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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선교를 위한 열망 - 유 신부 군난사기(柳神父 窘難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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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6 ㅣ No.360

[신앙 유산] 선교를 위한 열망 : 유 신부 군난사기

 

 

머리글

 

한국의 역사는 1876년 개항을 전후하여 큰 변화의 금을 긋는다. 개항 이후 한국은 국제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최말단에 편입되어야 했고, 제국주의 열강으로부터 침략을 강요당하였다. 또한 동시에 한국은 변화하는 사회정세에 올바로 적응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국내의 각종 정책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전통적인 박해정책도 재검토되었다. 물론 개항 직후 바로 천주교 박해정책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공인되지도 못했으며,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처우 방안이 새롭게 마련되지도 않았다.

 

당시 우리 나라 천주교회는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를 겪은 이래 선교활동이 거의 중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1876년부터 다시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1880년에는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1855-1893년) 신부가 입국했다. 그는 황해도 장연지방에 머물면서 선교를 했다. “유 신부 군난사기”(柳神父 窘難史記)라는 이 자료의 제목을 풀어보면 ‘유 신부가 당한 박해에 대한 역사기록’이라는 말이 된다. 이 제목에서처럼 이 자료는 리우빌 신부가 조선에 입국을 시도하는 과정에서부터 입국 뒤 체포되어 서울로 떠나기까지 전기간에 걸친 행적을 서술하고 있다. 이 자료의 원본은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순교자와 증거자” 안에도 이 자료가 현대역으로 번역 수록되어 있다.

 

병인박해 직후부터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한 예를 들면 박해를 피해서 중국으로 탈출했던 칼레(Calais, 姜, 1833-1884) 신부를 들 수 있다. 칼레 선부는 순교를 각오하고 조선에 재입국하려 하였지만 불가능했다. 그는 오랜 피신생활 과정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프랑스 본국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동료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성공적인 선교를 할 수 있도록 평생 동안 기도를 드리려고 1869년 트라피스트회의 엄격한 수도생활을 자원했다. 칼레 이외에 리델(Ridel, 李福明, 1830-1884) 신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만주의 차쿠에서 조선에 입국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1876년이 되어 조선은 일본과 근대적 조약을 맺었다. 이 소식은 조선의 입국을 갈망하는 선교사들한테도 전해졌다. 이 조약으로 일본인은 조선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거나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선교사들도 조선에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신의 모국 프랑스와 조선이 정식으로 조약을 맺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선교사들은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들떠있었다. 그들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살던 서양인답게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신앙을 전파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병자조약이 체결된 1876년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그 다음해에는 새롭게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리델 주교를 비롯한 두 명의 신부가 잠입을 감행했다. 1878년 리델 주교는 불행히도 관원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처한 국제적 상황은 선교사를 죽이던 몇 년 전과는 판이했다. 리델 주교는 다섯 달의 옥살이 끝에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이도 또한 처음 있는 일이다. 1879년 드게트 신부도 공주에서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렇지만 체포를 모면한 선교사들은 비밀리에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이끌고 있었다. 새로운 선교사들도 육속하여 조선땅을 밟았다. 1880년 조선에 잠입한 리우빌 신부와 뮈텔 신부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 후 리우빌 신부는 체포되었지만 추방되지 않고 방면되어 조선에서 계속 선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리우빌 신부의 입국과 선교

 

리우빌 신부는 1855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1874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78년 사제가 되어 곧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만주의 요동지방에 있던 차쿠에서 2년 동안 머물며 조선에 입국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유 신부 군난사기”는 바로 이 대목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라 리우빌 신부의 입국경위와 체포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1880년 4월초 뮈텔 신부와 함께 중국 배를 세내어 조선을 향해 요동반도를 떠났다. 그들은 얼마 아니 가서 조선 땅인 초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들은 일기가 불순하여 조선의 신도들과 약정한 날짜가 지나서야 약속지점인 백령도에 이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조선인 영접선(迎接船)을 만날 수 없었고 요동으로 회항해야 했다.

 

리우빌 신부의 입국이 실패한 직후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는 권치문(權致文, 타대오)을 선교사들이 대기하고 있던 차쿠로 파견했다. 권치문은 황해도 일대의 해로와 육로에 비교적 능숙했던 인물로 생각된다. 이로 미루어보면 블랑 주교는 선교사들의 입국경로로 황해도 지역을 주목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 지역출신인 권치문을 안내인으로 파견한 듯하다. 사실 이들 선교사가 상륙하려던 목적지는 황해도 장연(長淵) 지방의 교우촌이다. 블랑 주교는 귀환하는 배편에 조선인 신학생 세 사람을 차쿠로 보내고자 하여 이들은 이곳에서 대기하게 했다.

 

권치문은 그해 9월경에 차쿠에 숨어들었다. 그리고 선교사 일행과 함께 9월 19일 출항했다. 이번 항차(沆次)에서도 그들은 태풍을 만나서 시월 초아흐렛날에야 겨우 장연 앞바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은 권치문의 노력으로 ‘갈울’이라는 장연 점촌(店村)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 마을에 숨어들었다. 돌아가는 배편으로 이 마을에 와서 중국입국을 기다리던 신학생 최 루가, 황 베드로, 박 바오로 세 사람이 차쿠를 향해서 떠날 수 있었다. 이곳에서 리우빌 신부와 뮈텔 신부는 20일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리우빌 신부는 갈울에서 20여 리 떨어져 있는 ‘극락’이라는 점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황해도 풍천(豊川)과 은률(殷票), 장연과 안악(安岳) 등 네 고을의 사목을 맡아보았다.

 

이때 해주에 있는 황해도 감영의 포교들은 장연 극락에 화적패거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마을을 덮쳤다. 때는 1881년 음력 2월 19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서 화적을 잡지는 못했지만 서양 선교사 리우빌 신부를 체포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감영에 보고했다. 아마도 감영에서는 중앙정부와도 의논했을 것이다. 그 결과 감영에서는 “양인과 교인을 침범하지 말고 빨리 돌아오라.”고 포교들한테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리우빌 신부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포교들의 침탈을 피하기 위해서 리우빌 신부는 그해 3월 6일 서울에 옮겨가 있던 뮈텔 신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 신부 군난사기”는 여기에서 끝을 맺고 있다.

 

 

남은 말

 

리우빌 신부는 1881년 가을 이후 6년 동안 전라도 지방에서 전교하였다. 그 후 그는 용산에 새롭게 설립된 예수성심신학교에서 신학생 양성에 주력했다. 그는 1893년 4월 26일 신학교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유 신부 군난사기”는 리우빌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초창기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전라도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의 사실이나 신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한 사실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자료의 저자와 저작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로는 리우빌 신부 자신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상당히 적다. 왜냐하면 이 자료에서는 양력이 아닌 음력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매우 능숙하게 우리말을 구사하며 멋진 문장을 엮어가고 있다. 이렇듯 이 자료는 선교사인 리우빌이 흉내내가 어려운 글솜씨로 저술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자료의 저자는 누구인가? 그는 아마도 리우빌 신부를 조선에 인도한 권치문이거나, 권치문으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자세히 전해들은 그 주변인물인 것이다. 왜냐하면 리우빌 신부가 입국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 책의 저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조선으로 향하는 항해 중의 선상잔치를 서술하고 있다. 이때 중국인 선원들은 만두를 셀 수 없이 많이 먹었지만 권치문은 스물여섯 개를 먹었다고 했다. 반면에 뮈텔 신부는 열여섯 개를 먹고 리우빌 신부는 여섯 개를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잔치에 참석한 사람이 아니면 이러한 사실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은 리우빌 신부의 장연생활만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이 글이 리우빌 신부가 서울로 이주한 직후에 지어진 까닭이리라 생각된다.

 

이 자료는 개항기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수를 위해서 노력하는 선교사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천주교 신앙이 묵인되어 나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소중한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5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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