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신앙 유산: 박해시대의 믿음과 삶 - 최양업 신부 일가의 전기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356

[신앙유산] 박해시대의 믿음과 삶 : 최양업 신부 일가의 전기

 

 

머리말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살림살이와 믿음살이가 있다. 살림살이라 하면 각자가 땀 흘려 의식주를 마련하는 일을 으뜸으로 삼는다. 그리고 믿음살이라 한다면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믿고 따르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 믿음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는 일이다. 살림살이에는 믿음이 스며들게 마련이며, 믿음살이도 살림을 통해서 확인된다. 살림과 믿음은 둘이 아니라 동전의 앞뒤처럼 하나로 엮어져 있다.

 

이렇듯 신앙과 생활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므로 한 시대의 신앙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생활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한국천주교회사에서도 박해시대의 신앙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사회전기(社會傳記)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 전기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그 신앙이 가지고 있던 특성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신앙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신앙을 통해서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좀더 명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여 년 동안 박해를 겪는 과정에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적지 아니한 믿음과 삶의 흔적을 오늘의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이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그 동안 상당 부분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살았던 그 소중한 삶에 대해서는 구체적 연구가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면서 박해시대를 산 신도들의 삶을 파헤쳐보기 위하여 최양업 신부 일가의 전기를 주목하게 된다.

 

‘최양업 신부 일가의 전기’는 모두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전기는 우선 조선교회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년) 신부의 ‘이력서’와, 최양업의 넷째 제수(弟嫂)인 송 아가다의 ‘이력서’ 그리고 최 신부의 셋째 동생인 최우정(崔禹鼎, 바실리오)의 ‘이력서’를 말한다.

 

 

‘이력서’를 쓴 사람

 

오늘날 우리들은 이력서라 하면 어디에 취직이라도 하기 위해 자신의 학력과 경력들을 몇 줄로 줄여서 적어내는 멋없기 짝이 없는 일종의 서류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이력서는 몇 줄의 토막글로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이력서(履歷書)’는 글자 그대로 ‘자신이 걸어온 과정을 기록한 것’이므로, 오늘날의 개념과는 달리 엄연한 전기의 형태를 갖춘 글들이다.

 

이 ‘이력서’를 쓴 최상종(崔相鍾 빈첸시오)은 최우정 바실리오와 송 막달레나 사이의 2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나, 그는 대략 개항 전후에 태어나서 해방 이후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부친 최 바실리오는 박해의 와중에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최상종이 어렸을 때는 충주 축실에서 산농(山農 : 火田)을 하며 살았다.

 

최상종은 이때 동네의 찰방집에 다니면서 한문을 공부했다. 그 뒤 그는 개항기 한때 서울교구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인 ‘종현서당(鍾峴書堂)’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그가 종현서당에 다닐 때 학생수가 42명이었다는 기록을 참조해 보면 그는 1880년대 말에 서울에 올라와 새로 세워진 이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그는 당시 교회의 수준에서는 상당한 지식을 지닌 사람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종현서당을 그만둔 다음 경기도 가평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충주 땅에서 계속 살고 있던 자신의 가족들을 돌보았다. 그 후 그의 가족은 모두 강원도 풍수원으로 옮겨서 그곳에서 몇 십년을 지냈다. 그가 자신의 가족사를 정리한 곳도 바로 이곳 풍수원에서였다. 풍수원 깊은 산골에서 최 신부 일가의 기록은 조용히 기록되었다. 이제 그 기록은 오늘의 우리에게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력서’에 담긴 내용

 

최상종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여 부친인 최 바실리오가 어떻게 살았고,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순교했는지를 평이한 우리 글로 서술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쓰여진 글이 1939년에 작성된 “최 바시리오 이력서”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숙모인 송 아가다(1838-1930년)가 박해를 무릅쓰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전하려 했다. 이리하여 “송 아가다 이력서”는 1927년부터 1933년 사이에 걸쳐서 작성되었다. 그리고 그는 집안의 자랑이며 중심이고, 자신에게도 커다란 자부심을 준 백부(伯父)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를 정리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최 신부 이력서”를 간략히나마 제시해 주었다.

 

이 ‘이력서’들이 최양업 신부 일가의 전기들이다. 이 전기들 가운데 “최 바시리오 이력서”는 자신의 부친으로부터 들은 집안 내력과 자신이 직접 목격한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송 아가다 이력서”도 기록자 자신의 숙모였던 아가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 신부 이력서”는 그 분량도 매우 간략하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서술된 최양업 신부 관계의 기록을 주로 참조한 듯하다.

 

우리는 이들의 전기를 통해서 박해시대 신도들의 삶이 드러내는 슬프고도 장한 비장미(悲壯美)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의 옛날 이야기는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살았다.”라는 말로 끝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유독 이땅의 천주학장이들은 세상에서 그 ‘해피 엔드’을 거부했다. 그들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이승에서 오래오래 잘살기보다는 언제나 저승사자를 맞을 준비를 해야 했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어야 했다.

 

 

박해시대의 삶

 

우리는 박해시대를 산 신도들의 신고에 찬 삶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 박해시대 신도들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일종의 신분강등을 강요당했다. 그들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 때문에 천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비록 자신의 신분이 양반이었다 하더라도 천주교를 믿으면 그들은 더 이상 선비의 반열에 들 수 없었다. 이러한 사례를 우리는 1799년에 순교한 배관겸의 아들 배정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부친은 지방의 유력자였지만 그는 당시 천직(賤職)으로 취급되던 뱃사공이나 목공일을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유지했다.

 

또 박해시대의 어느 신도는 평화롭게 농사를 짓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나 유리걸식을 하다가 광대패에 섞여 다니기도 했고, 깊은 산속 옹기점에 들어가 옹기를 굽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명하는 바를 성실히 실천하며 살고 있었다.

 

이렇듯 신앙의 선조들은 자신의 안정된 생활이나 신분적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새롭게 터득한 믿음의 길을 걸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신도들의 삶을 우리 교회사의 도처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최양업 신부 일가의 ‘이력서’를 통해서도 순교에 이르는 신앙과 함께 박해시대의 적나라한 삶과 만나게 된다.

 

이 자료에서는 박해로 말미암아 나이를 훨씬 걸먹은 최양업 신부의 열두 살 난 어린 동생 야고보의 애절한 삶을 살필 수 있다. 야고보는 소년가장이 되어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했다. 그는 어느새 어머니의 목을 칠 희광이에게 걸립(乞粒)한 푼전을 전하며 단칼에 베어 주기를 요청하는 영악한 소년으로 자라야 했다. 또 우리는 박해시대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이 자료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맺음말

 

박해시대의 신도들이 이러한 삶을 스스로 견지했던 까닭은 봉건(封建)에 찌들린 낡은 가르침의 무의미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구원이 이 세상에만 있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에서 완성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러한 생각에서 그들은 세상의 것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상대화하고, 자신에게 강요되는 신고의 삶을 감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삶을 통해서 그 믿음을 확인할 수 있기에 그들의 죽음과 함께 그 삶을 더욱 조명해 보아야 한다.

 

역사를 창조적으로 이끌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시기가 격동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완고한 기성체제가 자신에게 가하는 핍박을 참아 견디어나가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포기해야 했던 이들이 그 역사의 선구자였다.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도들도 격동기를 살면서 자신의 삶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의미를 추구해 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늘나라의 입문에 부끄럽지 않을 이력서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엮어가고 있었다. 그 대표적 이력서가 최양업 신부 일가의 것이다. 이 이력서는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간행한 “순교자와 증거자들” 안에 수록되어 있다.

 

[경향잡지, 1995년 3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 사학과 교수)]



73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