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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개화기를 밝힌 교회 언론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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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46

[신앙 유산] 개화기를 밝힌 교회 언론 : 경향신문

 

 

머리글

 

우리 나라 역사에서 1905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기간을 특히 ‘애국 계몽 운동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이르러 제국주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전개되자 우리 선각자들은 이에 맞서 언론을 통한 구국 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언론 분야 뿐만 아니라 교육과 결사 활동을 통해서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 시기 애국 계몽 운동의 가장 중요한 활동 방향은 민족의 자존과 자립을 위해서 스스로 근대화의 길을 찾으려는 ‘반(反)봉건 운동’을 들 수 있다. 또한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려는 ‘반(反)침략 운동’도 힘차게 전개되었다. 당시 우리 나라의 역사적 사건을 논할 때 우리는 반봉건과 반침략이라는 이 두 가지 가치와 관련하여 그 의미를 평가하게 된다. 이 점은 교회사의 의미를 규정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존중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사 연구가들은 교회가 당시의 사회적 요청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개항기 한국 천주교회가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발행하던 한글 전용 주간 신문이다. 이 신문은 1906년 10월 19일에 창간되었다. 그 뒤 1910년 12월 30일 통권 220호까지 간행되었으나 ‘한일 합방’ 이후 일제의 민족 언론에 대한 탄압으로 폐간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이 신문은 개항기 한국 천주교회의 움직임을 알려 주는 적지 않은 자료 가운데 하나로 연구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창간의 배경과 목적

 

20세기에 접어들어 세계 교회는 ‘세속’의 각종 도전에 직면하여 대응책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교황 레오 13세(1878~1903년)나 비오 10세(1903~1914년)는 호교의 방법으로 교회에서도 신문과 잡지를 발간하여 운영하고 비신도들도 볼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교황의 가르침에 항상 충실하고자 했던 조선 교회의 지도자들도 교황의 이러한 권고를 자신의 교구 안에서 실현해 보고자 했다. 더욱이 당시 우리 나라 교회에서도 자신에 대한 도전에 맞서 호교를 전개할 필요가 있었으며, 신도들에게도 올바른 사회적 가르침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당시 우리 나라 사회에서는 ‘자강 운동’의 일환으로 ‘언론 구국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 신문은 이와 같은 배경 아래 신도들에 대한 계몽을 목적으로 창간되었다. 이 점은 이 신문의 다음과 같은 논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참 개화를 아니하면 타국에게 견디지 못한다…… 여러 나라가 서로 통하고 항상 다투는 고로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 앞에 견딜 수 없고 개화 아니한 나라가 개화한 나라 앞에 저절로 약한즉 개화 아니한 나라는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이니라.” 즉 “경향신문”은 우리 나라가 약육 강식의 국제 사회에서 살아 남기 위한 참된 개화의 방략을 제시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이 신문은 개선교의 선교에 대응하고 천주교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호교를 위해서 창간되었다. 우리 나라는 19세기말부터 개신교 선교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20세기초에 이르러 개신교는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을 비롯한 각종 사회 활동을 통해 일반인들의 호감을 얻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개신교 선교 지역으로까지 불리었다. 개신교는 이미 자신의 신문을 발행하여 선교에 활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천주교회 당국자들도 신문 발간을 통해서 교회의 가르침과 주장을 천명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향신문”이 교회의 공적 보도 기관으로 창설되기에 이르렀다.

 

이 신문이 호교를 지향하고 있었음은 이 신문의 발행인인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8년) 신부가 동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신문 간행의 목적을 ‘진리의 원수들이 출판물을 통하여 퍼뜨리는 거짓 지식을 바로잡아 주며, 필요하다면 참된 진리를 변호하는 것’이라 제시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신문의 제호와 내용

 

안세화 신부는 새로 간행된 신문의 이름에 경향(京鄕)이라는 말을 쓰기로 했다. 이 말은 천주교회 용어 가운데 비교적 자주 쓰이는 말이다. 예를 들면 교황이 전세계를 향해 축복을 내릴 때에도 ‘신앙의 서울인 로마와 지방’(Urbi et orbi)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우리는 이를 ‘경향’이라는 한자어로 번역하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 제호에서 볼 수 있듯이 “경향신문”은 신도들만을 독자로 국한하려 한 것이 아니고, 일종의 전국지를 지향하면서 창간되었다. 그리고 언론의 책임을 의식하여 간행된 이 신문에 일반 독자들도 적지 않은 호응을 보내 주었다.

 

이 신문의 제호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경향신문”은 일반 독자들까지도 포용하고자 했으므로 그 내용도 다양했다. 즉 이 신문은 우선 호교나 계몽적인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동시에 국내외의 소식들을 전하며 교회의 시각을 통해 시사 문제에 대한 해설을 시도했다. 그리고 관보를 요약하여 제시해 주고 법률이나 생활에 관한 기사들을 수록하고 있다. 또한 역사와 문예 작품들도 수록하여 당시 전개되던 계몽 사학이나 문학에 관한 내용도 포함했다.

 

이 신문의 발행인은 앞서 말한 대로 드망즈 신부였다. 그는 당시 조선에 파견되었던 선교사 가운데 특출한 지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신문의 실질적 책임자는 검원영(金元永, 1869~1936년) 신부였다. 그리고 ‘이건수’라는 기자가 있었으며, 당시 종현 성당의 복사로 있던 강화석(姜華錫), 김조현(金祚鉉)도 신문의 간행에 참여했을 것으로 본다. 강화석은 구한말의 대표적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서북학회의 평의원을 역임하고 있었으며, 인천 박문학교와 서울 계성학교의 교장직을 맡은 바 있다. 김조현도 개항기 외부(外部)와 궁내부(宮內府)에서 근무하던 사람으로서 외국에 대한 넓은 견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어에 능통했다. 이와 같이 “경향신문”은 교회의 엘리트 선교사와 조선인 성직자 그리고 당시 애국 계몽적 지식인들의 주도로 간행되었다.

 

 

신문의 발행 상황

 

“경향신문”은 단순히 일반 종교 신문이나 시사 신문의 역할에만 머물지 않았다. 이 신문에서는 애국 계몽적 논설들을 통해서 국민 계몽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경향신문”에서는 모두 200여 편의 논설들을 실었는데 이 논설들은 종교나 정치 외교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경제나 위생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그리고 이 논설 가운데 11편의 논설이 당시의 대표적 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에 전재되었다. 이는 “경향신문”의 논조가 그만큼 선명하고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은 당시 신문의 기준으로 비교적 많은 4200여 명의 정기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 신문의 독자들은 신도들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정기 구독자들 가운데 일반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경향신문”은 원래 기대했던 대로 간접 선교를 톡톡히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향신문”도 민족과 함께 시련에 처하게 되었다. 1910년 이른바 한일 합방을 강요당한 이후 일제는 국내의 언론 운동을 극도로 탄압했고, 신문 잡지들의 폐간을 강행했다. 이 와중에서 “경향신문”이 예외로 취급될 수는 없었다. 드망즈 신부는 신문을 지속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신문을 계속 간행하기 위해 조선 총독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시간 반에 걸친 총독과의 토론을 통해서 그는 “우리는 일본의 잔악성에 속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아주 플라톤(Platon)적인 만족밖에는 얻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경향신문”은 폐간되고 그 제호를 이어 받아 “경향잡지”가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까지 계속 간행되고 있는 “경향잡지”의 밑뿌리는 바로 이 “경향신문”에 있는 것이다.

 

 

맺음말

 

한 사회를 올바로 이끌어 나가는 데에 언론이 차지하고 있는 구실은 매우 큰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언론 출판 매체를 통해 그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지도 이념이 제시되고 이를 통해 언론은 사회의 발전, 민족과 국가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언론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중요성 때문에 근대 사회에 접어들어 모든 집단에서는 언론을 주목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 교회도 언론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개항기 교회에서는 “경향신문”을 간행하게 되었다. “경향신문”은 주간지로 간행했던 일반 시사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교회의 공식 기관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당시 교회가 고수하던 정치 불간섭주의의 영향을 받아 직접적인 정치 문제에 소극적인 자세를 드러내기도 했다. 반면에 이 신문은 주로 계몽적 지식의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특성이 “경향신문”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우리는 이 신문을 통해서 개항기 우리 나라 사회와 교회에 대해 상당히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신문은 우리 나라 가톨릭 언론의 효시였다. 당시 “경향 신문”이 가지고 있던 어려움이나 고뇌를 통해 우리는 오늘의 가톨릭 언론이 나아갈 참된 길이 무엇인지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와 겨레를 위한 진실 옹호라는 목표가 가톨릭 언론에는 항상 따르고 있음을 우리는 거듭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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