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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앙 유산: 한글로 밝힌 믿음 - 정약종의 주교요지(主敎要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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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02

[신앙 유산] 한글로 밝힌 믿음 : 정약종의 주교요지

 

 

머리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지난 200여년 간의 역사과정을 통해 많은 글들을 남겼다. 그들은 그 글에 자신의 믿음을 담았고, 그 글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밝혔으며 또한 그들은 자신의 글로써 믿음을 선포하며, 참 신앙의 기쁨을 노래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항상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신앙을 선포해 나갔다. 그러기에 그들이 남긴 글들은 죽음을 앞둔 이들의 간절한 외침이며 진지한 유언이기도 했다.

 

우리의 선비 문화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의연한 자세로 절명시(絶命詩)를 남길 수 있었던 완숙한 문화였다. 이 장엄한 문화 전통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에게도 이어졌다. 우리 교회사 초기에 섬김의 삶을 살던 이들은 바로 그 문화 전통을 이어받아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올바른 믿음을 고백하려 했다. 그리고 그들은 글을 좋아하던 선비들답게 믿음의 글들을 남겼고, 이 글들이 그 혹독했던 박해에도 불구하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다 우리 문화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이제 글들은 우리 문화의 자랑스러운 유산이 되었고 믿음의 발자취가 되었다. 이제 몇 회에 걸쳐 그 발자취를 되밟아 보며 선조들의 믿음을 기리고, 오늘의 한국 사회 안에서 우리 신앙의 자리 매김을 시도해 보자.

 

 

저술 당시의 시대 배경

 

한국 천주교회는 외국 선교사 등의 직접적인 선교가 없이 교회 서적의 연구를 통해 스스로 시작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漢文) 교회 서적은 한국인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수시켜 준 매개체가 되었다. 이렇듯 한국 교회는 그 창설 당시부터 서적 내지는 문자 기록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천주교가 전파되던 18세기 당시 우리 사회에서는 양반 지식층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상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들은 성리학(性理學) 중심의 사회가 드러내고 있었던 여러 병폐를 바로잡아 줄 새로운 사상을 찾아 보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천주교 서적을 발견했고, 이를 근거로 하여 신앙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한편 18세기 당시 우리 나라의 민중들은 역사의 표면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은 민중 문화를 일으키며, 양반 중심의 지배층 문화에 대한 비판을 강화해 갔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성리학의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부하게 되었고, 새로운 민중 종교 운동에 투신했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앙도 민중 종교 운동의 양상을 띠며 들불처럼 번져 가고 있었다.

 

이때 천주교 신앙 운동에 참섭하고 있던 양반 지식층은 민중 출신의 신도들을 위해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들의 한글 번역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한문을 모르던 대다수의 신도들이 한글 교리서의 출현을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한글 교회 서적이 간행 보급될 수 있었고, 이 시대적 배경 하에서 정약종은 한글로 “주교요지”를 지었다. 그리고 이 책은 신도를 비롯한 많은 민중의 환영을 받으며 보급되어 나갔다.

 

 

정약종, 그는 누구인가

 

“주교요지”를 지은 정약종(丁若鍾, 1760~1801년)은 초기 교회사에서 가장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손위 형이었다. 학문을 사랑하던 그 집안 내력에 인연이 되어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널리 연구했고, 천주교 신앙에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영세 입교 후 교회의 중추적 인물과 이론가로 활동했다.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1794년 말에 입국한 이후, 정약종은 주 신부를 도와 교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주 신부로부터 명도회장(明道會長)에 임명되었다. 명도회는 교리를 연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신도들의 단체였다. 그는 이 단체의 지도자로서 신도들을 가르치고, 신앙을 널리 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그는 여러 종류의 한문 천주교 서적들을 참고해서 “주교요지”를 지었다. 민중들의 표현 수단인 한글로 쓰여진 이 책은 한국인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저술된 교리 서적이었다.

 

정약종은 민중의 스승이 되어 그들을 가르쳤고 스승답게 순교했다(1801년 신유 교난 때 맏아들 정철상<丁哲祥>과 함께). 그리고 그의 둘째 아들 정하상(丁夏祥 바오로)과 딸이었던 정정혜(丁情惠 엘리사벳)는 1839년의 기해 박해 때에 순교했다. 이 가족의 순교 행적은 장엄한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주교요지”는 어떤 책인가

 

“주교요지”는 정약종이 영세 입교한 1786년 이후 그가 순교한 1801년 사이의 어느 때에 저술되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교리 지식을 탄탄히 갖춘 후 이를 이웃과 나누기 위해 이 책을 지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이 책을 그 생애의 말년에 즈음하여 지었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이 책은 상 · 하 두 권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천주의 존재, 사후의 상벌, 영혼의 불멸을 밝혀 주고 있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도교나 불교와 같은 동양 문화권의 전통적 종교를 배격하며 천주교의 정당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의 하권에서는 천주의 강생과 구속의 도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상선 벌악의 원칙을 밝히면서 천주교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주교요지”는 박해 시대 교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왜냐하면 한글로 쓰여진 교회 서적 가운데 천주교 신앙의 요체를 가장 잘 정리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술된 직후부터 필사본으로 전파되어 오다가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목판본의 간행을 통해 이 책의 대량 보급이 가능해졌다.

 

“주교요지”는 유일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강조를 통해 하느님께 직결된 인간 개개인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다. 여기에서 사람의 인격적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단초가 마련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민중들에게 천지 창조의 원리와 강생 구속의 의미를 밝혀 준 새로운 종교서요 철학서였다. 그리하여 이 책은 우리 겨레의 종교적 사유, 철학적 사유를 풍요롭게 해준 우리 문화의 귀중한 유산이 되었다.

 

[경향잡지, 1990년 7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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