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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선교사의 공소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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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21 ㅣ No.385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선교사의 공소방문

 

 

공소는 신자들의 살림살이와 믿음살이가 함께 어우러지던 곳이다. 그곳에서는 신자들의 소박하고 신실한 삶이 전개되었다. 박해시대 이래 형성된 공소 방문과 관련된 전통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공소에서 흔히 목격되던 전통적 관습들은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도시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던 1960년대 초엽까지도 살아있었다.

 

 

참여 신자들의 제한

 

박해시대 선교사들은 교우촌의 공소에서 전례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면담하는 데에 큰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선교사뿐만 아니라 신자들도 외교인에게 미행당하지 않으려면 항상 은밀히 행동해야 했다. 자칫 이웃 마을의 주민들에게 신부나 신자들의 행적이 드러날 경우 교회와 공소의 주민들이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앵베르(Imbert, 1796-1839년) 주교는 1839년 남명혁(南明赫, 1802-1839년)의 집에서 공소를 본 적이 있었다. 이때 주교는 하루 동안 공소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을 제한했지만 신자들이 몰려들었다. 공소를 보려고 오가는 사람들의 왕래가 그치지 않았고, 주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앵베르 주교가 떠난 직후 남명혁의 집은 습격을 받았으며 그는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최양업 신부는 1857년 불무골 공소에서 쓴 편지에서 자신이 선교여행 중 한 읍내에서 당했던 일을 보고한 바 있다. 그는 전 가족이 교우인 한 집을 택해서 공소를 보았고, 신앙에 감화된 많은 여인들이 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는 그 공소집에서 성사 집전을 끝내고 읍내를 막 벗어나던 참이었다. 최 신부를 배웅하던 그 집의 젊은 주인이 아직 귀가하지도 못한 때였다. 그런데 최 신부가 공소를 본 사실을 전해 들은 동네사람들은 그 집을 습격하여 파괴하고는 가족을 추방해 버렸다.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피해를 가급적이면 피하고자 하루 동안 공소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수를 제한했다. 1830년대 후반기 앵베르 주교는 공소에 참석할 수 있는 인원을 하루에 20명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그는 하루에 30명의 신자들을 면담하기도 했다. 1860년대 공소에서도 선교사가 도착하기 이전 대략 20-30명 정도의 신자들이 미리 와서 선교사를 기다렸다.

 

공소의 규모는 그곳을 방문한 사제가 드리는 미사의 대수로 표현되어 ‘미사 한 대 공소’ 또는 ‘미사 두 대 공소’ 등으로 불렸다. ‘미사 한 대 공소’란 신부가 하루를 머무는 공소를 뜻했다. ‘미사 두 대 공소’라고 하면 신부가 이틀 동안 머물면서 찰고를 받아야 하는 웬만한 크기의 공소를 말했다. 미사 세 대 이상의 공소는 대규모의 공소였다. 만일 신자들의 숫자가 이보다 많으면 하루를 더 머물렀다.

 

 

공소의 조직망

 

선교사가 방문 전에 공소에 와서 대기하던 신자수가 제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신부의 공소방문에 따른 사전 연락과 준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해시대 공소를 방문하는 선교사들은 비밀스럽게 유지되던 교회 조직을 가동하여 판공성사를 준비시켰다. 공소 신자들은 회장을 통해서 개개인에게 주어진 판공 날짜를 확인받고 정해진 날짜에만 공소를 방문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보면, 박해시대 공소에서도 선교사의 방문 전에 이를 미리 준비시키던 문건인 배정기(排定記)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배정기는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 신부가 공소 순방에 앞서 관례적으로 공소 방문일정과 교우들이 유의해야 할 점이나 지시사항을 기록하여 공소에 보내던 문건이다. 배정기를 전달받은 회장은 신부의 방문을 전후하여 공소 상황을 적어 신부에게 보고했고, 공소를 준비했다. 식민지 시대에 이르러서는 각 본당에 등사기가 보급되었다. 이에 본당신부는 공소를 방문하기 이전에 배정기를 등사하여 이를 각 공소에 우편으로 보냈다. 공소 신자들이 이를 받아서 읽고 배정기에 기록된 내용들을 실천했다. 이렇게 붓글씨나 등사판으로 작성하여 공소에 배부되었던 배정기들이 오늘날까지 간간이 전해지고 있다.

 

개항기 이후 신부가 특정 공소를 방문하고자 할 때, 방문하게 될 공소에서는 짐꾼 두 명을 신부에게 미리 보내서 신부의 짐을 공소까지 지고 오도록 했다. 두 명의 짐꾼 가운데 하나는 미사 짐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이불 짐꾼이었다. 대부분의 공소는 신부가 덮고 잘 이불마저도 변변히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부가 온다는 기별을 받은 신자들은 공소 마을로 넘어드는 고갯마루에 늘어서서 신부를 기다렸다. 신부가 그들 앞에 이르면 신자들은 무릎을 꿇고 강복을 받고서, 훈계 겸 인사말을 들었다.

 

신부는 공소에서 신자들의 교리 지식을 점검하는 찰고를 하고, 판공성사를 주거나 미사를 집전하기 마련이었다. 공소에서 판공을 하는 때는 일종의 명절이나 마찬가지였다. 신자들은 공소를 치르는 날이 되면 옷을 깨끗이 건사하고 다림질을 해놓았다가 입었다. 부활판공 때는 농번기와 겹치는 경우가 많았는데도 신자들이 농사일을 제쳐두고 신부 곁을 맴돌기도 했다. 또한 공소 때에 부모들은 학생인 자녀들을 학교에도 안 보내고 오직 판공성사에 전념토록 배려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렇듯 판공성사를 소중히 여기며 영혼의 일을 준비했다.

 


신부의 특별한 밥상

 

신부가 공소집에 도착하면 먼저 다과상을 내어 대접했다. 식사 때가 되면 신부는 고봉으로 담아준 밥을 대접받았다. 신부는 그 그릇의 밥을 반드시 남겨야 했다. 그리하면 신자들은 신부가 물린 상에서 ‘강복 받은 밥’을 나누어 먹곤 하였다. 특히 ‘강복 받은 밥’을 먹이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머리가 총명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소의 어머니들은 ‘강복 받은 밥’에 보약의 일종인 ‘총명탕(聰明湯)’보다 더 큰 효과를 기대하면서 이를 아이들을 불러 일부러 먹이기도 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은 이후 공소를 방문한 신부의 밥상에는 늘 특식이 차려졌다. 산골에서는 귀한 김이며 계란도 밥상에 올랐다. 그렇게 공소 생활을 한 아이 가운데는 계란이나 고기반찬이 먹고 싶어서 신학교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 가운데 신부가 되고 대주교에까지 오른 분도 있었다. 대구대교구 교구장이었던 서정길 대주교도 그렇게 하여 신부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식사를 마친 신부가 있는 방에 신자들이 들어갈 때에는 문 앞의 툇마루에 줄맞추어 장죽을 세워놓고 빈손으로 들어가서 큰절을 하며 ‘죄인 절 받으십시오.’라고 했다. 건의사항이 있을 때에도 ‘죄인, 신부에게 품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고서 자신의 의견을 공손되이 전달했다. 지을 죄도 별로 없었을 듯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낮추어 불렀다.

 

공소를 방문한 신부는 주요 신자들과 대면을 하고 나서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찰고(察考)’를 시작했다. 찰고는 신자들의 교리지식을 평가하고, 경문 암송 여부 등을 확인하는 일종의 구두시험이었다. 판공성사 때 신부는 보통 가족단위로 찰고를 했고, 한 가족 3대가 동시에 찰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손자가 교리문답이나 경문을 잘 못 외울 경우에 신부는 그 아이 아버지의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 그 아이의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육신에 필요한 일만 가르쳤지 영혼에 관한 일은 가르치지 않았다고 꾸중을 들었다. 이렇게 어린 아들이 교리를 잘못하여 아버지가 추달을 당하고, 할아버지가 지청구를 듣는 일은 공소의 봄 · 가을 판공 때에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오래간만의 미사에서 성체를 영할 때에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판공이 끝날 즈음에 공소 신자들은 신부에게 자신의 신앙을 인정받았다는 점에 흐뭇해하면서 천당길을 보장받은 양 기뻐했다. 신부는 반년 후에 있을 봄공소나 가을공소를 기약하고 다시 떠나야 했다. 신부가 공소를 마친 후 마을을 떠날 때에 여교우들은 친정 부친을 이별할 때처럼 아쉬워하며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남은 말

 

박해시대나 식민지시대의 선교사들이 보낸 서한을 검토하다 보면, 교회와 공소에서 신자들이 서로 갈등하거나, 선교사와 신자 사이에 일어나는 다툼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선교사들은 자신이 신자들에게서 받은 좋은 인상이나, 신자들의 열심한 생활에 대한 감동을 고국에 글로 써서 보냈다. 선교사들은 풍토나 기후, 음식이나 주거환경의 차이 때문에 조선의 현실 속에서 적지 않은 고통을 겪은 이들이다. 그렇지만 당시 공소의 신자들의 진솔한 삶은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일에 대한 보람과 선교 과정에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맹장 아래 약졸이 없듯이, 헌신적인 사제는 신실한 신자들을 길러내었다. 강병이 명장을 만들 듯이, 공소의 신심 깊은 신자들은 선교사를 순교자나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들 모두는 우리 교회사의 진정한 주역이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9년 8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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