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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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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8 ㅣ No.365

[신앙 유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책들

 

 

머리글

 

한국교회사를 살펴볼 때 한국교회의 지적(知的) 특성과 그 발전과정에 대한 부분이 나는 늘 궁금했다. 물론 한국교회사의 초창기에 한문을 자유롭게 구사하던 양반 지식인들이 천주교에 대해서 보여주던 반응에 관해서는 몇몇 연구가 축적된 바도 있다. 이 기존의 연구에서는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나 부정적 반응의 정도를 잘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목숨을 걸고 천주교 신앙을 증거한 수많은 민초들의 지적 특성이나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인식의 정도에 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아니했다.

 

흔히 한국교회사는 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신앙의 열정이 서술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사는 순교에 대한 열정으로만 서술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거기에는 천주교의 가르침에 대한 지성적 판단과 심정적 동의가 같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사를 올바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의 지적 특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교회사의 지적 특성은 시기마다 우리의 선혈들이 남긴 여러 책자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자들은 한국인 스스로가 지은 저술일 수도 있고, 한문이나 다른 나라 말에서 옮겨놓은 책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책자이든지간에 거기에는 우리 선조들이 가지고 있던 지적 고민에 응답하여 영신적 즐거움을 주는 요소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는 그 동안 한국교회사에서 기억할 만한 여러 책자들을 검토해 보았다.

 

이 연재를 마무리하며 우리 교회사에서 교회서적이 발휘하던 구실이 무엇인지를 거듭 확인해 보고자 한다.

 

 

천주교 서적의 전래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전적(典籍)의 나라라 할 만큼 책을 소중히 여겼고 많은 책을 간직해 왔다. 이러한 문화전통에 따라서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외국에 가는 사신들은 그 나라의 신간서적을 부지런히 구입해 왔다. 그런데 당시의 중국에는 예수회 계통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선교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서 각종 서적들을 한문으로 간행했다. 이 책을 우리의 사신들은 구입해 왔고, 우리 민족은 이에 대한 검토와 비판 그리고 수용을 시도하게 되었다.

 

우리의 선조들이 한문으로 번역된 사학서적을 보았고, 특히 보유론(補儒論)의 견지에서 쓰여진 책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하나의 서적이 특정한 외국어로 번역되는 과정은 곧 두 문화 사이의 교류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학(西學)에 관한 책이 한문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서학의 사상을 한문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조명한 것이다. 또한 당시의 적지 아니한 책들이 보유론의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것은 이미 유교문화에 친숙하던 사람들한테 서학에 접근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17세기 초반부터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칠극”(七克) 같은 책자들이 들어와 읽혀질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천주교 신앙은 우리 나라에 좀더 손쉽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 한문 서학서에 대한 학습과 비판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은 이땅에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에도 천주교 서적을 중국으로부터 도입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서적의 전파단계

 

천주교 서적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몇 가지 단계를 설정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로는 1835년 조선에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의 단계를 우선 주목할 수 있다. 이때에 많은 한문 서학서가 전파되었고 한글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책들이 한글로 저술되기도 했다. 두 번째 단계로는 선교사들이 입국한 이후부터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1882년을 전후한 시기를 주목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한문 서학서가 계속해서 번역됨과 동시에 프랑스어로 쓰여진 서적의 일부도 번역되었다. 그리고 서적의 보급범위도 더욱 확산되어 갔다.

 

한편 천주교 서적이 전파되어 온 그 세 번째 단계로는 개항기를 주목할 수 있다. 이때에는 적지 않은 한문 교리서들이 새롭게 전파되어 왔다. 개항기 당시 한국교회에서 간행한 책자의 주류는 이 한문 천주교 서적이다. 아마도 당시 조선에 나와 있던 서양인 선교사들은 서양어에서 책자를 직접 번역하기보다는, 조선인 신도들을 시켜서 한문본 천주교 서적을 번역하는 데에 만족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들 선교사들이 가장 중요한 책무로 인식하던 것은, 신도들한테 직접 성사를 주고 그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었지 책자의 간행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 개항기에 이어서 우리는 식민지시대와 해방 이후의 현대사회를 살면서 새로운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한글 교리서의 등장

 

한국천주교회사의 전개과정에서 매우 눈길을 끄는 현상은 한글로 된 천주교 서적의 등장을 들 수 있다. 교회창설 당시 천주교의 지도층은 한문에 익숙한 양반 지배층이다. 만일 이들이 자신의 새로운 깨달음을 한글로 번역해 내지 않았다면 천주교 신앙은 몇몇 지식인의 신앙으로 그쳐버리고 그 역사적 역동성을 상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부터 천주교 신앙을 알고자 하던 우리의 민중들은 한문으로 된 천주교 서적을 번역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에 응답하여 대략 1787년경부터는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이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1787년이면 교회가 창설된 지 불과 3년 정도가 지난 다음이다. 이때 천주교 서적은 이미 서울 일원에서 뿐만 아니라 충청도 지방의 갚은 산골에서도 읽혀지고 있었다. 한글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전파력은 이다지도 빨랐다. 그리고 1801년의 박해 과정에서 살펴보면 당시에 압수된 서학서(西學書)는 모두 120종이다.  책들 가운데 83종이 한글로 변역된 책자였다. 이는 교회창설 당시의 교회에서 천주교 서적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 집중으로 노력을 전개한 결과였다.

 

이 한글 천주교 서적의 독자들은 한문을 모르는 일반 민초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글로 번역된 책이 있었기에 조선의 천주교는 민중의 심중으로 침투해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에서 한글 교회서적들은 천주교 선교의 방향을 결정지어 주었고, 천주교 신앙이 민중종교운동의 형태로 전파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것이 한글 교회서적들의 역사적 기능이다. 한편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나라 천주교의 선교를 생각할 때 한글을 만들어주신 세종대왕에게도 감사를 드리게 된다. 세종대왕은 어떠한 선교사와는 다른 측면에서 천주교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주었다고 생각된다.

 

 

책을 만든 사람들

 

박해시대 천주교 서적은 정약종(丁若鍾)이나 최창현(崔昌顯)을 비롯한 지식인 신도들이 저술하거나 번역해 나갔다. 또한 주문모(周文謨) 신부나 최양업(崔良業) 신부도 이와 같은 일을 하였다. 다블뤼 주교와 같은 선교사들도 이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우리 교회의 지성사적 전통에서 우뚝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 선앙의 선조들은 천주교 신앙의 정수에 접근할 수 있었고, 이 책들을 통해서 참다운 삶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들이 만든 책에서는 인간 존재의 존귀함과 인간 영혼의 고귀함을 서술함으로써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 책들은 새로운 신관(神觀)과 함께 새로운 인간관(人間觀)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조선 후기 봉건사회의 변혁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연결되었다. 이것이 당시 서학서적들이 발휘하던 역사적 기능이다.

 

한편 한 권의 책자가 독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의 노력이 모두어져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는 황석두(黃錫斗, 1813-1866년)를 들 수 있다. 19세가 중엽에 다블뤼 주교의 이름으로 간행된 대부분의 책자들은 황석두의 손길을 거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교회서적의 간행사업을 도왔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상의 전파에 미친 그의 공적에 대해서도 우리는 정당한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책의 인쇄에 여러 가지 제약이 있던 당시에는, 천주교 서적을 전문으로 필사하여 이를 신도들에게 돈을 받고 팔아서 복음을 전파함과 동시에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박해서대 송재기(宋再起, ?-1801년)나 최형(崔炯, 1814-1866년)과 같이 천주교 서적을 인쇄하여 배포하던 인쇄업자들을 기억하게 된다. 이들은 당시 발달한 목판 인쇄술로 천주교 서적의 대량보급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천주교 서적의 유통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1801년 박해 이전에도 서울에서는 천주교 서적이 인쇄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목판으로 인쇄된 천주교 서적은 비교적 저렴한 값으로 팔리게 되었다. 이로써 천주교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큰 경제적 부담 없이도 책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90년대까지는 책을 구입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세책집에서 천주교 서적을 빌려볼 수도 있었고, 몇몇 세책집은 천주교 서적의 대여를 통해서 많은 이득을 얻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렇게 책이 널리 전파되어 감과 함께 천주교 신앙도 가뭄 끝의 들불처럼 힘차게 번져가고 있었다. 이렇게 전파된 신앙을 오늘의 우리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맺음말

 

우리 나라 천주교 신앙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신도들이 읽고 있었던 교회서적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한문 서학서를 통해서 선교사의 도움이 없이 천주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한문으로 된 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직접 책을 저술하여 신도들에게 신앙의 길잡이로 삼게 했다. 지난날 간행된 이 한글 교회서적들은 현대의 교회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한글서적들은 우리 교회의 지성적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특정을 파악하는 데에는 반드시 분석해야 할 자료이다. 또한 이 책들은 한국교회가 당시 사회에서 담당하고 있던 기능을 이해하는 데에도 필요한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5년 6개월에 걸쳐 우리 교회사에서 주목할 수 있는 66책의 교회서적들을 해제하여 제시했다. 해제의 대상이 된 책자들은 거의가 박해시대와 개화기의 책자들로 주로 한글로 쓴 것들이다. 그러나 이번의 해제작업에서 모든 책들을 다 검토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검토된 책들은 당시 교회에 비교적 영향을 많이 준 책들이다. 이제 가까운 시간 안에 이를 정리하여 한권의 책자로 간행하고자 한다. 그리고 언제 적당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머지 책들도 해제해 보고 싶다.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이 글을 집필하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좋은 자료와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우리 교회사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듭 확인하였다. 그 동안 이 집필작업에 계속해서 성원을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마감시간을 넘기기 일쑤였던 이 글을 마다지 않은 경향잡지 편집부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경향잡지, 1995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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