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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수난절의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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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71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수난절의 순교

 

 

그리스도교에서 예수 수난은 신심 깊은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묵상자료를 제공해 왔다. 그리스도교의 미술가나 음악인들도 예수의 수난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어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했다. 박해시대 우리 나라 교회에서는 영광스런 예수 부활보다는 고통에 찬 예수 수난을 강조하던 신학 사조가 성행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은 예수의 수난과 그 공로를 신자들에게 역설하였고, 수난의 고통에 동참해야 함을 말했다.

 

물론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가장 극적인 요소는 그의 수난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기에 앞서 수난을 묵상하고 박해받는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술적 감성과 신학적 지식을 결합하여 예수의 수난 사실을 형상화한 가사문학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려던 순교자들은 자신도 예수 수난절에 순교하기를 원했다.

 

 

예수 수난의 의미

 

우리 나라 교회에서 예수 수난에 대한 인식은 18세기 말엽 교회 창설 초기부터 신자들에게 뚜렷이 각인되고 있다. 그들은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던 각종의 한문 교리서를 통해서 예수 수난에 대한 가르침을 터득하고 있었다.

 

예수 수난에 관한 가르침은 1801년의 박해 당시에도 널리 퍼져있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 압수했던 천주교 서적의 명단에는 「수난시말」과 같은 한문 서학서와 함께 그 한글 번역본이 들어있다. 그리고 수난의 각 장면을 서술하면서 묵상을 유도하는 ‘예수 수난도문’이 이미 번역되어 한 권의 책자로 엮어졌다. 1860년대에 출판되었던 각종 교회서적에서도 수난에 대한 묵상이 믿음살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는 극심한 박해에 시달리던 신자들을 격려하고, 그 박해의 고통이 무의미한 일이 아님을 역설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1866년의 박해에서 순교한 베르뇌(1814-1866년) 주교는 박해를 받고 있던 신자들에게 “환난을 위로하는 말이라.”는 사목서한을 보냈다. 그는 이 서한에서도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천주께서 사람을 내심은 천당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심이라. … 그러므로 천주께서 강생하시어 천주의 공의를 보완하시고, 우리 인류를 구원 속죄하시려고 만고만난(萬苦萬難)을 받아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또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르시기를 ‘장래에 천국을 얻기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고난과 능욕을 받아야 한다. 그러지 아니하면 길이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요, 지옥의 괴로움을 면할 길이 없으리라.’고 하셨다.”

 

1839년의 박해 때에 옥에서 순교한 민극가 스테파노(1788-1840년)는 천당과 지당(地堂)과 현세를 노래한 ‘삼세대의(三世大意)’를 지은 바 있다. 그는 4·4조의 이 가사에서도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고 있다. 그가 지은 이 가사 가운데 일부는 오늘의 교회에서 사순시기에 즐겨 부르는 가톨릭 성가 115번 ‘수난기약’의 노랫말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수난절의 순교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는 최초의 순교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왔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수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증인이 되었고, 자신의 말이 올바름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 삶과 죽음을 본받고자 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부활과 영생이 보장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한국교회사에 나타나는 우리의 순교자들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자신의 순교를 일치시키고자 하였다.

 

우리 나라 교회가 세워지던 초창기부터 예수 수난에 대한 신자들의 인식은 매우 깊어, 가능하다면 예수 수난절에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 예를 우리는 1866년의 박해 때에 순교한 다블뤼(1818-1866년) 성인과 그 동료 순교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사형선고를 받은 다음, 충청도 보령 수영으로 끌려가서 참수형을 당했다. 이때 다블뤼 주교가 예수 수난절에 자신과 동료들이 순교할 수 있도록 청원한 사실을 칼레(1833-1884년) 신부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성목요일 저녁 사람들은 형장 아주 가까이에 도착했다. 다블뤼 주교는 그들이 안내하는 길을 알고 있었다. 자기 전에 포졸 사이에는 내일 직접 사형장소로 가지 않고 수영에 이웃해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형수를 조리돌림하기로 결정났다는 얘기가 돌았다. 이를 들은 주교는 안된다고 말했다. ‘당신들이 말한 것처럼 해서는 안되오. 당신들은 내일 우리를 사형장으로 데리고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바로 내일 죽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정해진 시간에 죽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이 얼마나 당신을 닮으셨나를 보이시기 원했다. 그들에게 당신과 같은 날에 죽을 수 있는 은혜를 베풀면서 말이다.”

 

 

남은 말

 

박해시대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특히 중요시했다. 이러한 그들의 의식은 예수 수난에 대한 장엄한 종교시와 그들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확인된다. 당시의 교리서 등을 분석해 보면 예수 부활보다 그 수난을 대략 2배 이상 더 많은 분량으로 서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시구(詩句)를 통해서 예수의 수난을 자세히 묘사하며 그 죽음에 대한 북받치는 슬픔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고통에 함께하려던 자세를 가다듬었다. 신도들은 박해로 인한 자신들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의 수난에 더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이 수난과 고통을 통해서 그들은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됨을 믿어 마지 않았다.

 

순교자들도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고자 하여 자신의 순교가 예수 수난절에 이루어지기를 소망하기도 했다. 이 순교자의 전통에 서서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안중근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성금요일 수난절에 죽기를 청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겨레를 위해 실천했던 신앙인이었다. 오늘의 우리도 수난절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고, 현세에서의 책무를 다할 수 있으리라.

 

[경향잡지, 2003년 4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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