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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와 국채 보상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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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21 ㅣ No.369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와 국채 보상 운동

 

 

개발도상국과 채무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구 라운드’ 세계대회가 지난 10월 6-8일 대구 경북대학교에서 열렸다. 교황 성하께서도 격려문을 보내며 깊은 관심을 보이신 이 대회에는 국내외 100여 개 시민 · 사회 단체가 참여하였으며 대구대교구도 2000년 대희년의 참뜻을 기리고자 함께했다. 이러한 외채 상환 문제는 일찍이 90여 년 전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 우리 한민족의 국채 보상 운동을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구한말의 국채 보상 운동(國債報償運動)은 1896년 7월 독립협회 창립 때부터 이 운동에 참여하여 1898년 9월 독립협회 제4기 만민공동회의 민권투쟁기에는 재무부장급으로 적극 활동했던 열심한 천주교 신자인 서상돈 아우구스티노(1849-1913년)가 1907년 1월에 발의한, 일본에게 빚진 돈 1천 3백만 원을 우리 국민들이 3개월 간 담배를 끊어 빚을 갚고 경제적으로 자주 독립하자는 비폭력 경제 애국운동이다.

 

일제는 1904년 8월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시작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뒤에는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하였으며, 1906년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서는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였다.

 

일제는 그들의 식민지화 작업을 펴오면서, ‘시정 개선’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워 호도하며 1천 3백만 원의 경비를 차관 명목으로 한국에 부담시켰다. 결국 한국은 스스로 자기 돈을 투자하며 식민지의 터를 닦은 셈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국고로는 이 거액의 외채를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 외채를 갚지 못할 경우 우리 국토가 일제에 점령당할 게 분명하였다. 이렇게 국운이 절박한 가운데 이땅에서는 국권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전국 곳곳에서 일게 되었다.

 

한편 대구에서도 이러한 민족 자강 운동으로 1906년 1월 대구 광문사 문회(大邱 光文社 文會, 일명 대구 광문회)가 설립되어 신교육 · 구국운동을 추진하였는데, 당시 대구 천주교회의 열심한 신자이며 또한 거상(巨商)이었던 서상돈 아우구스티노와 정규옥 바오로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대구 광문사는 본래 신교육 계몽을 하는 데 필요한 교과서와 잡지, 신문, 교양서적 등을 발간, 보급하는 인쇄소였으며, 그 안에 경북 도내 각 군 유지 400-500명으로 문회(文會)를 두어 활동 방향을 결정하였다.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회의 특별 문회가 열렸다. 주요 안건은 문회의 명칭을 대동 광문회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주요 안건을 처리한 뒤 이 자리에서 부사장인 서상돈이 1천 3백만 원의 국채를 3개월 동안 금연하여 모은 돈으로 갚고 국권을 되찾자는 국채 보상 운동을 제안했다.

 

“지금 우리의 국채 1천 3백만 원은 대한(大韓)의 존망이 달린 일이라 할지니, 이를 갚으면 나라는 유지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 추세이라. 지금 국고로는 갚기가 어려운 형편인즉 장차 삼천리 강토는 우리 나라의 소유도, 우리 국민의 소유도 되지 못할 것이라. … 국채를 갚을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그다지 힘이 들지도 않고 재산을 축내지 않고서도 돈을 모으는 방도인 것이라. 2천만 동포가 석 달만 담배를 끊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만 대금을 모은다면 거의 1천 3백만 원이 될 것이니, 만약 모자란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씩 낼 수 있는 사람을 골라 출연시키면 될 일이라.”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회원들이 적극 찬동하여 2000원을 갹출했다. 그리고 20일 뒤인 1907년 2월 20일에는 대구 성밖 북후정에서 최초의 군민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자리에는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수백 원을 모금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김광제, 서상돈 등은 국채 보상 운동을 주도하는 단체로 대구 국채 담보회를 설립하여 사무소를 설치했다. 또한 1907년 2월 23일 대구 남일동 부인 7명이 패물 헌납 운동을 폈다. 이들 부인들은 “남정네가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국채 보상을 한다는데 내조의 의무가 있는 여자들도 국민된 의무로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문을 공포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운동의 취지가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 제국신문 · 만세보 · 경향신문 등 전국의 신문을 통하여 알려지자 서울 · 평양 · 부산 · 의주 등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고종 황제도 담배를 끊으며 이 운동에 동참하였으며, 조정 대신들도 금연을 결의하고 나섰다.

 

한편 천주교 선자들도 전국의 많은 성당과 공소를 중심으로 의연금을 모았는데, 특히 안중근 토마스 의사는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진남포에서 관서지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는 개인적으로 부인 김씨에게 국채 보상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가족들의 장신구를 모두 헌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부인은 주저없이 자기가 가진 보석과 패물을 모두 헌납하고 어머니와 가족들의 것도 헌납하도록 하였다.

 

안중근은 “국사는 공(公)이요, 가사는 사(私)이다. 지부장인 우리 가정이 솔선수범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을 지도할 수 없다.”며 가족을 모두 이 운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서 지방 사람들은 크게 감동하여 가정마다 앞을 다투어 국채 보상금을 헌납하였다.

 

이와 같이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범국민 운동으로 승화된 국채 보상 운동을 발의하고 전개한 주요 인물은 서상돈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신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상돈 아우구스티노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순교자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는 장사로 돈을 벌어 3만석꾼이 되었고, 1911년 조선교구를 분리하여 새 교구를 신설할 때 대구에 신설 교구를 설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결국 일제의 탄압과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방해로 국채 보상 운동은 끝을 맺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결코 물질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운동이 아니었다.

 

첫째,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흩어졌던 국민들의 힘을 한데 모으고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민족의 역량을 축적시켰다.

 

둘째, 대외적으로 한국인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좋은 가회가 되었다.

 

셋째, 국민들 스스로 근검 절약하여 나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넷째, 이를 시작으로 독립운동 등 애국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다섯째, 봉건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나아가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지금까지 쇄국으로 일관된 우리의 부족했던 점을 깨닫고 민족의 힘을 기르려면 세계 정세와 서구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함을 깨달았다.

 

90여 년 전의 국채 보상 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그 때의 실패를 거울삼아 신 국채 보상 운동을 시작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9년 11월호, 마백락 클레멘스(영남교회사연구소 부소장, 부산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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