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신앙 유산: 인간으로 다가선 그리스도 - 성상경(聖像經)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37

[신앙 유산] 인간으로 다가선 그리스도 : 성상경(聖像經)

 

 

들어가는 말

 

우리 나라에 천주교 신앙이 전래된 18세기 말엽 이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비교적 쉽게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천주관은 천주교에서 논하고 있는 삼위 일체적 천주관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특히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당시 신도가 아닌 일반인들이 결코 인정하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이었다.

 

전통 문화에 젖어 있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창조주 천주와 주재자 천주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은 이 하느님 천주께 충(忠)과 효(孝)를 드리며 임금이나 아버지처럼 섬겼다. 그러나 이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삼위 일체적 하느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는 위엄이 있는 아버지이거나 임금의 이미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인상을 당시인들에게 주고 있었다. 그는 나약한 인간과 다름이 없이 강포(强暴)한 권력자들에게 ‘잘못’ 걸려들어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 상에서 죽기까지 한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예수는 영광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보다는 고통을 표상하는 비극적 인간이요 하느님이었다. 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약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고백함으로써 신도들의 삼위 일체적 하느님관은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가톨릭 교회에서는 미사 때마다 성변화 후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굳세게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죽음의 고통과 부활의 영광을 동시에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날 초대 교회 때에는 부활 신앙이 무엇보다도 강하게 나타났지만, 18~19세기에 이르러서는 고통의 신비가 강조되던 분위기였다. 그리고 당시의 신도들은 신앙의 기쁨을 누리기보다는 죄악의 무게와 지옥불의 두려움에 억눌려 지내는 예가 항용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상경”은 편찬되었고 신도들에게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성상경”은 어떠한 책인가?

 

“성상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때를 전후한 18시간 정도의 시간 안에 이루어진 일들을 모두 서른 가지의 대목으로 나누어 한 달 동안 열심히 묵상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1886년 서울에 있던 성서 활판소에서 활판으로 찍어냈다. 매쪽 20자 9행(11.5cm×19cm)으로 되어 있으며, 모두 68면 단권으로 블랑(Blanc) 주교의 감준을 받아 간행된 후 판을 거듭하였다.

 

이 책이 고유한 저작인지 아니면 번역본인지, 또 번역본이라면 프랑스의 묵상서를 번역한 것인지 아니면 한문 서학서를 번역한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한문 서학서에서는 이와 비슷한 책자를 찾지 못했고, 프랑스 교회에 이와 같은 책이 있었는지는 좀더 조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는 이 책의 지은이나 엮은이가 누구인지를 현단계에서는 밝힐 수 없다. 그런데 이 책이 간행된 1886년 당시 조선에 입국해 있던 선교사들은 불과 몇 명이 안되었고 이들 중 입국 연도가 가장 빠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불과 10여 년 정도 조선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그들의 조선어 실력도 책을 번역할 정도까지는 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책은 개항 이후에 입국한 선교사들이 번역했을 가능성은 상당히 적다. 아마도 이 책은 병인 박해 직후 박해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던 조선인 신자 지도자들이 몰래 숨어서 짓거나 번역한 것을 블랑 주교가 감준하여 간행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이 잭이 쓰여진 때는 아직 박해가 완전히 끝나기 이전이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는 신도들이 쉽게 배교하고 있는 상황을 개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병인 교난 기간 동안 서울의 포도청에 체포된 신도 가운데 대략 삼분의 일 가량이 순교를 했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순교자를 대단히 높은 비율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박해 당시의 열심했던 교회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배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아쉬워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 책 “성상경”에서는 기도 드리는 지향으로 “오주 천주께 빨리 성교 태평하게 해주심을 간절히 구해야 함”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보면 이 책을 저술 간행할 당시에는 신앙의 자유가 아직 주어지지 않았던 때임을 알 수 있다.

 

 

“성상경”의 내용

 

“성상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에 전후하여 나타나는 예루살렘의 입성이나 부활의 영광 등은 이 책 저자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반면에 저자는 “성상경을 가지고 묵상함은 예수의 모범을 따르고 그 명을 듣기를 원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수난 고통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천주교는 “예수의 고난 가운데 세워졌고, 성인들의 순교로 전해진” 고통의 종교임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본받아 사람들도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에게 가해지는 오만가지 고통을 승화시켜야 함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어진 어버이가 자식을 때리고 꾸짖는 것은 그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처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내리시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참아 받고 예수의 괴로움과 결합함이 가장 좋은 기도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교적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 원수에 대한 사랑이 “천주교와 다른 종교와의 다른 점”임을 깨우쳐 주며, 원수 사랑하는 일을 의무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성상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일상 생활을 바르게 해나갈 것을 말한다. 즉, 예수께서 식초와 쓸개를 드신 것을 묵상하며 음식과 음주, 흡연 등을 절제해야 하며, 해어진 홍포(紅布)를 입으심을 묵상하여 의복의 사치를 경계해야 함을 제시한다. 그리고 악인이 예수를 비웃었던 사실을 가지고 신도들은 “아래 있는 고단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며, 남에게 좋지 못한 것을 기꺼워하지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양심’을 거슬러 이익을 탐하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단순한 관념의 유희에 그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일상 생활을 변혁하는 힘이 되었던 것이다. 이 힘의 일부가 바로 “성상경”과 같은 예수의 고난에 대한 묵상을 통해 얻어질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순교와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삶, 즉 애주(愛主)하고 극기하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만일 예수를 위해 죽음을 원할진대 먼저 예수를 위하여 살기를 구할지니라……. 비록 치명은 아니하여도 네가 즐겨 갖가지 환난을 참아 받으면 이에 치명한 값이 있음이니라.”고 밝혀 주고 있다. 신도들에게 삶의 중요함을 설명하고 있는 이 말은 순교에만 지상의 가치를 두고 있던 박해기의 전형적 신앙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다. 한편, 이 책에서는 조그마한 악습 하나를 제대로 고치지 못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칠 수는 없는 것임을 말하면서 생활을 통한 윤리적 덕목들의 실천을 말한다.

 

 

맺음말

 

“성상경”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를 조선 신도들에게 제시해 주었다. 이는 하느님 천주를 창조자며 주재자로 생각해 오던 ‘형이상학적’ 신관(神觀)과는 차이가 나는 견해였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론적 신관의 한 형태가 고통의 신학을 통해 우연히도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성상경”에서 논하는 신관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동시에 논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론적 신관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책에서는 인간 예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 주고 있다. 그 예수는 하느님 아들이시고 우리와 신비체적으로 결합한 존재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괴로움을 받으셨으니 지체인 신도들은 그 괴로움을 피해서는 아니됨”을 여기에서는 확인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통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신학(神學)이 도달한 학문적 특성과는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 책은 우리 나라 신도들이 삼위 일체적 하느님에 관해 확고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은 19세기의 묵상서답게 인간의 개인적 죄악과 십자가의 무게를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약점을 분명히 갖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은 신도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그리고 삼위 일체적 하느님을 확실히 믿고 따를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역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경향잡지, 1993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52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