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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19: 도움 요청을 거절한 카스트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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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6-22 ㅣ No.1704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19) 도움 요청을 거절한 카스트로 신부


“남경교구장 주교의 선의는 불행히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복안을 떠나기 전에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페디치니 추기경에게 10가지 특별 권한을 청원한다. 페디치니 추기경 초상.

 

 

포교성성 장관에게 10가지 특별 권한 청원

 

저는 복안에서 남경으로 갈 계획입니다. 그곳에서 남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로 에 무라(Castro e Moura, 1804~1868, 포르투갈 라자로회 출신) 신부에게 길 안내인과 여행에 필요한 도움을 받아 절강성·강소성·산동성·직예·북경까지 갈 계획입니다.

 

저는 복안을 떠나기 전 1833년 4월 18일 자로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카를로 마리아 페디치니(Carlo Maria Pedicini, 1769~1843)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이 조선 교회와 앞으로 새롭게 생겨날 선교지를 위한 대목구장 권한을 청했습니다.

 

△ 조선대목구 사제들에게 견진성사 집전권을 위임할 특별 권한 △ 조선대목구장의 권한을 사제들에게 합법적으로 나눠줄 수 있는 권한 △ 박해나 긴급한 이유가 있을 때 조선 국경 밖에 신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조선대목구 사제들이 모든 교회 직무와 재치권을 행사하는 권한 △ 적절한 기회가 왔을 때 조선 밖의 지역에도 신앙을 선포하기 위해 사제들이나 교리교사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 △ 새 선교 지역에서 조선대목구와 동일하게 재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 △ 혼인 장애 관면과 해소 권한 △ 조선대목구 사제들과 모든 교우에게 대사를 베풀 수 있는 권한 △ 교우들의 영적 선익을 위해 40일 한대사를 줄 것 △ 조선대목구 사제들이 파리외방전교회 출신 성직자에게 허가될 모든 권한과 특전을 허락해 줄 것 △ 조선대목구 관할 책임을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겨줄 것 등입니다.

 

 

일행 3명과 함께 배를 타고 샹난푸에 도착

 

1833년 4월 27일 복건대목구장 디아즈 주교의 추천서를 들고 배를 타고 남경으로 떠났습니다. 복건에서 사제품을 받은 포르투갈 선교사와 현지인 신부, 그리고 길 안내를 맡은 중국인 교우 이렇게 3명이 저의 일행입니다. 항해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짙은 안개로 배끼리 충돌하지 않으려고 선원들이 소리를 치면서 서로의 위치를 알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탄 배는 5월 6일 모래톱에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해적이 나타나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3년 5월 15일부터 7월 20일까지 강남 샹난푸와 소주에 머물면서 조선 입국을 위해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인 페레이라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남경 주교좌 성당 전경.

 

 

5월 12일 절강성 북부 히아푸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중국 배들은 6월에 남동쪽으로 부는 계절풍을 이용해 일본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배를 한 척 빌려 강남 제일 남쪽에 있는 샹난푸로 갔습니다.(필자 주 - 당시 선교사들은 오늘날 강소성과 안휘성 일대를 ‘강남’으로 불렀다. 그런데 강남 남쪽 지역에 ‘샹난푸 Chang nan fou’라고 발음되는 도시가 없다. 대신 남경 인근에 ‘상주부 常州府’라는 도시가 있다. 하지만 샹난푸가 상주부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샹난푸에 가까워졌을 때 우리를 태운 배 주인은 길 안내자인 복건인 의사에게 “영국인 아편 장사꾼들을 내 배에 들여놓았군. 너 때문에 나도 붙잡혀 가게 됐어”라며 화를 냈습니다. 의사 교우가 “그렇지 않다”며 몇백 냥을 슬쩍 쥐어주자 배 주인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낮에 샹난푸에 내려 약방 주인 교우 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중국인과 달리 푸른 눈을 갖고 있어 검은색 얇은 천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다행히 많은 중국인도 먼지와 강한 햇살을 피하려고 저처럼 천을 뒤집어쓰고 다니기에 눈길을 끌진 않았습니다. 중국에서는 파란 눈, 큰 코, 금발, 갸름한 얼굴형에 안색이 지나치게 붉으면 수상쩍게 봅니다. 그래서 크고 둥근 머리에 얼굴은 평평하고 눈썹에 털이 별로 없고 그다지 튀어나오지도 않았으며 작고 검은 눈에 납작한 코, 수염도 얄팍하고 피부색도 누렇고, 검은색의 뻣뻣한 직모를 가진 선교사가 중국말까지 웬만큼 할 줄 안다면 중국에서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외모가 성소를 주는 것은 결코 아니므로 이런 인상착의에 만족하기보다는 성령의 이끄심을 구하고 선교사의 도덕적 자질에 신경 쓰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을 내맡겨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신중함이 명하는 규칙들을 등한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당신이 원하시면 비신자들의 눈을 띠로 가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할 줄 아십니다. 또 설령 발각되더라도 반드시 곤란한 결과들이 이어지는 것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 밀고자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경우에는 더욱이 그렇습니다.

 

낮 동안 약방에서 몸을 숨겼다가 자정에 우리는 다시 운하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5월 15일 새벽 5시 곧 동틀 녘에 경당을 꾸며놓은 한 농가로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들었는지 그곳 교우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더러 이틀 후 맞는 주님 승천 대축일에 미사를 봉헌하고 떠날 것을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두 신부는 가던 길을 계속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저만 남았습니다.

 

- 포르투갈 라자로회 출신인 남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로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길 안내인을 구해달라는 청을 거절한다. 카스트로 주교 초상화.

 

 

조선 교우들의 소식이 담긴 편지 건네받아

 

5월 18일 남경교구 총대리 카스트로 신부가 저를 만나러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는 북경에서 보낸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편지 한 통을 제게 건넸습니다. 편지에는 조선 교우들의 소식이 담겨 있었습니다. 조선 교우들은 “몇 해를 기다린 끝에 드디어 우리가 바라던 이상으로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선교사 한 분을 요청했는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선교사와 주교님 한 분을 보내 주시니 감격의 눈물을 흘릴 만큼 기쁨이 절정에 달해 있습니다”라고 기뻐했습니다.

 

저는 카스트로 신부에게 안내원 한 명을 구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저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 안내원도 구하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저는 산동(山東)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미 짐을 그 지방으로 부쳤습니다만 저와 동행하려는 사람을 하나도 구할 수가 없군요. 그래서 직예(直隸)에 있는 안내인 한 명을 불러오도록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제 청을 거절했습니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남경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는 그를 북경교구 총대리로 임명하고 산동에서 사목하라고 지시했지만, 그곳까지 자신을 데리고 갈 안내원을 구하지 못해 1833년 11월 2일이 되어서야 임지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필자 주 - 카스트로 신부는 1838년 북경교구장 서리로 임명됐고, 1841년 2월 포르투갈 왕은 그를 북경교구장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교황청 포교성성은 그를 클라우디오폴리스 명의 주교이며 직예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포교성성이 더는 북경교구에 대한 포르투갈 보호권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 소식을 듣자 카스트로 주교는 교황청의 뜻을 따르지 않고 북경교구 총대리 자격으로 계속 북경교구장 서리직을 수행하다 1847년 6월 마카오로 돌아갔다.)

 

저는 카스트로 신부에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해 북경에 있는 왕 요셉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제 편지를 전하기로 한 신부는 제 편지를 북경으로 보내지 않고 그의 집에 버려뒀습니다. 5월 23일 카스트로 신부는 남경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마카오에서 복안까지 동행했던 포르투갈 출신의 라자로회 선교사 2명이 8일에 한 번씩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중국 전통 옷 여러 벌을 선물하고 각별하게 대해줬습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소주에서 1833년 6월 26일 7개월 만에 왕 요셉과 상봉한다. 왕 요셉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라는 남경교구장 페레이라 주교의 편지를 갖고 왔다. 운하가 발달한 소주 소경.

 

 

헤어진 지 7개월 만에 왕 요셉과 극적 상봉

 

성령의 이끄심으로 6월 26일 소주(蘇州)에서 왕 요셉과 극적인 상봉을 했습니다. 1832년 11월 23일 마카오에서 헤어진 지 7개월 만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저의 지시대로 북경에서 페레이라 주교를 만나 저의 편지를 전하고 조선으로 가는 여항덕 신부를 요동까지 수행한 후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왕 요셉은 남경교구장 주교가 쓴 몇 통의 편지를 갖고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제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모두 공급해 주고 달단(만주)으로 갈 수 있도록 안내인을 구해 줘라”라는 지시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저는 남경 주교의 고귀하고 관대한 처사에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그에 대한 신뢰가 다시 생기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선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생각이 깊어지면서 남경 주교의 선의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무엇이 이토록 급작스런 변화의 이유가 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원인으로 남경 주교의 소심함과 제가 조선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확신을 꼽겠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6월 16일, 리길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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