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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가톨릭 신학교육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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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6 ㅣ No.366

한국 가톨릭 신학교육의 발자취

 

 

한국 가톨릭 신학교육은 교회사와 마찬가지로 고난과 좌절을 겪으면서 뿌리를 내려왔고, 복음의 확대와 더불어 그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실제로 우리의 신학교육이 이땅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신앙의 자유를 맞이한 뒤였지만, 한국 성직자들의 노력으로 안정 속에서 체계를 갖춘 것은 해방 이후였다. 그러므로 그 역사는 크게 셋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박해 기간 동안의 교육사로, 프랑스 선교사들의 노력에 의해 단절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이를 부활의 희망으로 엮어간 시기였고, 두 번째는 신앙의 자유를 맞이하면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다시 한번 신학교육이 부활된 때로부터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의 신학교육이 이루어지는 일제시대까지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해방 이후의 신학교육에서 교구 연합 신학교, 관구 신학교 시대를 거쳐 현재와 같이 교구 신학교 시대로 확대되는 시기이다.

 

 

성직자 영입에 힘쓴 고난의 밀사들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직후 신자들은 성직자의 중요성을 이해하면서 스스로 가성직자(假聖職者)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북경으로부터 성직자를 영입해 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국초 이래로 쇄국을 표방해 온 조선 땅에 이단으로 취급되는 천주교 성직자를 영입해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789년부터 1794년까지 조선교회의 지도층에서는 성직자를 영입하려고 여러 차례 북경으로 밀사를 파견해야만 하였다. 최초의 밀사 윤유일(바오로), 지황(사바), 황심(토마스) 등이 그 임무를 달게 받아 압록강을 넘나든 ‘고난의 밀사’들이었다. 이들 덕택으로 1794년 말에는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을 밟는 최초의 성직자가 되었는데, 북경의 구베아(알렉산데르) 주교가 그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한 이유는 조선인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로 주 신부가 사망하면서 조선교회는 목자를 잃은 불쌍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목자 없는 시기는 약 35년 동안 지속되었고, 밀사들은 다시 북경을 왕래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성 정하상(바오로)과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조신철(가롤로) 등이 이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교황에게까지 서한을 올려 영신적인 구원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도록 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조선 신자들의 이러한 열망은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위해 조선대목구(朝鮮代牧區) 곧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이어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그 전교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1835년 말 이래로 조선 땅을 밟게 되면서 곧바로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외방 전교회의 창립 정신 가운데 하나가 “선교사들은 파견된 곳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현지의 신자를 성직자로 양성하여 그곳의 교회를 하루빨리 현지인에게 넘겨준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835년 말에 입국한 최초의 프랑스 선교사 모방(베드로) 신부는 이듬해 초부터 여러 곳에 흩어져있던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장래가 촉망되는 소년들을 탐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을 차례차례 신학생으로 선발한 뒤, 그해 12월 3일에는 정하상, 조신철 등의 안내를 받아 중국으로 출발하도록 하였다.

 

 

박해와 성직자 양성 사업

 

이에 앞서 모방 신부는 신학생을 선발하고도 그들의 교육 때문에 고뇌에 빠져야만 하였다. 그의 번민은 “과연 이들을 어디로 보내야 합니까?”였다. 그러다가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임시로 ‘조선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3명의 신학생을 그리로 보내게 되었다.

 

1837년 6월 7일, 조선 신학생들이 마카오에 도착하면서 이국땅에서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양업과 김대건은 그해 말에 동료 최방제를 잃는 크나큰 슬픔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1839년 4월에는 마카오의 소요 사태 때문에 펼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여 수업을 계속해야만 하였다. 이때 그들이 머물던 곳은 마카오에서 떨어져 있는 도미니코회의 롤롬보이 농장이었다.

 

한편 1837년 말에 조선 땅을 밟은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라우렌시오) 주교는 국내에서 4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자신이 신학교육을 시키기 시작하였다. 그중에는 성 정하상과 이문우(요한)가 들어있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되고 있었고, 1839년에는 마침내 기해박해가 일어나 앵베르 주교의 신학생 양성사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최양업과 김대건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롤롬보이 농장에서였다.

 

그 후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경에 부제품을, 1845년 8월 17일과 1849년 4월 15일에 각각 사제로 서품됨으로써 조선 최초의 성직자들이 되었다. 그런 다음 김대건 신부는 곧바로 귀국하여 활동하다가 이듬해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최양업 신부는 1849년 말에 귀국하여 1861년 6월 15일까지 10년 6개월 동안 양떼를 보살피다가 문경 근처에서 선종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피의 순교자라면 최양업 신부는 가장 깊은 산중의 교우촌만을 찾아다닌 땀의 순교자였다.

 

그에 앞서 1854년 3월에는 조선 교회의 장상 매스트르(요셉) 신부가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 반도의 페낭(Pennang)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고, 이듬해 초에는 매스트르와 다블뤼(안토니오) 신부가 2곳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처럼 국내외에서 동시에 신학생을 양성하려던 것은 박해로 교육이 중단되는 것을 막으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중 ‘성 요셉 신학교’라 명명된 배론(충북 제천군 봉양면) 신학교는 조선에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로,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페낭 신학교 유학생은 그곳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1863년에 귀국하고 말았다.

 

배론 신학교는 3칸짜리 초가집으로, 푸르티에(요한) 교장 신부와 신학생들의 숙소가 성당과 교실을 겸할 정도로 환경이 매우 나빴다. 그럼에도 박해의 위험 때문에 신학교를 다른 곳으로 이전할 형편이 안되었다. 교사는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미카엘) 신부, 그리고 집주인 장주기(요셉) 등이었고, 학생수는 1863년에 10명까지 이르렀으며, 이듬해에는 삭발례(削髮禮)와 소품(小品)을 주는 최초의 서품식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2년 뒤, 조선교회는 박해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예수 성심 신학교의 설립과 이전

 

신학교육이 부활된 것은 187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한국 땅을 밟은 뒤였다. 로베르(바오로) 신부가 제6대 조선대목구장 리델(펠릭스) 주교에게서 신학교 교장으로 위임되어 강원도 이천의 고매골에서 1877년 11월경부터 2명의 신학생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이 신학생 양성 사업은 그 후 블랑(요한) 신부, 두세(가밀로) 신부로 계속 이어졌으나, 박해 때문에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녀야만 하였다.

 

이어 1882년 이후로 세 차례에 걸쳐 여러 명이 페낭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훗날 한국 땅에서 최초의 사제 수품식을 갖게 되는 강성삼(라우렌시오), 강도영(마르코), 정규하(아우구스티노)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는 1884년부터 언어와 풍토 때문에 고생하는 페낭 유학생들에게 귀국을 지시하였는데, 이때부터 다시 한국에 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여론에 따라 블랑 주교는 로베르 신부에게 신학교를 설립할 장소를 물색하도록 하였고, 그는 경기도의 궁벽한 산간 지역인 부엉골(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을 택하여 그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때까지도 박해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부엉골의 ‘예수 성심 신학교’가 마라발(요셉) 신부를 초대 교장으로 하여 1885년 10월 28일에 문을 열게 되었다. 이 부엉골 신학교는 소신학교격이었다.

 

부엉골 신학교의 교수는 마라발 교장 신부뿐이었고, 학생수도 페낭에서 귀국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두 7명에 지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궁벽한 데다가 시설도 좋지 않았으므로 미구에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하였다. 실제로 블랑 주교는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자마자 서울 인근에서 신학교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였으며, 1887년 3월에는 마침내 용산(원효로 4가)에 기와집이 딸린 부지를 매입하고 부엉골의 신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함으로써 1년 5개월 만에 부엉골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용산의 예수 성심 신학교는 바로 가톨릭 대학(현 성신 교정)의 전신으로, 이후 한국 사제 성소의 못자리(seminarium)가 되었다. 그 초대 교장은 리우빌(루치아노) 신부였고, 처음 학생수는 14명이었다. 이후 앞에서 말한 강성삼 등 3명이 1896년 4월 26일 사제로 서품됨으로써 예수 성심 신학교는 첫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페낭의 유학생들이 편입하면서 용산 신학교는 대 · 소신학교를 겸한 형태로 학제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1892년 6월에는 새 신학교 건물도 완공되었다. 당시 소신학교는 6년이었고, 그 졸업생들은 다시 대신학교 철학반 2년과 신학반 4년을 거쳐야만 하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철학반을 마친 학생들은 톤수라(tonsura)라고 불리는 삭발례를 받고 신학반 곧 성직에 입단하면서 수단을 입었는데, 이러한 제도는 부제품을 받은 뒤부터 성직에 들어가는 지금의 제도와 다른 점이었다. 또 당시에는 신학교의 교육 과정은 물론 일상생활도 매우 엄격하여 입학생 가운데 사제로 서품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만큼 눈물을 흘리며 보따리를 싸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1900년 기낭(베드로) 신부가 제4대 교장으로 임명되면서 용산 신학교는 안정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1939년에 휴양차 프랑스로 귀국하였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돌아오지 못할 때까지 40년 가까이 교장 신부로 재임하였으며, 신학생들이 그의 한국 이름 진보안(陳普安)을 빗대어 ‘진보 안돼’라고 부를 정도로 엄격주의자였다고 한다.

 

 

교구 · 관구 신학교로의 분리

 

비록 안정기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용산 신학교는 1901년 이후 학생수의 잦은 변동, 교수 신부의 부족 등으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장해야만 했다. 또 1911년에는 새로 입학생을 받아들이면서 학생수가 96명에 이르게 되자 새로 교사를 신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해에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고, 1914년 10월 3일에는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개교하면서 대구 출신 신학생들을 그곳으로 보내야만 하였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교수 신부가 부족하게 되면서 3년이나 기다린 입학생을 받을 수 없었으며, 이후 1917년까지 3년의 과도기를 거치게 되었다.

 

물론 과도기가 끝나고 새로 입학생들을 받은 뒤에도 신학교가 안고 있던 문제점이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교사(校舍)와 재정과 교수진의 부족, 교육 과정과 방법상의 문제점 등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대구 신학교에 이어 1921년 11월 1일에는 성 베네딕도회의 소신학교가 백동(현 혜화동) 수도원에서 문을 열게 되었다. 1920년에 원산대목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베네딕도회가 그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게 된 결과였다. 이후 백동 신학교는 1927년에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전된 뒤 ‘성 빌리브로도 신학교’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곳 신학생들은 사우어(보니파시오) 주교의 노력 덕택에 서울 · 대구 신학교보다 더 알찬 교육 과정을 이수할 수 있었다.

 

사실 용산 신학교에서 1928년에 대 · 소신학교를 분리한 이유는 앞서 말한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대신학교는 그대로 용산에 남아있고, 소신학교는 백동으로 옮겨져 대구의 소신학생들을 포함하는 연합 소신학교의 형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이 서울 · 대구의 대신학교를 정식대학으로 인가받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이 불씨는 결국 일제 말기에 이르러 두 대신학교의 폐쇄를 불러오게 되었으며, 신학생들은 덕원 신학교로 편입하여 수업을 계속해야만 했다.

 

그 후 서울 신학교는 1945년 2월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로 인가를 받아 개교한 뒤 대구의 신학생들을 받아들여 연합 대신학교의 형태로 운영될 수 있었지만, 대구 신학교는 영원히 폐교되고 말았다.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는 1947년에 성신대학으로 승격 인가되었다가 6 · 25 한국전쟁으로 피난 학교 시절을 겪은 다음 1959년 2월에 ‘가톨릭 대학’으로 개칭되었다.

 

대구의 신학생들은 1962년 4월 1일 광주에 ‘대건 신학교’가 개교하면서 다시 그곳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교는 광주와 서울의 두 관구 신학교로 나누어지게 되었으며, 1982년 3월 1일 대구 ‘선목 신학 대학’이 개교하면서 다시 세 개의 관구 신학교로 나누어졌다. 이 중에서 대건 신학교는 1965년에 대건 신학 대학으로, 1985년에 광주 가톨릭 대학으로 변경 인가되었고, 선목 신학교는 1984년에 대구 가톨릭 대학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후 한국의 신학교육은 1984년에 수원 가톨릭 대학교가 개교한 이래 부산 · 대전 · 인천교구의 가톨릭 대학교가 개교함으로써 교구 신학교의 형태로 변모해 가는 추세가 되었다. 물론 그것은 복음과 교구, 성소의 확대 과정과 짝한다는 점에서 신학교육이 발전해 가는 과정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반면에 일부에서는 이처럼 신학교가 확대되는 데 대해 교회법과는 상관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신학교육의 본질과 목적에 부응하는 길뿐이다.

 

[경향잡지, 1998년 5월호, 차기진 루가(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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