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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은총으로 가는 첫걸음 - 신명초행(神命初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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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38

[신앙 유산] 은총으로 가는 첫걸음 : 신명초행(神命初行)

 

 

머리글

 

“신명초행”은 박해 시대 이후 우리 나라 교회에서 통용되던 대표적 묵상서이다. 박해 시대의 교회에서는 현세란 풀잎 끝에 맺혀진 이슬과 같이 덧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설명하면서 현세적 삶의 가치를 부정하곤 했다. 그리고 당시의 교회는 세속을 죄악으로 가득 차서 항상 탈출을 꾀해야 할 기피의 대상으로 규정해 왔다. 박해 시대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교회의 가르침과는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현세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도정으로 규정하며 그 의미를 충분히 인정하고, 세속에 대해서도 적극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날과 오늘의 교회가 드러내고 있는 현세와 세속에 대한 견해의 펀차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지난날 세속과 현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나타나게 된 원인과 그 현상의 특성을 규명해야 한다. 또한 그 현상이 당시 사회와 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 후의 역사 전개에는 어떻게 작용하게 되었나를 살펴보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 사실의 의미를 오늘의 시각에서 재평가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입장에서 선조들이 남긴 묵상서인 “신명초행”(神命初行)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신명초행”은 어떻게 간행되었나

 

이 책의 제목에 나오는 ‘신명’(神命)이란 말은 하느님이 우리 영혼을 위해 내려 주시는 초성(超性)한 생명인 상존 성총(常存聖寵)을 뜻한다. 그리고 ‘초행’(初行)은 글자 그대로 ‘첫걸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을 풀어 보면, 그것은 “상존 성총을 얻는 첫걸음”을 의미한다. 이 책의 저자는 신도들에게 은총으로 가는 첫걸음으로 묵상 기도를 가르쳐 주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이 책을 저술했고 간행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책이 간행되기 이전에도 “묵상지장”이라는 묵상서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나와 있던 선교사들은 신도들을 위한 새로운 묵상서를 편찬하고자 했다. 이 작업에 착수한 이는 다블뤼(Daveluy, 1818~1866년) 신부였다. 그는 프랑스어로 된 묵상서 “그것을 잘 생각하라”(Pensez y bien)는 제목의 책을 대본으로 하여 “성찰기략”을 저술했다 한다. 그러나 그가 대본으로 삼았었다는 그 책은 오늘날 파리 외방 전교회 도서관이나 그 밖의 프랑스 주요 도서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일서(逸書)가 된 듯하다.

 

순교자 최형(崔炯, 1814~1866년)은 다블뤼가 지은 이 책의 원고를 목판에 새겨 1864년에 이를 상하 두 권의 책자로 간행했다. 최형의 심문 기록을 보면 “성찰기략”은 당시 모두 일천 부가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후에도 판을 거듭하여 신도들에게 널리 읽혀졌다. 즉, 1882년에 중간본이 활판으로 간행되었다. 그 후에도 1891년과 1899년에 이 책은 뮈텔 주교의 감준으로 각기 다시 간행되었다. 그리고 1936년에는 라리보 주교의 감준으로 재간되어, 이 책의 오랜 생명력을 드러내었다.

 

 

이 책은 어떤 책인가

 

“신명초행”은 신도들의 묵상 기도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간행되었고, 신도들의 신심과 영성을 살찌우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이 책에는 모두 30가지의 묵상 주제들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이 주제들과는 별도로 책의 머리는 그 저술의 동기를 명확히 밝혀 주는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매주제에 대한 묵상을 시작하기에 앞서 ‘대월’(對越)을 유도하기 위한 세 가지의 기도문이 제시되어 있다. 대월이란 하느님과 직접 대면하여 대화를 나누고 가르침을 받는 것을 뜻하는 중국 교회의 오래된 용어였다.

 

묵상을 시작하기 전에 드리는 이 ‘대월’의 기도에서는 먼저 하느님의 전지하심과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 그리고 하느님의 친절하심을 생각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여러 가르침을 충분히 묵상하고, 이를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성신(聖神)께 특별한 도움을 구하고 있다. 성신께 특별한 도움을 구하는 바로 이 부분은 아마도 박해 시대에 저술되었던 기도서나 신심 묵상서 가운데 성신의 비추심을 가장 간절히 기원하고 있는 부분으로 생각된다.

 

“신명초행”의 상권에서는 먼저 영원한 도리와 사람의 마지막 지향에 관해서 묵상을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구령, 영원, 죄와 통회, 보속 및 천주의 자비와 사람들의 회개함을 묵상한다. 또한 죽음과 사심판(私審判), 지옥과 천당을 묵상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예수 성탄 및 예수의 평상 행위에 대해서 신도들에게 일깨움을 주고자 하고 있다.

 

이 책의 하권에서는 먼저 예수의 수난을 두 가지 측면에서 논하고 있는바, 첫째로는 예수의 명성과 체면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이에 이어서 육신에 받으신 수난이란 측면에서 묵상을 이끌고 있다. 또한 예수의 성사와 부활을 검토하고, 기도와 묵상과 성총에 관하여 논한다. 고해, 성체와 같은 성사를 설명하기도 하며, 소죄와 애주애인(愛主愛人), 악한 표양과 혀로 범하는 죄를 경계해 주기도 한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모 마리아를 묵상의 주제로 제시해 준다.

 

 

이 책에 담긴 내용

 

“신명초행”에서는 신도들에게 구령(救靈)받기 위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애주애인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으며,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올바른 사랑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기 위해 하느님과 인간의 본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각종 윤리적 규범 등을 묵상하도록 하고 있으며, 하느님의 은총을 얻고 보존하고 키워 나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신명초행”은 박해 시대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심을 키워 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가난함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스승이요 모범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모든 이의 사표가 되는 분임을 이 책의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케 해주었다. 이 책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어 하느님의 본성에 상접(相接)하게 되었으니 하느님처럼 고귀한 존재임을 말하며,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가르침을 해설해주고 있다. 또한 하느님이 인간을 내실 때 주의 모상과 함께 “영혼과 자주장(自主張)을 주었다.”고 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한 깨우침을 주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 그리고 인간 상호간에 서로 사랑해야 할 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품과 재능과 덕행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가히 사랑하고 마땅히 공번되이 사랑할 것은 오직 사람된 위(位)와 주의 내심이로다. 그 위(位)에 주를 보고 그 사랑을 주께 돌아 보낼지니, 무릇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함이 곧 천주를 사랑하고 미워함이 되는지라. 이러므로 외교인과 교우와 벗과 원수를 의론치 말고 다 주를 위하여 사랑할 것이라.”

 

 

맺음말

 

박해 시대 한국 교회사는 내세 지향적, 성속 이원론적 성향을 그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대의 교회사가 한국 역사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없었다는 부정적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박해 시대의 교회가 그 사상적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한국사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견해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당시의 신도들이 가지고 있던 성속 이원론이나 내세 지향 사상도 분명히 역사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이 사상을 통해 모순에 가득 갔던 현세를 부정하고, 새로운 이상계를 추구해 나갔던 것이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이해가 단순한 관념의 유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관은 인간관의 다른 측면이었기에 그들은 새로운 인간관을 갖게 되는 이론적 근거로서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박해 시대의 ‘순수한’ 종교 신앙도 결코 현세와는 무관한 신앙 그 자체로 머물 수는 없었다. 그것은 현세를 재해석하고 변혁시키는 힘이기도 했다. 우리는 “신명초행”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이 점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신명초행”은 당시 우리 나라에서 읽히고 있었던 책들 가운데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강력하게 제시해 주고 있던 책이었다. 그것은 당시 양반들이 한문으로 저술했던 그 어떤 책에서도 언급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르침을 19세기 후반기를 살았던 민중에게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만인들의 새로운 철학서요 종교서였다. 또한 이 책은 박해 시대 신도들의 영성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제외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명초행”은 한국사와 교회사에서 그리고 한국 사상사 분야에서 모두 주목해야 하는 중요한 사료인 것이다.

 

[경향잡지, 1993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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