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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교회사11: 일제의 교회 탄압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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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10 ㅣ No.383

한국 교회사 (11) 일제의 교회 탄압 정책

 

 

일제는 1937년에 중일전쟁,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을 수행하고 또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달성하고자 안간힘을 쓰면서 한국 민족을 더 할 수 없이 괴롭히며 착취를 일삼았고, 이에 따라 한국 교회도 한국 민족과 더불어 갖은 수난을 겪어야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은 이때에 새삼 시작된 것은 아니고 이미 합방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또 해를 거듭할수록 더해 간 것이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합방 시초부터 총괄적으로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합방 직후 “경향신문”의 폐간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경향신문”은 교회가 신자만이 아니라 널리 일반 국민까지 계몽할 목적으로 1906년에 발간한 주간지였다. 이 신문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따라 정치불간섭주의의 입장을 취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만행에 대해서는 그것을 사정없이 고발하고 규탄하였다. 이러 한 기사로 말미암아 “경향신문”은 결국 일본 당국으로부터 압수되었다(1910년 4월 22일). 그러나 교회는 신문의 간행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당국은 9월 10일, 만일 신문 기사를 종교 사항에 국한시키지 않는다면 폐간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위협하였으나 교회는 굽히지 않았다. 이에 일본 당국은 신문 원고의 사전 검열로 맞섰다. 일제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폐간에 있었던 만큼 검열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신문의 폐간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고, 4년간 계속된 “경향신문”은 1910년 12월 30일자로 폐간되었다. 그 대신 제호만을 살린 종교 잡지(“경향잡지”)를 간행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유일한 언론기관이던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일제는 이어 교회의 교육활동을 규제하고자 ‘사립학교 규칙 개정령’(1915년 3월 24일)을 제정 · 공포하였다. 이 법령으로 교회 학교는 두 가지 점에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첫째는 종교 과목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학교 구내에서도 종교를 일체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교회 학교는 복음 전파를 제일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의 금지는 교회 학교의 존재를 거의 무의미하게 만든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새 법령에 따르면 사립학교 교사들도 공립학교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교사자격증을 소유해야 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교육의 향상이란 관점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이에 대비하고자 독일의 베네딕도회를 초청하여 사범학교(즉 崇信學校)를 세워 이미 1911년부터 가톨릭 교사를 양성하게 했었다. 그러나 이 학교는 불과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지원자의 부족이었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일제가 교육을 독점함으로써 교회에서 독자적으로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용인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사립학교법에 이이 같은 해(1915년 8월 16일) ‘포교규칙’을 제정 · 공포하였다. 이 법은 교회의 포교 활동을 규제하려는 데 있었던 만큼 그것은 종교의 고유한 영역과 종교 자유에 대한 중대한 침범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새 법령으로 교회는 본당신부와 공소회장의 임명, 공소와 본당을 신설하는 데 있어서 총독부의 사전 신고나 허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특히 본당 신설의 경우 그 조건들이 너무나 까다롭고 번거로와 앞으로 본당 신설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복음 전파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3?1운동 후 일제의 정책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됨에 따라 이상의 두 개의 악법도 폐지되거나 개정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교회 학교에서의 종교 교육이 허용되고, 본당 신설 등에 따른 까다로운 절차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교회를 박해할 수 있는 또 다른 교묘한 제도를 구상하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신사참배였다.

 

신사참배는 먼저 일본의 가톨릭 학생들에게 강요되기 시작하였는데,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나가사키(長崎) 교구에서는 1915년경부터 산사참배를 거부한 가톨릭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게 되자 신사참배를 문제시하고 그것을 철저히 검토한 끝에 신사에서 거행되는 의식은 정부의 주장대로 애국적인 표현으로 간주할 수 없고, 따라서 그러한 종교적이고 미신적인 성격이 제거되지 않는 한 가톨릭 신자에게 신사참배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한편 한국에서도 1920년대에 이르러 신사참배가 문제시되자 서울교구에서는 1923년에 간행한 교구지도서를 통해 신사참배를 엄금한다는 공식 태도를 표명하였다(2년 후 간행된 교리서 “대문답”에서도 신사참배를, 제1계를 범하는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신사참배가 교회에서 공식으로 금지된 지 1년 만인 1924년, 충청남도 강경(江景) 공립보통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가톨릭 학생이 무더기로 퇴학당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학교에는 인근 나바위와 논산(論山)본당에서 25명의 가톨릭 학생이 통학하고 있었다. 이해 봄에 비행기 한 대가 기차에 실려 강경역에 도착하는 경사가 있었다. 이것을 경축하는 뜻에서 강경 공립보통학교의 일본인 미야무레(宮牟禮) 교장은 학생들을 인솔하고 신사참배를 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학생들은 참배를 거부하였다. 학교 당국의 태도가 심상치 않자 가톨릭 학생들은 나바위의 카닥스(Cadars, 姜達淳) 본당신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카닥스 신부는 일본어를 잘하는 교우를 교장에게 보내 가톨릭 학생들을 신사참배에서 면제시켜 주도록 교섭하게 하였다.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다.

 

여름방학을 지내고 9월 신학기가 되자 가톨릭 학생들은 다시 등교하였다. 그런데 10월 11일은 학교에서 연례적으로 행하는 신사참배 일이었다. 이날 가톨릭 학생 20명과 개신교 학생 6명은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해 결석을 하였다 다음날부터 이들 학생과 그들의 학부모들에 대한 신문이 시작되었다. 학부모들도 대부분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신사참배를 시킬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학교에서는 마침내 가톨릭 학생들의 등교를 금지하였고, 학생들은 그 이유를 서면으로 밝혀줄 것을 요구하였다.

 

한편 카닥스 신부는 교장에게 서한을 보내고 가톨릭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답신이 없자 카닥스 신부는 직접 교장을 찾아가 담판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카닥스 신부는 총독에게까지 진정서를 올렸다(10월 19일). 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총독부에서는 나가노(長野韓) 학무국장을 현지에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케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곧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었다. 한편 나가노 학무국장은 서울의 두 주교(뮈뗄과 드브레)를 불러 강경사건을 설명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인 행위에 불과하다고 하며 가톨릭 학생을 참배시키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주교들은 신사 의식이 종교적임을 확신한다고 대답하고 물러나왔다. 한편 강경에서는 끝내 신사참배를 거부한 가톨릭 학생 7명이 퇴학당하고 말았다(12월 16일).

 

이어 총독부에서는 신사 업무를 종래의 학무국 종교과에서 내무부 지방과로 이관한다는 훈령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강경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것은 강경사건 이후의 유일한 변화였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신사의 소관청을 이전시킴으로써 신사 의식이 종교적이 아님을 합리화하려 하였을 뿐, 실제로 변경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신사참배는 곧이어 교회 학교에도 강요되었다. 1925년 10월 15일, 이날은 서울의 조선신궁이 낙성되는 날이었다. 이 축제를 위해 명치 천황의 유품이 기차편으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운반되었는데, 유품이 대구역을 지날 때 역에 나와 그것을 맞이하도록 대구 성당 학생들에게 강요되었다. 그러나 교회 당국에서는 그것을 거부하고 역에 나가지 않았다. 또 서울에서는 바로 낙성식 날 가톨릭과 개신교 학생들에게 참석을 요구해 왔었으나 모두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금지하는 교회의 공식 입장은 1935년까지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1932년에 간행된 “한국 교회 공동지도서”는 신사참배에 관해 1923년의 지도서에서와 마찬가지로 계속 금지하고 있고, 또 1935년의 주교회의에서는 신사참배에 교회가 어느 정도 양보할 수 있는가를 토의하였으나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교회에서는 1932년 신사참배가 애국심의 표시에 불과하다는 문부성의 답변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신사참배가 허용되기 시작하였고, 1936년에는 교황청이 일본 교회의 노선을 따라 신사참배를 허용함으로써 그것이 한국 교회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다.

 

서두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1937년의 중일전쟁과 1941년의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탄압은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일례로 소위 국민정신을 총동원한다는 구실 아래 성당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도록 강요되기까지 하였다. 이로 인해 지방에서는 신부들이 잡혀 투옥되는 사례도 있었다. 또 적국(敵國)이라고 하여 평양교구의 미국인 선교사 35명을 구금한 끝에 이듬해에는 그들을 모두 본국으로 추방하였다. 또 광주와 춘천교구의 아일랜드 선교사 32명을 구금하였고, 심지어 적국이 아닌 프랑스와 독일 선교사들까지 외부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연금하였다. 또 1941년 덕원에서 간행한 “서간편” 묵시록에 ‘만왕의 왕’이란 구절을 천황의 신격(神格)을 격하시킨다는 이유로 삭제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의 외국인의 처지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외국인을 모두 한국에서 추방하려 하였다.

 

심지어 일제는 한국의 외국인 주교를 모두 일본인으로 대치(代置)하려 하였다. 그러한 조침이 보이자 서울교구의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는 재빨리 동경의 교황사절과 연락을 취하고 한국인(노기남 주교)을 그의 후임으로 임명케 함으로써 선수를 쳤다. 당황한 일제는 서둘러 대구와 광주교구의 외국인 주교를 일본인으로 대치시켰다(1942년). 나아가서 일제는 인가가 없다는 이유로 대구와 서울의 신학교를 폐쇄시켰다. 그래서 두 신학교의 학생들은 부득이 덕원신학교로 가서 학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경향잡지”가 폐간을 당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한국인 신부와 신학생들을 군인 또는 노무자로 징용하는가 하면, 평양의 주교좌 성당을 위시하여 도처에서 성당을 군용으로 징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사가 고해소에 침입하고, 성당 종이 공출되고, 신부들이 간첩으로 몰려 수감되는 등, 한마디로 일제는 교회를 탄압하고 말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경향잡지, 1988년 11월호,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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