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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교회사9: 한국 교회의 전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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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6 ㅣ No.381

한국 교회사 (9) 한국 교회의 전환기

 

 

1928년(1월 21일) 서울교구의 관할지인 황해도가 감목대리구로 선언되었고, 3년 후인 1931년 5월 10일에는 대구교구의 관할지인 전라도가 역시 감목대리구로 선언되었다. 당시 한국과 같이 포교지인, 다시 말해서 아직 선교사들이 교회를 다스리고 있던 지역에서 감목대리구가 설정되었다는 것은 장차 방인(邦人), 즉 한국인 교구장에 의한 자치교구의 탄생을 준비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에 처음으로 두 지역이 감목대리구로 설정된 사실은 한국인 신자들에게 교회 당국의 쾌거로 받아들여졌고, 동시에 곧 한국인 주교가 탄생하리라는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그 회칙에서 “방인 성직자의 양성, 기성 신자의 사목, 외교인의 개종” 이렇게 세 가지를 주요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선교회로서는 외교인의 개종이 마땅히 첫째 목표가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인 성직자 양성을 첫째 목표로 삼은 것은, 외교인의 개종이건 기성 신자의 사목이건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에게 그 일까지 일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 진출한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도 당연히 방인 성직자 양성을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실제로 한국에 진출하자 그들은 즉시 신학생을 선발하여 외국으로 보내 성직자로 양성하게 하였다. 그 결과 미구에 김대건과 최양업 등 두 명의 신부를 키워낼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한국의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신학생들을 해외로 보내는 한편 국내에도 신학교를 세워 방인 성직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박해로 인해 1866년의 병인대박해까지 한 명의 성직자도 배출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방인 성직자를 양성하여 그들에게 교회를 맡기는 일이 그만큼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비단 박해만이 아니라 또 다른 큰 이유가 교회의 이양을 지연시켰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당시 선교사들의 정신 자체였다. 신학교가 용산에 정착한 이후 1896년부터 3년마다 2-3명의 한국인 신부가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인 성직자의 수가 아니라 질이었다. 당시 한국의 선교사들은 한국인 성직자를 영혼을 구하는 일에 그들의 부족한 일손을 도와줄 조수 내지는 보좌로 생각했을 뿐, 그들에게 교회를 맡겨야 한다는 의식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인 신학생들에게는 영혼을 구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교리 지식만을 가르쳐주면 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신학을 깊이 있게 가르쳐줄 우수한 교수신부가 필요 없었다. 실제로 당시 신학교에서는 신학교의 발전을 위해 훌륭한 교수를 초빙한 적이 없고, 필요에 따라 당시 한국의 선교사 중에서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교수로 채용했을 뿐이다. 1914년에 대구교구를 위해 대구에 신학교가 또 하나 생겼지만 그 교육수준은 서울의 신학교와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1926년 포교성성에서는 한국 신학교육의 향상을 위해 두 신학교의 통합을 권고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두 신학교의 통합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선교사들의 이와 같은 의식은 비단 한국의 선교사들만이 아니라 당시 모든 선교사들에게 거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교회를 현지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 이것은 오늘에 와서는 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19세기에 있어서, 아니 20세기 초엽까지도 선교사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첫째 이유는 당시의 지배적인 신학사상이나 영성이 개인중심적이었기 때문에 개인의 구령(救靈)이 최우선 과제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교회란 공동체 개념은 등한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당시는 유럽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유럽인으로서의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다. 비근한 예로 당시 선교사들에게는 교황청으로부터 “교황 파견 선교사”란 경칭이 부여되었었는데, 선교사들은 이런 데서 오는 우월감을 스스로 포기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 경칭을 즐겨 사용하면서 우월 민족임을 자부해 마지않았다.

 

1920년대에 가서야 선교사들의 그러한 의식에 변화가 생기가 시작하였는데, 그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사람이 바로 벨기에 출신의 중국 선교사 레브(Lebbe) 신부였다. 그는 현지인을 주교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1926년 처음으로 여섯 명의 중국인 주교가 탄생하였다. 이어 다음해에는 일본에도 일본인 주교가 탄생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1928년 한국인 주교의 탄생을 예고한 황해도 감목대리구의 설정은 한국 선교사들에게 있어서도 그러한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동시에 한국교회의 전환기를 예고하는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전라도 감목대리구는 3년 늦게 설정되었으나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 주교는 그 늦어진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만일 1928년에 유럽으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도 그해에 전라도를 감목대리구로 선언했을 것이지만, 건강의 악화로 치료차 유럽으로 떠나야 했고 또 그곳에 2년 반 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래서 돌아와서야 그 일을 추진시킬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방인 교구를 신설하는 일을 그간, 특히 유럽에 체재하는 동안 꾸준히 연구하고 준비해 온 사실을 상기시켰다.

 

1929년 리지외(Lisieux)에서 열린 선교사 회의에서 드망즈 주교는 방인 교회의 설립으로 방인 교회의 정상적인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지의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1930년 포교성성 장관을 수차례나 만나고 방인 교구 설정 문제를 상의했으며 이어 교황을 알현한 자리에서도 그 문제에 언급하고, 교황으로부터 치하까지 받았다. 끝으로 파리 본부의 총장 신부의 승인을 얻은 후 감목대리구로 발표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1931년 전라도를 감목대리구로 선언하면서 교구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그간의 경위와 또 그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가 한국교회를 맡은 후 방인 성직자 양성에 진력해 온 것이 벌써 1백 년이나 되지만 그간 박해와 성직자의 부족으로 인해 방인 교구의 준비는 지연되었다. 이제는 그것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로마와 파리 본부의 승인을 거쳐 전라도를 감목대리구로 설정하게 되었다. 감목대리구는 자치 교구의 준비를 위한 시련기와도 같은 것이다. 이 시기를 단축시키는 일은 감목대리와의 긴밀한 협조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김양홍(金洋洪) 신부를 감목대리로 임명하며 그에게 주교만이 할 수 있는 권한을 제외하고는 모든 권한과 결정권을 부여하는 바이다.

 

이어 드망즈 주교는 1932년에 전라도를 빨리 방인 교구로 독립시키기 위해 파리 본부에 “한국인 성직자들의 놀라운 활동”이란 제하의 건의서를 보냈다. 그가 이러한 제목을 택한 것은 이미 김대건 신부에게서 충분히 입증된 바이지만, 자신도 경험을 통해 한국 신학생들이 신학지식이나 영성에 있어서 유럽 신학생들에게 조금도 뒤지는 것이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난해에 감목대리구를 설정하였고 또 몇 년 후에는 그것을 지목구(知牧區)로 독립시킬 예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933년(7월 6일) 파리외방전교회는 포교성성으로부터 돌연 전라남도 지방을 골롬반의 선교사들에게 위임하기로 하였다는 통고를 받았다. 파리외방전교회로서는, 이런 중대한 일에 있어서는 사전에 포교성성으로부터 협의를 요청받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그러한 일방적인 결정의 경위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해 포교성성은 이미 1926년에 전라도를 선교단에 위임하도록 권고한 사실을 상기시킨 다음, 전라남도를 골롬반회에 위임한 것도 사실은 드망즈 주교의 건의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그 대가로 전북과 전남을 동시에 교구로 승격시켜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실제로 드망즈 주교는 1926년에 포교성성으로부터 전라도를 선교단에 위임하라는 권고를 받고서는 아주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미 방인 교구를 준비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방인 교구를 설정하려면 전라도가 제일 적합한데, 그것을 선교단에 넘기면 적격지를 잃게 된다. 그중에서도 전라북도는 방인 교구가 되기에 충분하므로 만일 전남만을 선교단에 넘길 경우 그들은 전북까지 요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럴 경우 그는 그 요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방인 교구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진퇴양난에서 드망즈 주교는 우선 전북을 방인 교구로 보장받기로 하고, 전남은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우선 전라도를 감목대리구로 설정하였다. 그런데 로마에서 방인 교구 창설에 동의한 이상 빨리 전북을 방인 교구로 독립시켜야 하겠는데, 만일 낙후 지역인 전남까지 맡기게 되면 교구 설정이 무한정 지연될 것이 명백하다. 결국 드망즈 주교는 해결책으로 포교성성에 아래와 같은 건의를 하게 되었다.

 

1) 이미 합의한 대로 로마는 방인 교구의 신설을 보장할 것.

2) 전남은 선교단에 위임할 것.

3) 두 지역을 동시에 교구로 승격시킬 것.

 

파리 본부에 대해 드망즈 주교는 이런 건의를 알리지 않은 것은 로마의 결정이 어떻게 내려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비밀에 붙인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전남 지역을 맡기 위해 골롬반회 선교사들의 진출이 결정적이 되자 드망즈 주교는 1934년 3월 13일 전라도 감목대리구를 각기 남과 북으로 나누어 독립시키고, 골롬반회의 맥폴린(Owen Macpolin, 林) 신부를 전라남도 감목대리로 임명하는 동시에 그 회의 선교사들을 이 지역에 진출시켜 교구를 준비하게 하였다.

 

마침내 1937년 4월 13일 교황청에서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이미 약속한 대로 전북과 전남의 두 감목대리구를 동시에 지목구로서 대구교구에서 분할, 독립시키는 동시에 전주지목구는 한국인 성직자에게, 광주지목구는 골롬반 선교회에 위임하였다. 이리하여 전주교구는 한국 교회 최초의 한국인 자치교구가 되었다. 그러나 대목구가 아닌 지목구에 그쳤으므로 초대 지목인 김양홍 신부는 주교로까지 승격되지는 못하였다.

 

전주교구의 설정으로 시작된 교회의 한국화 작업은 그 후 원산교구에도 영향을 미쳐 1940년에 함흥교구를 탄생시켰다. 즉 이해에 원산교구에서 덕원수도원이 면속구(免屬區)로 독립되는 동시에 나머지 지역은 교구명을 함흥교구로 바꾸고, 적절한 시기에 한국인 성직자에게 위임하기로 하였다.

 

또한 1942년에는 노기남 신부가 서울대목구의 대목으로 임명되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주교품에 오름으로써 교회의 현지화 작업은 그 절정을 이루었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한국에서 모든 외국인 신부를 추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낌새를 알아차린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 주교는 재빨리 그의 후임을 한국인으로 대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44년에는 평양교구에도 한국인 주교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제일 먼저 자치교구를 목표로 하여 시작되었던 황해도 감목대리구는 서울교구 자체가 한국인 주교에게 위임됨으로써 그 해에 폐지되고 말았다.

 

[경향잡지, 1988년 9월호,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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