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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교회사8: 1930년 전후의 북쪽 교회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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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8-06 ㅣ No.380

한국 교회사 (8) 1930년 전후의 북쪽 교회 상황

 

 

평양교구가 1927년에, 그리고 연길교구가 1928년에 신설됨으로써 한국 교회의 교구수는 기존의 서울, 대구, 원산 등을 합쳐 5개 교구가 되었다. 그런데 평양교구와 함흥교구는 종전의 세 교구처럼 대목구(代牧區)가 되지 못하고 지목구(知牧區)에 그쳤으므로 그 교구장인 지목(知牧)들은 주교로 승진되지는 못했다.

 

서울교구에서 평안남북도를 떼어 한 교구로 독립시킨 평양교구의 설정(1927년 3월 17일)은 몇 가지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컸다. 첫째 평안도는 함경도와 함께 복음화에 있어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함경도에 이어 이제 평안도도 독립된 교구가 됨으로써 발전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둘째 평안도는 이 지역에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의 놀라운 교세 확장을 감안할 때 실은 교구의 신설이 함경도보다 시급했었다. 그러므로 서울교구장 뮈뗄 주교는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에게 평안도 지방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었다. 그런데 베네딕도 회원들은 도리어 그네들의 한정된 인력과 재력으로는 도저히 개신교와 경쟁을 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평안도를 거절하고 함경도를 택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20년에 원산교구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에 뮈뗄 주교는 평안도 지방의 사목을 전담할 새로운 일꾼을 서둘러 물색하게 되었고, 다행히도 그의 교섭은 주효하여 1922년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 지방을 미국의 메리놀 외방 전교회에 위임하게 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메리놀회의 선교사들은 1923년부터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에는 그 수가 벌써 6명이 되었다. 그들은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어느 정도 익힌 후 1924년부터 임지로 향했는데, 우선 기존의 5개 본당을 인수하고, 거기에 정착했다. 한편 한국 메리놀 선교사들의 장상인 번(P. Byrne, 方) 신부는 신의주에 임시 본부를 설치하고 그곳에 정착했다.

 

5개 본당이란 평양, 진남포, 영유(永柔), 의주, 신의주 등이었다. 당시 평안도의 신자수는 4천 5백 49명(평안남도 3천 9백 71명, 평안북도 3백 78명)이었다. 한편 개신교의 신자수는 4만 명을 넘고 있었다.

 

평안도의 본당 역사는 1896년 평양본당에서 시작되어, 1898년에는 섶가지, 1900년에는 진남포, 1902년에는 영유, 1911년에는 의주와 비현(枇峴), 1922년에는 신의주, 이렇게 메리놀 선교사들이 진출하기까지 7개 본당이 설립되었었다. 그러나 영유본당의 신설로 섭가지 본당이 폐지되고 또 1913년 비현본당이 폐지됨으로써 5개 본당만이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이 평안도의 본당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지만 복음이 전파된 역사는 병인박해(1866년) 이전인 18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주교는 처음으로 평안도 지방을 방문하고 복음을 전하였고, 이어 그 지방 출신 평신도들에 의해 전교 활동이 계속됨으로써 평양 교외의 논재(票里面 沓峴里)를 위시하여 몇 곳에 신자 집단, 즉 공소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다 폐허가 되었다. 이 박해 때 평양에서 순교한 유정률(劉正律) 성인은 바로 논재 출신이었다.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기존의 5개 본당을 인수한 후 1927년 교구가 탄생될 때까지 또 은산(殷山), 마산(馬山), 중화(中和) 등 세 본당을 신설하는 한편 비현본당올 부활시킴으로써 본당수는 9개로 늘어났다.

 

평양교구는 설정과 동시에 초대교구장으로 그간 메리놀회의 한국지부장격이었던 번 신부를 맞게 되었는데, 그는 본부 부총장에 선임됨에 따라 2년 만에 귀국했고, 그의 후임으로 1930년에 모리스(J. Morris, 睦) 신부가 임명되었다. 그는 번 신부와 같이 제l진으로 내한한 선교사로, 말하자면 베테랑이었다. 그는 1936년까지 6년간 교구장직을 맡아보았는데, 그의 재임기간 중 평양교구는 활기찬 교구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특히 본당 조직의 확장과 방인 성직자 양성에 진력하였는데, 그 결과 정주(定州), 중강진(中江鎭), 서포(西浦), 숙천(肅川), 강계(江界), 평양의 대신리(大新里) 등에 본당이 신설됨으로써 본당수는 14개로 늘어났다. 또 그는 서포의 교구 본부를 완공시켰다.

 

교구가 탄생될 때 신학생은 11명(대신학생 3명, 소신학생 8명)에 불과했고, 이들 중에서 1930년부터 양기섭(梁基涉), 홍용호(洪龍浩) 등 교구신부가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모리스 교구장은 신학생을 서울의 동성상업학교 을조(乙組)에 보내고, 또 2명의 신학생을 로마로 유학을 보내는 등 교구 성직자 양성에 관심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평신도 사도직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특히 전교회장과 청년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솔선수범을 보였다. 이를 위해 그는 1933년 교구의 전교회장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강의 내용을 “가톨릭 연구”란 이름으로 간행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이 “가톨릭 연구”는 1936년 말 “가톨릭 청년”이 폐간되자 1937년부터 “가톨릭 조선”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향후 2년간 전국적인 규모의 잡지 역할까지 하였다.

 

1933년 가톨릭 운동의 위원장직을 맡게 되자 모리스 교구장은 이듬해 평양에서 평양교구 신자대회를 개최하고,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을 결성함으로써 가톨릭 운동을 범교구적으로 진행시켰다. 이러한 조직 덕택으로 평양교구에서는 1935년에 한국 복음 전래 150주년 기념 경축대회를 성공리에 성대하게 거행할 수 있었다. 또 1932년 한국 최초의 방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가 창립된 것도 바로 모리스 교구장의 재임 기간 중이었다. 교세 면에서도 교구 설정 당시 5천 9백 33명에 불과했던 신자수는 1936년 근 3배가 되는 1만 7천 7백 38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러한 발전에 힘입어 평양지목구는 1939년 7월 11일 대목구로 승격되었다. 그간 모리스 교구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했었으므로 오세아(O'Shea, 吳) 신부가 새 대목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직접 주교로 성성된 후 1940년 초에 부임하였다. 평양교구는 대목구의 승격으로 발전의 좋은 기회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미국인 선교사들의 감금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에는 너무나 어려움과 시련이 많았다.

 

평양교구보다 l 년 늦게, 즉 1928년 7월 19일에 신설된 연길교구는 원산교구에서 분할 독립된 것으로, 연길을 중심으로 한 간도(間島)지방을 관할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새 교구의 사목도 원산교구와 마찬가지로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에게 위임되었고, 동회 회원인 독일인 베레허(Th. Breher, 白) 신부가 초대 교구장[知牧]으로 임명되었다.

 

간도 지방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18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 국경지대 출신인 김영렬(金英烈)이라는 사람은 서학(西學)이란 말을 듣고, 참된 종교를 찾아 서울로 가던 중 원산에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영세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친척과 친지들을 입교시켰다. 그 결과 회령(會寧)을 위시하여 간도의 용정(龍井), 조양하(朝陽河) 등지에 신자 집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원산본당의 브레(Bret, 白類斯) 신부는 회령을 공소로 공인하고, 1897년부터 1908년 사망하기까지 거의 해마다 회령과 간도 지방을 방문하며 공소를 증설하였고, 또한 뮈뗄 주교도 1900년에 그곳을 방문하고 그들의 개종 운동을 격려하였으며 마침내 1909년에는 용정과 삼원봉(三元峰)에 본당을 신설하고, 2명의 선교사를 파견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조양하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한국인 신부를 파견하였다.

 

간도 지방은 1920년 원산교구가 설정되고 또 다음해에는 간도 지방이 원산교구에 위임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간도 지방은 만주의 길림(吉林)교구 소속으로 그 교구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담당하고 있었으나 길림교구에서는 3년 내지 5년에 신부 1명을 파견하여 성사를 집전할 정도로 아주 소외된 지역이었다. 그런데 간도에는 주민 중 반 이상이 한국인이었으므로 한국인 교우도 많았다. 그래서 서울교구에서는 특히 이들 한국인의 사목을 위해 길림교구와 교섭한 결과 그 지역의 사목이 한국 교회에 위임되었다. 이리하여 비록 영토는 한국땅이 아니지만 종교상으로는 한국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그러나 1946년 중국에 교계제도가 설정되고 연길교구가 봉천교구의 속교구가 됨으로써 한국 교회의 관할을 벗어나 중국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1921년 간도가 원산교구의 관할지역이 됨에 따라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우선 기존의 3개 본당 즉 용정, 상원봉, 조양하를 인수받았다. 다음 원산교구에서 분리 독립될 때까지 또 연길, 육도포(六道泡), 훈춘(琿春), 다조구(茶條溝), 돈화(敦化) 등 3개 본당을 신설하였다. 이리하여 1928년 연길교구가 설정될 때 본당수는 8개, 그리고 신자수도 1만 2천 57명이나 되었다. 당시 교구에 주민은 80만이었는데 그중 한국인은 무려 50만이나 되었다고 한다.

 

교구가 설정된 후 선교사의 증원과 더불어 자연 본당도 일로 증설되어 나갔는데, 1936년까지 두도구(頭道溝), 합마당(蛤?塘), 명월구(明月溝), 연길의 상시(上市), 모단강(牡丹江), 신참(新站), 왕청(汪淸) 등 6개 본당이 신설되었다.

 

베네딕도 회원들은 원산교구에서와 마찬가지로 교육사업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본당이 신설되고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추게 되면 으레 학교를 설립하고(교명은 海星 학교로 통일) 교우 자녀들을 포함하여 지역의 주민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간도에 또한 사회 · 자선사업으로 양로원, 고아원, 시약소, 병원 등을 경영했는데, 특히 의료사업은 1931년에 스위스에 본부를 둔 올리베따노 수녀들이 진출함으로써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수녀들은 거의가 이미 간호교육을 받고 왔으므로 즉시 의료활동에 효율적으로 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31년에는 독일인 평신도 의사를 초빙해서 병원을 세우고, 본격적인 의료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특히 농촌의 가난한 이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또한 베네딕도 회원들은 덕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출판사업을 통해 문서전교에 큰 업적을 남겼는데, 연길교구의 고유한 업적으로 “미사규식서”의 간행과 월간지 “가톨릭 소년”을 들어야 할 것이다. “미사규식서”는 전례운동에서 볼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저서였고, “가톨릭 소년”은 원래 교구의 소년 소녀를 위해 시작되었던 것인데, 미구에 간도는 물론이요 한국 교회와 한국 전체에서 발행부수가 많기로 유명한 소년지가 되었다.

 

연길교구는 1937년 4월 13일 대속구로 승격됨으로써 발전의 전기를 맞았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너무나 불안하고 복잡했다. 1917년 이래 만주는 무정부 상태에 놓여있었다. 1919년 조양하의 최문식(崔文植) 신부가 마적(馬賊)에게 납치되었던 것도 실은 그런 불안한 정치적 정세 때문이었다. 또한 공산당들의 습격으로 성당이 불타 버리고, 공소가 폐쇄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일 전쟁, 괴뢰 정권인 만주 제국 등에 의한 일제의 침략은 복음 전파를 더없이 어렵게 만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젊은 신부들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거나 전염병으로 죽어갔고, 또 본국으로부터 선교사의 파견도 중단됐다. 1936년 이후 단 하나의 본당만이 신설되었다는 사실에서 이 시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88년 8월호,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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