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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형제 사이의 서글픈 이야기 - 예수진교사패(耶蘇眞敎四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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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44

[신앙 유산] 형제 사이의 서글픈 이야기 : 예수진교사패

 

 

시작하는 말

 

동양에 그리스도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된 때는 16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이때 동양의 선교에 가장 열성적이었던 수도회는 예수회였다. 이들은 천주교 신앙을 새로운 지역에 전함으로써 종교 개혁으로 인해 유럽에서 상실한 종교적 영지를 벌충해 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동양 선교에는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과 함께 개신교에 대한 은근한 경쟁이라는 의미가 함께 함축되어 있었다.

 

동양에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는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개신교 형제들의 동양 선교는 가톨릭 선교사들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사들은 각각 자신의 교회를 변호하고 상대의 취약점으로 생각되는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지적하며 상호 비방에 가까운 말들을 주고받으며 싸우고 있었다.

 

우리 나라 천주교회에 개신교에 대한 대립적 의식은 19세기 중엽 이후 중국에서 저술된 한문 천주교 서적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주입받기 시작했다. 이 대립 의식이 가장 집중적으로 결집되어 있는 대표적 책자로는 “예수진교사패”를 들 수 있다.

 

 

이 책의 지은이와 엮은이

 

“예수진교사패”(耶蘇眞敎四牌)를 지은이는 동중화(董中和)였다. 그는 이 책을 1898년 홍콩에 있던 나자렛 요양원에서 간행했다(활판본, 1책, 13.5 × 21.7Cm). 이 책이 간행되던 당시의 중국에서는 개신교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개신교 선교사 ‘슈’ 목사와 같은 이는 “양교합변”(兩敎合辨)과 같은 책을 지어 가톨릭 교회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 “양교합변”에서는 종교 개혁 이래 개신교측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제기했던 의화론(義化論), 성사론(聖事論), 마리아론 등에 관한 여러 신학적 문제들이 수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개신교의 공격에 직면한 중국의 가톨릭 교회에서는 자신을 변호하며, 이에 그치지 않고 개신교를 공박할 수 있는 책자의 간행을 기도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예수진교사패”와 같은 책자가 저술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이 “예수진교사패”를 우리 나라에서 번역 간행한 사람은 한기근(韓基根, 1868~1939년) 신부였다. 한학에 능통했던 그가 처음으로 번역 간행한 책자가 바로 이 “예수진교사패”였다. 그는 이 책 이외에도 1910년에는 라틴어로 된 불가타(Vulgata)본 성서에서 네 복음서를 번역하여 “사사성경”(四史聖經)이란 제목으로 간행한 바 있는 개항기 및 식민지 시대 한국 교회의 대표적 논객이었으며, 성서 연구자 내지는 번역자였다. 그는 1914년 이래 경향잡지사의 주필로서 필봉을 휘둘러 교회의 가르침을 밝혀 나갔다.

 

그는 중국에서 간행된 “예수진교사패”를 번역하되 이를 당시 우리 나라 실정에 맞추어 엮어 냈다. 즉 그는 개신교 신도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예수진교사패” 가운데 중국 교회와 관련되는 부분은 조선의 교회에 관한 사항으로 바꾸어 독자들이 이 책을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은 번역은 번역이로되 번역자의 독창성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는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진교사패”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었는데, 서울의 종현(鐘峴) 성당에서 민덕효(閔德孝, Mutel) 주교의 감준으로 1907년에 그 초판(활판본, 1책, 160쪽, 13.5 x 21.7cm)이 간행된 이후 1932에도 재관이 간행된 바 있다. 이렇듯 이 책은 개항기 말과 식민지 시대에 걸쳐 널리 읽히고 있던 책이었다. 그리하여 이 책은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에 전개되는 교리 논쟁 과정에 있어서 천주교 신도들에게 개신교에 대한 대항 논리를 강화시켜 주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이 쓰여진 배경

 

이땅에서 천주교와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한 1884년 이후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입국 직후 천주교에 대해 협조적 자세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선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1890년대에 이르러서 이 양자의 관계는 경쟁적으로 변했고, 조선인 개신교도들과 천주교 신도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충돌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902년 황해도에서 발생한 ‘해서교안’(海西敎案)을 들 수 있다. 이 충돌의 결과 황해도에서 두 교회의 관계는 매우 험악하게 변모되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경쟁 관계가 전국 도처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우리 나라에서는 개신교의 선교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1907년에 이르러서는 개신교 신도의 총수가 천주교 신도의 숫자를 웃돌게 되었다. 당시 천주교는 백 년 이상 피를 흘려 가며 선교해 왔건만 뒤늦게 들어온 개신교의 활발한 선교에 압도당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1903년 이래 교리 논쟁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 천주교 신도들은 개신교로 개종해 가는 사례도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당시 조선 천주교에서는 일종의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천주교에서는 자신이 간행하던 “경향신문”의 부록인 “보감”을 통해 개신교에 관한 공격의 논조를 강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개신교에 대한 체계적 변박서인 “예수진교사패”를 번역 간행하게 되었다. 한편 이에 맞서 개신교에서는 다시 1908년 “예수천주 양교변론”과 같은 책자를 간행하여 교황 제도를 비롯하여 천주교의 신학적 경향에 대한 문제들을 계속하여 제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종교 개혁 이래 시작되었던 해묵은 교리 논쟁이 이땅에서도 뒤늦게 재현되어 가고 있었다.

 

 

이 책의 내용

 

“예수진교사패”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개신교의 천주교에 대한 교리 논쟁에 맞서서 천주교를 옹호하고 개신교의 문제점을 밝히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밝히고자 하는 부분을 변증하기 위해서 개신교에서 번역 간행한 신약과 구약을 직접 인용하며, 그 성경 구절에 대한 가톨릭적 주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증거’라는 난을 통해 천주교가 참된 종교임을 말하고, ‘벽파’라는 항목을 통해 개신교의 거짓됨을 밝히고자 했다. 이와 같은 형식을 통해서 이 책은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이며 설득력 있게 제시해 나가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다분히 호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이 책의 제목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예수께서 세우신 참된 종교를 나타내는 네 가지 특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네 가지 특성이란 “지극히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전하여 내려옴”을 말한다. 이 네 가지 특성은 마치 상표가 물건의 특징을 보장해 주듯이 천주교가 참된 교회임을 증명해 주는 것으로서 개신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이 책에서는 개신교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함께 응답하여 주고 있다. 즉 천주교에서 시행하는 염경 기도의 필요성과 정당성, 마리아와 성인 공경, 성인들의 전구(轉求), 십자가 몇 성상에 대한 섬김, 연옥에 관한 교리, 성전(聖典)의 중요성 그리고 신앙만으로는 구원될 수 없음 등에 관해서 항목마다 성경 구절을 제시하면서 논증해 주었다. 이에 이어서 이 책에서는 일곱 가지 성사에 대한 가톨릭적 해석을 집중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이를 통해 이 책에서는 견진성사나 성체성사 그리고 고해성사 등에 관한 개신교의 주장을 논박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이 책은 천주교에 대한 개신교의 문제 제기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마무리

 

개항기 이래 천주교에서는 개신교 형제들을 가리켜 윤리적으로 타락한 ‘루테로’의 후예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애써 그들을 낮추어 내리고자 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천주교 신도들을 교황의 종자(從者)라고 바아냥거렸고,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로마만을 전한다고 비난했다. 이와 같은 대립 감정은 두 교회의 선교사에 의해서 더욱 조장되어 간 측면이 있다.

 

개항기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상당수의 사람들은 프랑스 선교사를 처음 만났을 경우 천주교 신도가 되었고, 미국이나 그 밖의 나라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개신교 신도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유럽에서와 같은 종교 전쟁을 치른 과거를 가지지 아니했으며, 상호간의 치열한 경쟁도 경험한 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의 가르침을 따라 이땅의 천주교 신도들은 하늘을 같이 이고 살아가는 ‘쁘로데스땅’(protestant의 불어식 발음)을 공격 했다. 이땅의 프로테스탄트 신도들 가운데 상당수는 거의 맹목적으로 천주교를 공박하며, 그것만이 가장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것인양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이로써 그들은 모두 한 형제가 되라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어기면서도 자신들만이 정통적 신도임에 자부하기를 주저하지 아니했다.

 

이는 우둔한 형제 사이에 전개된 서글픈 이야기에 지나지 아니하다. 우리는 지난날 유럽 신학이 빚어낸 갈등의 굴레에 매여서 그들을 위한 대리전에 동원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제 이땅의 그리스도교 형제들은 서로 싸울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형제들 사이의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함께 생각하며 겨레 문화의 복음화를 위해 함께 노력할 때이다. “예수진교사패”는 이러한 노력을 위한 반성의 자료로만 기억되어야 한다. 아마도 거기에 이 책을 지금 이 시점에서 점검해 보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4년 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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