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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우리 교회사의 보배로운 기록 - 한국 천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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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33

[신앙 유산] 우리 교회사의 보배로운 기록 : 한국 천주교회사

 

 

머리글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할수록 그에 비례하여 역사에 대한 관심은 강화되어 갔다. 이 역사 인식에 터전하여 인류는 자신의 문화를 창조적으로 이끌게 되었고, 미래를 향한 그침 없는 전진을 시도하는 것이다. 특히 올곧은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지난날의 역사에 대한 인식은 소중할 수밖에 없다.

 

박해 시대를 살았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자신들의 선배가 제시해 준 신앙인으로서의 모범을 소중히 간직하고 전하려 했다. 신도들은 순교자와 증거자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삶과 믿음을 정련시키고자 했고, 이에 그들은 그 순교와 증거의 기록을 남겨 주었다.

 

조선에 나왔던 선교사들도 조선인 신도들의 불타는 믿음과 모든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는 그 용덕에 감탄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세계 교회를 위해 그것을 기록하여 남기고자 했다. 따라서 조선의 천주교회사에 대한 편찬은 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한국 천주교회사”(Histoire de l'Eglise de Coree)가 저술 간행되기에 이르렀다. 1874년 프랑스 파리의 빅토르 팔므(Victor Palme) 출판사에서 2권으로 간행된 이 책의 저자는 달레(Dallet, Charles, 1829~1878년)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지은이

 

“한국 천주교회사”의 저자는 달레이다. 이는 1874년에 간행된 이 책의 표지와 머리말 및 이 책의 간행에 즈음하여 보내 준 교황 비오 9세의 하서(賀序)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달레는 이 책의 간행을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 책의 집필에 최종적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일찍부터 성직자가 되고자 하여 고향인 랑그르 교구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다녔다.

 

그는 랑그르 대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선교사가 되고자 하여 1850년에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고 1852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그는 인도의 마이쑤르(Maissour) 지방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에 종사했다. 그러나 그는 선교지에서 간질성 질환을 앓게 되어 본국 프랑스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선교회 본부에 머물며 캐나다를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의 활동에 관한 사료를 수집했고 1872년에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는 다블뤼(Daveluy) 주교의 초고본 및 선교사의 서한 등의 정리 작업에 착수한 지 두 해 만에 이 책을 간행할 수 있었다.

 

달레 신부는 조선을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블뤼 주교의 초고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블뤼 주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845년 조선에 입국한 이후 1866년 병인 박해로 순교할 때까지 21년 간 조선의 선교사로 활동했던 분이다. 그는 1856년 이래 조선의 천주 교회사에 관한 자료 수집과 수집된 조선의 자료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로부터 한국 천주교회사의 저술을 위촉받았다. 그러나 그는 완벽한 교회사를 저술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꼈고, 유럽어로 된 사료 및 선교사들의 서한을 자유로이 볼 수 있는 본국에서 이 작업을 하는 편이 더 좋으리라 생각했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자세한 “비망기”(備忘記, Notes)를 작성하여 파리로 보냈다.

 

달레 신부는 이 비망기에 의존하여 “한국 천주교회사”를 편술했다. 다블뤼의 “비망기”가 없었다면 달레의 저술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달레는 다블뤼의 “비망기”를 가장 중요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한국 천주교회사”를 달레와 다블뤼의 공동 저작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짜임새

 

“한국 천주교회사”는 조선 교회에 순교의 전통을 잊지 않게 하려고 저술된 책이다. 또한 이 책의 간행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 근대화의 과정에서 기력이 쇠진해 가던 19세기 후반 프랑스 교회에 반성의 자료를 제공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또한 이 책은 조선에서 순교한 선교사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시복(諡福)과 시성(諡聖)을 준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간행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의 이러한 저술 목적과 관련하여 이 책의 편차가 마련되었다. 우선 이 책의 머리에는 서설(序說)로서 조선의 역사 · 지리 · 풍습 · 언어 및 문화 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는 조선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유럽인 독자들을 의식하여 집필된 것이었다. 이 ‘서설’은 19세기 말엽까지도 조선에 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入門書)의 구실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서설’은 오늘날 한국 문화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한국 천주교회사”의 본론은 교회 창설을 전후한 상황 묘사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선교사의 도움 없이 조선인 스스로의 힘에 의해 ‘기적적’으로 교회가 창설되어 나가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초기 교회의 박해 상황과 주문모(周文模, 1752~1801년), 유방제(劉方濟) 산부 등 중국인 선교사와 조선 신도들의 활동을 서술했다.

 

또한 이 책에서는 1831년 조선교구가 성립되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그 포교가 위임된 과정과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urguiere, 蘇, 1792~1835년) 주교의 사람됨과 그 동료 선교사들의 활동을 자세히 밝혀 주고 있다. 이에 이어서 1839년의 기해 박해 및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의 서품과 활동 그리고 순교를 논했다. 한편 1860년대 우리 나라의 사회상과 교회의 성장 및 1866년 병인 박해에 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 책에는 1871년에 일어난 신미 양요(辛未洋擾)까지 언급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우선 순교자들의 굳은 신앙과 굽힘 없는 용기를 자세히 서술해 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순교자들의 심문 과정과 그들의 신앙 고백에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했다. 또한 배교를 촉구하는 박해자의 잔혹함과 무죄한 신도들에 대한 처절한 고문을 묘사하고 있다. 이로써 ‘선(善)의 편에 선’ 신도 및 선교사들과 ‘악의 편에 선’ 관장(官長)들을 선명히 대비시켜 나가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영혼의 소중함과 내세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이 책의 저자는 육신의 나약함과 세속의 덧없음을 서술해 나감으로서 선악(善惡), 성속(聖俗), 영육(靈肉)의 이원론적 대립 구도를 서술하고자 했다.

 

한편 이 책을 지은이의 원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오늘의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개항 이전 19세기의 역사적 상황과 사람들의 생활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민중의 일원이었던 신도들의 생활과 사상을 통해 우리는 조선 후기 사회사(社會史) 내지는 사회 사상사(社會思想史)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마무리

 

이 책이 간행될 당시 프랑스의 역사학계는 근대 역사학의 단계로 접어들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이 책의 역사 연구 방법에는 문제가 없을 수 없다. 또한 이 책이 저술되던 당시 프랑스 신학계(神學界)를 지배하고 있던 성속 이원론적 사고 방법은 오늘의 신학 사조와 크게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들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묘사했던 당시의 사상들에 관해서는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프랑스인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한국 문화에 생소했고, 한국의 전통 문화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책의 저자는 선교사였기에 신앙을 보호하려는 호교론적 서술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이와 같은 약점들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박해 시대 우리 나라 천주교회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저서요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약점은 19세기 후반기 역사서에서 흔히 드러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책은 간행 직후부터 유럽 여러 나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 책은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으며, 일부는 유럽어로 꾸준히 옮겨져 갔다. 또한 이 책은 간행된 직후 중국어[漢文]로 번역되었다. “신록 고려주증”(新錄高麗主證)이란 제명으로 1879년에 번역된 이 책은 뒤늦게 1900년에 이르러서야 중국 사천 교구에서 간행되었다. 이 책의 일부는 일본어로 옮겨져 1876년에 간행되었다. 이 책이 한글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1885년경부터였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 책을 나누어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번역은 1906년에 간행된 “경향신문”의 부록인 “보감”(寶鑑)에 연재되었다. 그 후 이 책의 서설 부분이 1947년과 1966년에 각각 번역 간행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사”가 한글 역주본(譯註本)으로 완역된 때는 1979년이었다. 최석우(崔奭祐), 안응렬(安應烈) 역주로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된 이 책은 현재 판을 거듭하며 널리 읽히고 있다.

 

[경향잡지, 1993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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