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교회사12: 일제시대의 교회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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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10 ㅣ No.384

한국 교회사 (12) 일제시대의 교회 발전

 

 

일제시대의 교회사를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이 시기의 교회의 발전 상황을 일별해 보기로 하자.

 

우선 신자수에 있어서 큰 발전을 보였는데, 한일합방 당시인 1910년에 7만 7천 명 가량이던 신자수는 36년이 지난 일제 말기에 그 3배인 23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밖에도 여러 분야에서 고른 발전을 보였는데, 특히 교회 조직의 발전이 현저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교구가 처음으로 분할되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8개의 교구가 새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교구의 분할은 기존 교구에서 본당이나 신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것을 효율적으로 관할하고 또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더 잘 보살피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분할 · 독립 자체가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구의 분할 · 독립은 나아가서 새로운 발전의 토대 구실도 하였다. 왜냐하면 새 교구에는 으레 새로운 일꾼이 파견되고 이에 따라 본당과 공소가 또 증가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최초의 교구 분할은 1911년에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한국에는 조선교구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 해에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할 · 독립되고, 조선교구는 그 이름을 서울교구로 바꾸었다. 대구교구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관할하게 되었는데, 교세면에서도 한국 교회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상당히 발전된 지역이었다. 그리고 새 교구의 사목은 서울교구와 마찬가지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는데, 아마 당시 이 회의 선교사 수가45명이나 되었으므로 아직은 그 선교사로서 두 교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구교구의 분가에도 불구하고 서울교구는 아직도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광활한 지역을 관할해야 하였다. 그중에서도 북쪽의 평안도와 함경도는 선교사의 부족으로 제일 낙후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1920년 초의 교세에 의하면 함경도에는 2개 본당에 신자수는 4천 명을 넘지 못하였고, 평안도 역시 5개 본당에 신자수는 5천 명에 불과하였다(당시 서울교구 신자 총수는 약 6만 명). 그러므로 평안도와 함경도를 발전시키려면 그곳에도 교구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였다. 그런데 파리외방전교회로서는 더 이상의 교구를 맡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새 교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새로운 선교단이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런데 아직은 이를 위해 한국에 진출하려는 선교단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이미 교육사업을 위해 서울에 진출해 있던 베네딕도회가 새 포교지를 맡을 의사를 표명하게 되었고, 이리하여 새 교구 탄생이 가능하게 되었다.

 

서울교구로서는 함경도보다 평안도를 교구로 독립시키는 것이 더 시급하였다. 왜냐하면 평안도에는 개신교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고 있어서 이에 시급히 대항할 필요가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네딕도회는 도리어 그들의 힘으로는 개신교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었든지 개신교의 세력이 약한 함경도를 택하였다. 이리하여 평안도보다 함경도가 먼저 1920년에 원산교구란 이름으로 교구로 독립되었다. 원산교구는 2년 후 만주의 간도 지방 연길(延吉)과 의란(依蘭) 지방까지 맡게 됨으로써 면적상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구가 되었다.

 

평안도 지방도 그 후 미국의 메리놀 선교회가 이 지방의 사목을 수락함으로써 집중적인 포교 활동이 가능해졌다. 메리놀 선교사들은 1924년부터 이 지방에 진출하여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한 결과 1927년에는 평양교구란 이름 아래 평안남북도를 교구로 독립시키게 되었다.

 

한편 원산교구를 담당하고 있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원산교구에서 만주 지방을 독립시킬 계획을 세우고, 이 지방에 선교사들을 집중적으로 파견함으로써 마침내 1928년에 간도지방을 연길교구로 분할 ? 독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한편 대구교구에서도 1930년대에 와서는 교구의 분할이 시작되었다. 대구교구는 처음에 전라도를 전부 한국인 성직자에게 넘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낙후된 전라남도까지 맡기게 되면 도리어 부담이 될 것으로 판단되어 전라북도만을 한국인 교구로 독립시키고, 전라남도는 다른 선교단에 맡기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1937년 최초의 한국인 교구인 전주교구가 탄생하는 동시에 전라남도도 광주교구로 독립되었다. 광주교구는 새로 한국에 진출한 아일랜드의 골롬반회 선교사들에게 위임되었다. 골롬반회 선교사들은 그 후 1939년에 서울교구에서 분할 독립된 강원도의 춘천교구도 맡게 되었다.

 

전주교구에 이어 1940년에 두 번째의 한국인 자치교구가 탄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함흥교구였다. 함흥교구는 원산교구에서 독립한 것인데,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이 해에 원산교구에서 덕원면속구를 독립시키는 한편 원산교구를 함흥교구로 개칭하고 또 장차 그 교구를 한국인 성직자에게 넘기기로 하였다.

 

이와 같은 교구의 발전은 물론 첫째로 복음 전파의 일꾼들의 노력과 희생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계속적인 선교사의 파견 외에도 베네딕도회가 포교 활동에 새로 가담하게 되었고, 또 메리놀회와 골롬반회가 새로 한국에 진출함으로써 선교사의 수는 크게 증원되기에 이르렀다. 또 이들 선교 단체의 자매격인 메리놀 수녀회, 포교 베네딕도회, 올리베따노회 등 여자 수도회의 진출도 교구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메리놀 수녀들은 평양교구에서, 포교 베네딕도회 수녀들은 원산교구에서, 올리베따노회 수녀들은 연길교구에서 각기 본당사목을 도우면서 교육활동과 의료사업에도 봉사하였다.

 

물론 당시의 교육이나 사회활동은 교구 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것이지만 수녀들의 협조가 없었더라면 큰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당시의 교육사업이나 사회사업은 포교를 목표로 하였던 것인 만큼 그만큼 개종 운동에 있어서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공소회장과 청년들의 협력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 많은 공소에서 공소회장들의 뒷받침이 없었더라면 선교사의 활동은 증가되기는커녕 감소되거나 아니면 정지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청년들은 그들의 고유한 활동을 통해 복음 전파에 기여하였고, 특히 언론 · 출판활동을 통해 물질주의, 공산주의 등 당시의 위험한 사상이 교회 안에 만연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 교회 발전에 가장 기여한 일꾼들은 역시 한국인 성직자들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파리외방전교회가 전교 활동보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 사업을 앞세우고 이에 진력한 것은 신자들의 사목이건, 미신자들에 대한 개종 운동이건 한국인 성직자에 의하지 않고는 성공을 거두기 어려움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한국인 성직자를 제때에 많이 양성해 내지 못하였더라면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선교사들의 집단 동원으로 인한 한국 교회의 공백을 도저히 메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주교구나 함흥교구 등 뒤늦게나마 한국인 자치교구의 탄생을 보게 된 것도 실은 한국인 성직자 수가 충분하고 또 그 질도 높이 평가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상 우리는 일제 치하의 교회의 활동과 발전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과연 교회가 그러한 성과에 만족하였던가? 다시 말해서 그것이 노력한 만큼의 성과였으며 기대한 만큼의 발전이었던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당시 교회 당국자들이나 당시를 평가하는 오늘의 교회사가들의 대답은 똑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발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기대하고 노력했던 만큼의 성과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복음 전파를 막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였을 것이 틀림없다.

 

첫째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사실에서 오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이유였다. 합방과 더불어 교회에 나타난 첫째 현상은 성장의 둔화였다. 1919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신자의 연평균 증가율은 2.10%에 그쳤다. 이것은 개화기의 증가율 6.98%와 비교할 때 현격한 둔화 현상이었다. 이유는 합방으로 민족의 장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자 종교 문제를 포함하여 모든 문제를 보다 나은 앞날로 미루는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민에게 있었던 종전의 종교열은 식어지고 또 종교와 신앙에 무관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본인들의 토지 착취, 소위 개화정책과 이에 따른 물가고는 그렇지 않아도 가난했던 신자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신자들도 생계를 찾아 북간도와 서간도, 그리고 멀리 하와이와 멕시코로의 이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이것을 한국인의 방랑벽(放浪癖)이라고 일컬을 만큼 이민열은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새 영세 입교자로 인한 교세의 증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 무관심, 이민 등으로 인해 그 성장은 미미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 외에도 물질주의, 사회주의 등 사조(思潮)의 영향, 또한 일본 당국이 권장하는 신도(神道)와 불교의 선전 등의 방해를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개신교의 선전과 경쟁은 포교의 가장 큰 장애로 당시 한국 교회를 크게 위협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l백 년이나 늦게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미구에 개신교는 교세면에서 천주교를 추월하게 되었고,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자수에 있어서 10만 대 30만이란 아주 큰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개신교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렇게 큰 성공을 거둔 데는 주로 두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즉 인원과 재원의 풍부함이었다. 1923년의 통계를 보면 천주교의 선교사수는 한국인까지 합쳐 1백 명인데 비해 개신교 목사는 한국인까지 합쳐 l천 명이나 되었다. 예산면에서도 개신교는 1년 예산이 기백만 원이었는데, 천주교는 기만 원에 불과하였다.

 

다음 교회 사업에 있어서는 비교가 안될 만큼 엄청난 차이를 보였다. 교회가 경영하는 학교의 학생수는 천주교가 l만 명이 못되었는데, 개신교는 6만여 명이었고, 사회사업에 있어서도 천주교는 3개의 고아원과 2개의 무료진료소만을 경영하고 있을 때 개신교는 병원만도 벌써 19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물론 천주교측의 인원과 재원의 빈약에서 빚어진 결과이겠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고, 천주교의 선교 정책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주교에서는 복음 전파와 영혼의 구원이란 직접 포교만을 일삼았고, 교육이나 사회사업 같은 간접 포교를 중시하지 않았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직접 포교와 간접 포교를 병행시켰고, 평신도 인재를 양성하여 사회 각분야에 침투시키면서 동시에 서민들의 신임도 얻을 수 있었다. 개신교와 재정으로 경쟁할 수 없었다면 자선사업을 통하는 길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측에서는 그것마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어쨌든 일제시대의 한국 교회는 일제의 탄압, 타종교와의 경쟁 등 수많은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도 복음의 봉사자들의 헌신적이고 끊임없는 노력에 힘입어 비교적 높은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 한국 교회사는 이번 호로써 필자의 사정으로 일단 마무리합니다. 기회 닿는 대로 계속할 것을 약속드리며 최석우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경향잡지, 1988년 12월호,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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