 

 

저술의 배경

 

이 책이 간행될 당시는 박해 시대로 신도들이 성직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교회에서는 신도들의 자발적인 학습을 통해서 교리 지식을 보충하고, 기도와 묵상을 이끌고자 했다. 이 때문에 교회는 신도들을 위해서 한글로 된 책자를 간행했고, 신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자 노력했다. 신도들이 한글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 양식인 교회 서적을 읽을 수 있는 방법 내지는 도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문맹자들에게 먼저 한글 교육을 시키도록 회장들에게 강조한 바도 있었다. 그만큼 교회 서적은 신도들의 신심 향상에 있어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상황과 교회 서적의 기능을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는 매년 한 번밖에 볼 수 없고 그것도 잠깐 동안밖에 볼 수 없는 우리 신자들을 직접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보급시킴으로 이 아쉬움을 가능한 한 보충하려고 노력합니다.” 선교사들은 신도들을 직접 가르칠 수 없는 아쉬움을 보충하려고 교회 서적들을 간행하였다. 그리하여 1860년대 우리 교회에서는 교회 서적을 열심히 간행했고, 이 작업은 다블뤼 주교처럼 신학적 소양을 갖춘 성직자와 황석두와 같은 조선인 신도들에 의해 진행될 수 있었다.

 

 

“영세대의”의 내용

 

박해 시대 세례를 받고자 하던 어른들은 “성교요리문답”과 “성교절요”를 배워야 했다. 또한 교회에서는 영세 예비자들에게 마음을 부지런히 닦고 규계를 타당히 지킬 것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더욱 긴요한 것으로 ‘염경기구’(念經祈求) 를 요청했다. 회장이나 선교사들은 찰고(察告)라 부르던 일종의 구두 시험 과정을 통해 예비자가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추었음을 확인한 다음에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이들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께로부터 새로운 은혜를 받게 되며, 이 은혜에 맞갖은 책무를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세례성사의 은혜와 책무를 때때로 기억함으로써 신도들은 신도로서의 본분을 제대로 해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은혜와 책무에 대해 신도들에게 그침 없는 일깨움을 주기 위해서 “영세대의”가 간행되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내용도 이와 같은 간행 목적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우선 세례의 신령한 일곱 가지 효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사람들은 세례를 통해 이 일곱 가지의 특별한 은혜를 하느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 은혜의 첫 번째는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는 것이다. 아로써 사람들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어 무궁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두 번째로는 세례를 통해서 잠벌의 사함을 받고 예수의 모범을 따라 세속과 육신과 마귀와 싸워 이기면 여러 가지 덕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세 번째 신익(神益)은 성총을 받아 영혼이 깨끗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네 번째는 신덕 망덕 애덕의 삼덕과 지덕(智德), 의덕(義德), 용덕(勇德) 그리고 절덕(節德)이라는 사추덕 (四樞德}을 갖추게 되어 지혜로움과 정의감 그리고 용기와 절제의 미덕을 갖게 해준다고 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는 예수의 지체가 되고 성교회의 의자(義子)가 되며, 여섯 번째로는 인호를 박아 주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나게 하며, 마지막으로 천당 문을 열어 준다고 말했다.

 

이상과 같은 일곱 가지 은혜에 대하여 신도들은 네 가지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 새로운 의무로는 마귀와 그 체면과 행실을 끊어 버려야하고, 하느님[天主]께로 돌아와 예수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천주 성교회를 믿고 봉행하며 자신이 세례를 통해서 받은 높은 지위를 더럽히지 않아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신도들이 세례를 받은 것은 하느님, 교회, 성직자와 교우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 의무를 실천할 것을 약속함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므로 영세자들은 이 언약을 평생 동안 기억하고 행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받게 되는 하느님의 은혜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늘상 겸손하고 주님께 의탁하며, 영혼과 육신을 삼가 지켜 나가며, 범죄할 기회를 멀리하고 방심치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간행의 의미

 

“영세대의”는 박해 시대의 신도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의미를 집약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우선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대군대부(大君大父)이신 하느님의 벗이 됨을 강조하고 있다. 이로써 사람들은 신분을 뛰어넘어 누구보다도 높은 지위에 있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밝혀 주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높은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이 책은 신분제적 사회에서 신분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일깨워 주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은 신분 이외에 인간 공동체를 구성하는 새로운 요소가 신앙이란 것을 밝혀 주고 있다.

 

오늘의 종교학자들은 신관(神觀)이 인간관의 다른 측면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신관을 갖게 됨은 인간관의 전환을 뜻하는 것이었다. “영세대의”에서는 사람들은 영세를 통해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하게 하시고, 또한 모든 사람을 원수까지도 천주의 모상과 형체로 사랑케 하신다.”는 구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근거로 한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신분제로 나뉘어진 당시의 사회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이 책에서는 예수를 새로운 인간의 전형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는 “예수처럼 충효를 다해 천주를 높여 공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예수처럼 사람 사랑하는 덕을 행하여,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구하는 일에 힘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사람들은 예수의 겸손과 양선과 인내와 극기를 본받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에 입문하면서 새로운 신앙 및 사회와 윤리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자 한 것이다.

 

“영세대의”에서는 “가난하고 범상한 터[地位]에 있는 자는 더욱 천당의 산업을 우려러보아라. 세고(世苦)를 참아 받고 어려워하지 마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신앙이 가지고 있던 내세 지향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것과 동시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에서는 새로운 가치관과 윤리의 기준을 박해 시대 당시의 신도들에게 주고자 했다.

 

 

맺음말

 

박해 시대에 있어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영세하는 이날은 가장 크고 복된 날”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그 신앙에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까닭이었다. 당시의 교회에서는 영세를 통해 얻게 되는 이 새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신도들에게 일깨움을 주려고 이 책을 간행했다.

 

이 책은 처음 어렵게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목판본은 오늘날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주로 볼 수 있는 이 책은 1864년 목판으로 간행된 책자가 아니라 1882년 나가사키에서 신식 연활자로 간행되었던 책자(12.1×19cm)이다. 이 책은 1898년에는 서울의 성서인쇄소에서 중판을 하게 되었으며, 그 후에도 판을 거듭해서 신도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주고 있었다.

 

이 책은 박해 시대 이래 식민지 초기에 이르기까지 신도들에게 새로운 인간관을 심어 주었다. 모든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하고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넌지시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이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새로운 윤리관으로 ‘사랑’을 제시해 주었다. 이 사랑의 실천을 새로운 책무로 신도들에게 부과하고 있었다. 이 책이 발휘하고 있던 이러한 역할은 우리 나라 봉건 사회 신분제의 해체에 일정한 기여를 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한국사적 의미가 있다.

 

[경향잡지, 1994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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