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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초창기 신학교 교육의 특성 - 사성찰(私省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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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8 ㅣ No.362

[신앙 유산] 초창기 신학교 교육의 특성 : 사성찰(私省察)

 

 

머리말

 

성직자는 안수와 축성으로 교회를 통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이다. 이들을 양성하기 위하여 신학교가 세워졌다. 신학교의 기원은 대략 6세기에 이르러 주교좌성당 부설로 설치된 학교에 그 유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때에는 신학교육을 위한 정규 교과과정이 확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 후 종교개혁을 겪은 다음 16세기 중엽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신학교 교육체제를 쇄신했다. 이 쇄신의 과정에서 원칙적으로 각 교구별로 한 개의 신학교를 설립해서 운영하도록 했다. 그리고 신학교의 입학자격도 제한했고, 그 교육내용에 관해서도 체계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신학교 교육제도의 정비를 통해서 교회를 이끌 종교 엘리트들이 양성되었다.

 

우리 나라 교회도 성직자 양성을 위해서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규정된 내용을 준수해야 했다. 당시 우리 나라에는 조선교구 하나만이 설립되어 있었다. 이 조선교구에 신학교가 세워졌고, 이곳에서는 조선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조선인 성직자가 양성되었다. 성직자 양성과정에서는 지식교육 뿐만 아니라 영성교육도 매우 중요했다. 그리하여 조선교구에서 설립한 신학교에서도 영성교육을 위한 책자가 필요했다. 이러한 필요에 부응하여 저술되었거나 번역된 것이 바로 “사성찰”(私省察)이다.

 

 

초창기의 신학교육

 

우리 나라에서 신학교육이 시작된 때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성직자들이 입국한 이후이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중요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들의 손에 의해서 한국교회의 신학교육은 본격적으로 착수될 수 있었다. 그들은 19세기의 30년대에 신학생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파견한 바 있었고, 이와 병행해서 한문으로 작성된 각종 교리서적을 통해서 국내에서도 신학을 교육해 나갔다.

 

그 뒤 1855년에도 제천 배론에 신학교가 세워져서 신학교육을 진행시켜 나갔다. 이 신학교는 원래 조선교회의 주보였던 성 요셉의 이름을 따서 ‘성 요셉 신학교’라고 했다. 그러나 이 신학교는 1866년의 병인교난으로 인하여 문을 닫게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국내의 사정상 조선인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 페낭에 설치된 신학교로 보내어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개항 이후에는 국내에서 신학교육을 진행시킬 수 있는 여건이 점차 갖추어져 갔다. 그리하여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1887년 서울의 용산으로 옮겼다.

 

개항 이후 교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확실하게 전망할 수 있었다. 아직은 공식적으로 박해가 종료되지 아니했지만 천주교 신앙의 실천이 묵인되어 갔다. 이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교회는 1882년에는 서울 인현동에 인현서당(仁峴書堂)을 창설해서 교육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뒤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때는 1895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책의 겉모습

 

“사성찰”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학생을 위한 책자였다. 현재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 이 책은 제1권(14cm×20cm, 110張)과 제2권(15cm×21cm, 98張) 모두 두 권으로 되어 있다. 각 권은 다시 여러 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는 1장부터 32장까지 수록되어 있으며, 제2권에는 33장 이후부터 57장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성경과 교부들의 말과 성인들의 기록들이 인용되어 있다. 이러한 말을 인용할 때에는 보통 글씨보다 훨씬 크고 굵게 필사하여 본문의 다른 부분과 확연히 구별시켜 주고 있다. 이렇게 굵게 쓰여진 부분으로는 성경구절 외에도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329-389년)나 바실리오(330-379년)와 같은 교부들의 말과 베르나르도(1090-1153년)나 보나벤투라(1221-1274년)와 같은 교회학자들의 말 등을 들 수 있다.

 

이 책이 개항기 한국교회의 어느 인사가 저술한 것인지 아니면, 외국서적의 번역인지에 대해서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의 형식은 17세기 이래 중국교회에서 간행한 교회서적에 흔히 나타나는 서술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이 책의 각 장(章)은 초사(初辭), 계사(繼辭), 종사(終辭)로 되어있다. 초사는 각 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주제에 대한 문제제기 부분 내지는 서론적 서술로 되어있다. 계사는 초사에서 제시된 문제의식을 확대 발전시켜 구체적으로 이를 검토하고 결심을 유도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종사는 특정주제와 관련된 결심을 다짐하는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와 같은 형식을 이 책이 따르고 있음을 보면 아마도 이 책의 원본은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 교회서적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책의 본문을 검토해 보면 한문에서 번역한 흔적들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볼 때 이 책은 아마도 중국에서 중국인 신학생들의 교육용으로 간행했던 책을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원본을 좀더 추정해 보자면 아마도 파리외방전교회가 선교하던 사천성(四川省)에서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조선에 나왔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이미 사천성의 신학교재를 활용하여 조선인을 교육시켰던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필사본이 제작된 때는 1889년이었다. 이때는 용산에 신학교가 이전해 간 이후이지만 아직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던 때였다. 그리고 이 서적을 필요로 하는 신학생이 기십 명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책을 활판으로 간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이 책은 신학생들의 손에 의해서 필사되면서 신학생이라는 제한된 독자들에게만 읽혔을 것이다.

 

 

이 책의 짜임새

 

이 책에서는 모든 행동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항상 그리스도와 한가지로 행하기를 힘쓰며, 우리를 가르치신 표양대로 하였느냐?”고 항상 스스로 물어야 함을 말한다. 또한 이 책에서는 예수 성심에 대한 ‘불같은 사랑’을 강조했다. 이는 19세기 우리 나라 교회에서 가장 성행하던 신심을 반영한 것이며, 또한 이는 ‘예수성심신학교’의 학생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될 신심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제1장부터 8장까지는 신학교의 입학동기와 목적을 검토하고 신학교 생활에 있어서 규칙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개항기 당시의 신학교 생활과 신학교육의 방법 그리고 당시 신학교육의 지향점까지도 판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 책에 나타난 신학교 생활은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기보다는 규칙의 피동적 준수를 더욱 강조한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에 이어서 이 책에서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음식을 취하는 등의 ‘평상 행위’에 근신하여 잘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9-14장, 56-57장). 그리고 묵상신공은 모든 덕행이 근본이 되는 것임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날 올리브 동산에서 묵상하셨던 모범을 따르도록 강조하고 있다(15-24장). 그리고 성찰과 고해성사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신학생들은 영신지도자를 선정해서 그 지도에 충실히 따라야 함을 논하고 있다(25-36장).

 

신학생의 생활에 있어서 미사참례와 영성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이와 관련된 양심성찰과 새로운 결심을 이끌어주고 있다(37-45장). 또한 성서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방법을 제시한다. 이어서 신학교 생활에서 일반 공부가 중요함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47-51장). 공부를 하는 목적은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사제가 되기 위함으로 규정지었다.

 

 

맺음말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구속사업을 영속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다. 그리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구속사(救贖史)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하셨다. 지난날 교회에선 구속사 전개에 이바지할 가장 중요한 존재로 성직자를 들었다. 성직자들은 하늘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특별히 부름받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에게는 특별한 덕목이 요청되었다. 그들은 세속적 지식과 함께 그리스도교적 영성으로 무장해야 할 존재였다. 세상의 성직자들이 갖추어야 할 이러한 특성은 신학교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생을 위한 신학교에서는 영성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 생활 전체를 당시 신학에서 추구하는 목적에 알맞도록 성화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를 담고 있는 규칙서 내지는 양심성찰서가 “사성찰”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의 규칙서를 통해서 신학생의 생활 모두를 이해할 수는 없다. 당시 신학생들이 모든 규칙을 철저히 다 준수한 것만은 아니고, 규칙서에 규정된 내용대로 살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규칙서 내지는 양심성찰서를 통해서 당시의 신학생들이 연마받았던 교육이나 신앙생활의 일단을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자료가 엉성한 한국교회 신학교육사의 초창기를 복원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5년 9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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