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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교회사5: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한 교회의 소극적인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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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5 ㅣ No.377

한국 교회사 (5)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한 교회의 소극적인 태도

 

 

일본의 학정에 대한 울분에서 터진 전국적인 궐기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민족적인 열망은 3·1 운동을 기점으로 봇물 터지듯 번져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교회 당국은 신자들의 참여를 철저히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일부 용감한 가톨릭 신자들이 이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3·1 운동에 대한 교회의 외면

 

“1919월 3월 1일 오후, 군중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왔다. 2시 40분 젊은이들의 행렬이 남대문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대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그들의 소원은 독립이었다.” 당시의 서울교구장 뮈뗄 주교는 3·1 운동의 시작을 이렇게 그의 일기에 적어놓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연일 계속되고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는 한국 백성의 시위운동을 깊은 관심과 우려를 갖고 추적하였다. 3·1 운동을 지켜보며 우려를 나타낸 것은 물론 뮈뗄 주교만은 아니었다. 대구교구의 드망즈 주교도 그러했고 나아가서는 한국의 모든 선교사가 그러했을 것이다.

 

당시 한국 교회는 아직 프랑스 주교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한국 가톨릭이 이 시위운동에 연루되어 교회에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였고, 그래서 한국 신자들이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도록 사전에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 당국의 금지 조처가 엄했다 할지라도 일본의 학정에 대한 울분에서 터진 전국적인 궐기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민족적인 열망을, 한국의 모든 가톨릭으로 하여금 외면하게 하고 수수방관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일부 용감한 가톨릭 신자들이 이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하였으니 그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 당국이 가장 믿었던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학생들의 시위운동

 

3월 8일, 이날은 대구 장날이었다. 장날이 되면 으레 도처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그래서인지 3윌 5일 저녁 흥분을 금치 못한 신학생들이 신학교 마당에 모여 독립가를 불렀다. 이에 교장 신부는 주교에게 그의 온갖 만류에도 소용이 없었고, 따라서 그로 인해 성소를 잃게 될 학생들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고 또 시내에서 군중과 함께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신학생 한 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3월 23일 일요일, 이번에는 서울 용산의 신학생들이 거리로 뛰어나가 시위에 가담하였다. 그 경위인즉 이러하였다. 밤 9시경 신학생들이 막 잠자리에 들려고 했을 때 신학교 밖의 언덕 위에서 횃불을 든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동시에 맞은편 언덕으로부터 역시 횃불을 든 군중의 만세 소리가 메아리쳤다. 양편에서 들려오는 만세 소리에 신학생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창문을 열고 교외로 뛰어나가 같이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뮈뗄 주교는 이튿날 서둘러 신학교로 가서 일장 훈계를 하였다. 신학생들은 주교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건성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주교의 훈계가 끝나자 그들은 주교를 붙잡고 울며 또 발을 구르며 일본인에게 이렇듯 학대를 받고 있는 그들의 나라를 그대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하소연하였다. 그러나 주교는 다시금 진정을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신학교를 떠나라고 했다. 실제로 이미 신학교를 떠나려고 결심한 학생들도 없지 않았다.

 

교구장이 다녀간 후 신학교는 좀 진정되는 듯했으나 10여 명은 아직도 흥분 상태에 있었다. 3월 30일에 가서야 신학교는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징계 조처를 두려워하고 있었고, 결국 교구장은 그해에 예정되었던 서품식을 징계 조처의 일환으로 무기 연기하였다.

 

 

신자들의 시위 가담

 

시위운동에 가담한 것은 신학생들만은 아니었다. 일부 교회 학교나 본당에서도 가담하였고, 무엇보다도 도처에서 개별적으로 많은 신자들이 가담하였다.

 

교회 학교 학생들로서는 대구본당의 학생들이 시위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황해도 은율에서도 홍석종(洪錫宗)이란 소년이 만세 시위의 주동자로 붙잡혔고 또 거리에 독립만세 광고를 붙인 혐의로 2명의 신자 소년이 경찰서에서 신문을 받기도 하였다. 또 인천의 박문(博文) 학교에서는 시위운동에 전혀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공립학교에서 시위에 가담했다가 붙잡힌 학생 중에는 2명의 교우 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본당으로서는 은율과 안성 등이 시위에 가담했던 것이 확실한데, 특히 안성에서는 김중묵이란 본당 교우가 선두에 나서서 낮에는 만세를 부르고, 밤에는 등불 행렬로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한편 공베르(Gombert, 孔) 본당 신부는 일본 경찰에 쫓기는 주민들을 성당에 수용하여 보호하였다.

 

이밖에 개별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던 천주교인들도 적지 않았는데, 해주에서는 3월 10일 천주교 신자들이 천도교와 개신교 등 다른 종교 단체와 사전에 연락을 취하고, 같이 시위를 하였고, 강화에서는 3월 18일 장날을 기해 김용순(金龍順), 조기신(趙基信), 신태윤(申泰允) 등 천주교인이 주동이 되어 시장에 1만 명이 넘는 도민을 모아놓고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으며 3월 27일에는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廣州郡 東部面 望月里)의 구장인 김교영(金敎永)이란 교우가 주동이 되어 군중을 모아놓고 동부면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또한 수원의 장안리(長安面 長安里)에서는 김선문(金善文) 회장을 위시하여 안경덕(安敬德), 김여춘(金汝春), 김광옥(金光玉), 최주팔(崔周八) 등 천주교인 5명이 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순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들은 4월 15일의 유명한 제암리(堤岩里) 교회 학살 사건과 관련되어 붙잡히게 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당시 시위와 관련하여 붙잡혀 수감된 천주교 신자의 수는 일본측 기록에 나타나 있는 것만으로도 53명에 이르렀다.

 

 

시위운동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

 

당시 거족적으로 전개되었던 독립 시위 운동에 관해 인천의 드뇌(Deneux, 全) 신부는 매우 흥미 있는 관찰을 하였는데, 즉 그는 시위운동에 대한 그의 본당 신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첫째 부류는 비록 수도 적고 영향력도 적지만 독립을 위해서는 당장에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적극파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그 수가 제일 많은 둘째 부류는 가톨릭과 본당의 명예를 위해 최소한 몇 명이라도 참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고, 셋째는 무관심하거나 체념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드뇌 신부의 견해에 의한다면 개별적으로 선두에 나서서 시위운동에 참가함으로써 투옥된 사람들은 첫째 부류의 신자들이고, 거족적언 시위 운동을 좌시할 수 없다고 하여 시위에 가담한 신학생들이나 본당 교우들은 둘째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당시의 선교사들도 둘째 부류의 사람들이 염려했던 것처럼 후세에 가톨릭이 비난받게 될 것을 가장 염려하였던 것 같다. 실제로 그들은 가톨릭이 시위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여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또 그것이 가톨릭이 취해야 했던 당연한 입장으로 생각하면서도, 가톨릭이 애국심이 없다는 선전을 두려워하고 또 이로 인해 가톨릭이 복수를 당할 것이라는 소식에 몹시 불안해 하였던 것이다.

 

 

활발해진 교회의 독립운동 가담

 

선교사들의 생각이 이러하였다면 하물며 한국인 성직자나 평신도들의 생각은 어떠하였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은율본당의 윤례원(尹禮源) 신부를 중심으로 황해도의 일부 본당에서 뒤늦게나마 독립운동올 활발히 전개하려 한 움직임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오래전부터 독립운동을 하며 교우들에게 독립사상을 주입시켜 온 윤례원 신부는 3·1 운동이 끝난 후부터는 상해(上海)의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면서 임정(臨政)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받아 보고, 독립운동가 청년들과 자주 접촉을 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청년회를 조직하고, 동료 신부와 학교 선생들에게 독립운동의 참가를 권유하고, 적십자 회원을 모집하고, 군자금(軍資金)을 모금하는 등 독립운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윤 신부는 1919년 10월 말 임정에서 파견된 한 청년으로부터 5백 장의 권고서를 전해 받았는데, 그 권고서란 다름 아닌 얼마 전에 임정에서 발표한 “천주교 동포에게” 총궐기를 호소하는 포고문이었다. 이 포고문은 그해 11월에 의주(義州)본당 신부에게도 보내졌다.

 

당시 국내에서 활발히 진행되던 천주교측의 독립운동이 크게 작용한 때문이었던지 임정에서는 천주교 대표를 두기로 하고, 평양본당 신자였던 곽연성(郭然性, 요셉)을 그 대표로 임명하였다. 또한 열강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임정에서 파리 평화회의에 파견한 김규식(金奎植)을 단장으로 하는 한국사절단도 파리에 이르러 일찍이 한국의 선교사였던 빌렘(Wilhelm, 洪) 신부의 도움을 받았다. 또 임정에서는 안중근의 종제인 안정근(安定根)을 간도(間島)에 파견하여 그곳의 독립운동을 격려하게 하였다.

 

간도는 이미 합방 직후 역시 안중근의 종제인 안명근(安明根)에 의해 천주교측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곳이었다. 그는 거기서 의병을 모집하여 거사할 계획을 세운 후 그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붙잡혀 데라우찌(寺內) 총독 암살 미수 사건과 관련, 종신징역의 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가 경성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을 때 빌렘 신부는 총독부에 그의 사면을 건의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개전의 정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안명근에 이어 역시 같은 혐의로 체포된 신민회원(新民會員) 중에는 이기당(李基唐, ?名은 石大)이란 교우도 있었는데, 그는 평북의 용천(龍川) 사람으로 마침 비현(枇峴)에 본당을 세우려는 한국인 신부를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붙잡히게 되었다. 그는 1913년 석방된 후 서간도(西間島)의 무송현(撫松縣)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이와 같이 간도 지방은 이미 안명근, 이기당 등에 의해 독립운동의 기반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3·1 만세운동 때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선두에 나서게 되었다. 예컨대 용정(龍井)본당에서는 서울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3월 13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그날이 오자 정오의 성당 종소리를 출발 신호로, 김영학(金永學) 회장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그곳의 동포들과 같이 시위행렬에 나섰다. 시위운동은 그 다음 해에도 맹렬히 계속되었는데, 시위 군중 가운데는 천주교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의민단(義民團) 같은 독립군 단체를 조직하고 무력 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선교사들의 지나친 교회 보호

 

결국 3·1 운동은 교회의 참가를 저지하려는 교회 당국의 철저했던 용의주도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의 상당한 반응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교회 당국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미 신학생들의 궐기와 또한 그들의 민족적인 하소연에서 그러한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또 그로 인한 교회 안의 갈등도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친 현실주의로 말미암아 한국인의 민족적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적 과제에 교회가 동참하는 데 오히려 장애와 제약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아마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교회를 보호하여 발전을 보장하는 것을 교회의 당면 과제로 생각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한국인의 독립을 되찾으려는 갈망이 현실적으로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일본인의 무단정지가 확고부동한 것이었고, 또 국제적으로도 일본은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소위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에 적용될 리가 없었다. 이와 같은 현실주의는 무엇보다도 3·l 운동에 대해 교회로 하여금 지나지게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88년 5월호,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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