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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개항기 한국교회의 역사를 엮는 이들 - 전라도 전교약기(全羅道傳敎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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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358

[신앙 유산] 개항기 한국교회의 역사를 엮는 이들 : 전라도 전교약기(全羅道傳敎略記)

 

 

머리글

 

“전라도 전교약기”를 지은 박제원(朴齊元, 1853~1935년)은 강화도령 철종(哲宗) 임금이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해, 경상도 거창군 적하면 개화동에서 출생했다. 그가 태어나서 성장하던 당시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때였다. 1876년 개항이 되어 조선의 역사는 바뀌어가고 있었으나 당시 사회에서는 개항의 여파로 인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박제원이 태어나서 세례를 받고 입교하기까지의 시대배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항 직후 영남지방에서는 이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이만손(李晩孫)을 비롯한 양반들이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疎)를 올리어 천주교 신앙과 개화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1881. 2. 26). 이 이후 척사(斥邪) 상소가 이어졌고, 이와 같은 저항에 부딪힌 정부 당국에서는 이 척사 상소들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는 임시방편책을 쓰기도 했다(1881. 5. 15). 영남지방의 양반사회에 팽배해 있었던 이러한 분위기 아래에서 1888년 거제도에서는 윤봉문(尹鳳文)이 순교하기까지 했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정책은 당분간 계속하여 이어졌다.

 

물론 1882년 서울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기 시작했지만 이 자유의 여파가 영남지방의 궁벽한 산골 개화동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는 점차 확대되어 갔고 1895년 이후 신앙의 자유가 공인되었고, 교회의 활동도 이에 비례하여 활발해져 갔다. 선교사를 도와서 교회일을 돌볼 수 있는 한국인 신도들의 역할도 증대되어 갔다.

 

 

지은이는 누구인가?

 

박제원이 살고 있던 개화동에도 개항 이후의 흉흉한 사회상이 전해졌고, 그곳의 사람들까지도 난리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피난의 방책을 찾게 되었다. 23세의 청년으로 성장한 박제원도 이러한 사회상에 둔감할 수는 없었다. 그도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피난을 생각했다. 박제원은 피난의 방책을 숙고하여 이에 관해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가 살던 개화동 마을에는 어느 때부터인지 서울에서 내려온 박중현이란 인물이 있었다. 박중현(1832~1925년)은 옹기를 구어 내다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양반들의 일상 교양이었던 보학(譜學)에도 남다른 소양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픈 이를 만날 때는 진단과 처방에도 특출한 재능을 드러냈다.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한푼도 남김없이 시혜를 하고 빈털터리로 들어오기도 하는 그를 사람들은 이인(異人)이나 은사(隱士)로 이해했다.

 

궁벽한 시골에 살던 박제원은 자신의 피난방책을 의논하기 위한 상대자로 이와 같은 박중현을 택했다. 박제원의 상담에 응한 박중현은 박제원에게 노정기(路程記) 하나를 적어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에 박제원은 그 노정기에 적힌 길 안내를 따라 험산준령과 크고 작은 물을 건너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박중현(안드레아)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경상도 땅으로 숨어든 사람이었다. 박중현은 개항 이후 정세가 변화하자 신앙생활을 더욱 잘 실천하기 위해서 전라도의 널티공소에 머물고 있었고, 박제원에게 이곳까지의 길을 알려준 것이었다.

 

박제원은 이곳 널티공소에서 교리를 배워 조 요한(Josse)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때는 1885년 성지주일이었다. 그는 영세 입교한 그해 7월 이후 35년에 걸쳐서 전라도 지방에서 활동하던 아홉 분의 선교사들을 도와서 복사로 활동했다. 수년 간은 대구교회의 명도회 강사로 선임되어 전라도 지역을 떠나 지내기도 했지만, 그는 주로 전라도에서 활동하면서 이 지역의 사건을 목격했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68세가 되던 1922년경에 시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그는 안맹(眼盲)한 뒤에는 마음의 눈을 더욱 밝혀서 신앙을 다져나갔다. 그리고 78세가 되던 해에는 ‘소경자탄가’를 비롯하여 ‘통회사’ ‘사말(四末) 추론가’ 등과 같은 천주가사를 구술하여 이를 필기시켰다. 그는 이때 “전라도 전교약기”도 구술하였다. 안맹한 그를 방문한 주지용(朱在用, 1894~1975년)은 그에게 개화기 전라도 교회의 역사를 구술해 주기를 부탁했고, 이 구술을 기록하는 작업을 동행했던 김 미카엘에게 위촉했다.

 

그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지만, 장남을 자신의 생전에 잃고 전라도 부안에 사는 장손의 집에 의탁하여 안맹한 만년을 보내다 1935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였다.

 

 

이 책에 실린 내용

 

전라도 선교사들의 복사였던 박제원이 자신의 활동에 대한 회고를 남긴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첫부분에서는 그 자신의 생애에 관한 일들을 서술하고 있다. 즉 그의 출생과 성장 그리고 청소년기의 생활을 먼저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박중현을 만나서 영세하고 전라도로 이주하여 회장직을 맡아 활동한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가 복사로 임명된 뒤 선교사들을 도와서 교회활동에 참여하던 당시의 기억을 정리하고 있다. 그는 조스 신부를 비롯하여 모두 아홉 명의 선교사의 복사직을 충실히 수행하며 전라도 지방 전교에 진력했다. 그는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한 자신의 회고를 이 부분에서 정리하고 있다. 이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개항기 천주교회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세 번째 부분에서는 동학농민전쟁과 현지 교회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동학농민전쟁의 주요 무대가 전라도였다. 그는 전쟁의 한가운데 놓여있던 전라도 지방 선교사의 복사이며, 신도들의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러한 자신의 관찰과 체험을 기초로 하여 농민전쟁의 진행과정에서 빚어진 교회와 동학의 관계에 대해 흥미있는 내용들을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전라도 각처의 교회 설립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그는 19세기의 90년대에 설립된 전라도 지방 여러 성당의 초창기 사적들에 관한 기억을 되살려 들려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는 고산 되재성당, 전주의 전동성당, 수류와 나바위의 유서깊은 교회들이 설립된 과정이 한 장의 기록화처럼 펼쳐져 제시되고 있다.

 

이리하여 그의 회고담을 기록한 “전라도 전교약기”는 1890년대를 전후한 시기 호남지방의 교회사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와 교회에 관한 여러 가지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적잖은 도움을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서 1892년 이후 천주교 신앙이 지방의 관헌들한테 보호받기 시작했음과 1892년 선교사들이 수단을 착용하고 선교할 수 있을 정도로 신앙의 자유가 신장되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전주에 웅거하고 있던 전봉준(全琫準, 1854~1895년)이 접사(接使)를 파송하여 보두네와 비에모 신부를 안전한 장소로 호송해 주었던 사실도 알 수 있게 된다.

 

 

남은 말

 

박제원이 남긴 글을 보면 그는 교리에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교리지식을 높게 평가하여 당시 대구교구에서는 그를 교구청이 있는 대구의 명도회 강사로 초빙하기도 했다. 그가 사용한 문투나 그의 행적을 살펴볼 때 그는 한문에도 능숙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선교사들로부터 라틴어도 배워서 알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학식을 가진 그는 당시의 사회에서 지식인 반열에 설 수 있었던 인물이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이들 가운데는 식민지 교육기관에서 자신의 자녀들이 글공부를 하는 것을 엄격히 막은 인물도 있었다. 만해 한용운과 같은 이가 이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들의 이같은 행위는 일제의 지배에 대해 철저히 부정하는 방법이었다.

 

경우가 약간 다르지만 우리 교회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바로 박제원의 경우이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했고, 당시 교회의 가르침대로 이 세상을 잠세(暫世)로 파악했다. 사람이 안주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 몇몇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의 공부를 무가치한 것으로 보았고, 자식들에게는 세속의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그의 후손 가운데 몇몇은 이와 같은 사실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다.

 

이러한 일화는 그가 교회의 가르침에 얼마나 고지식할 정도로 충실하고자 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는 교회의 사람으로 살았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자신의 전생애를 투신했다. 그리고 노년에 불행히도 눈이 먼 이후에는 자신의 기억을 살려서 교회의 역사를 엮어나갔다. 그는 교회의 역사에 참여했던 인물로서 이를 엮어나가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렇게 엮어진 책이 “전라도 전교약기”다.

 

[경향잡지, 1995년 5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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