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강론자료

2012-0219...주일...삶에 희망을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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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2-02-18 ㅣ No.1182

연중 제 7 주일 (나해)

이사야 43,18-19.21-22.24-25            2코린 1,18-22             마르코 2,1-12

2012. 2. 19. (주일) 등촌3

주제 : 삶에 희망을 주기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라는 외국말이 있습니다. 어떤 뜻인지 아시지요?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고 이 시간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났습니다. 될 대로 되라는 뜻으로 그 의미가 부정적(否定的)’으로 알려진 표현이라는 설명도 있고, ‘나는 무엇이든 할 수도 있고, 될 수도 있다는 긍정적(肯定的)인 자세를 강조하는 것이 그 말의 참된 의미라는 설명도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둘 중에 어떤 것을 낱말의 뜻으로 기억하십니까? 같은 글자이면서도 알아듣는 방법과 자세에 따라 우리가 드러내는 자세에는 아주 큰 차이가 납니다.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나 부정적인 자세를 얘기하는 것만으로 사람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케 세라 세라의 두 가지 말뜻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더 먼저 드러내고, 어떤 자세를 더 많이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사람의 얼굴이 바뀌는 것이 것이고, 삶에서 풍기는 향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삶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은 대의(大義)를 위해서, 또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부정적인 생각과 자세를 갖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자세가 긍정적인 사람도 나는 세상의 대의(大義)를 위해서, 또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긍정적인 생각과 자세를 갖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쪽에 마음을 두겠습니까?

 

오늘 복음에는 몇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몸이 아픈 중풍병자와 그 병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행동을 꼬나보고(=눈을 모로 뜨고 못마땅한 듯이 노려보다) 있었던 율법학자들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대립관계는 예수님과 율법학자 몇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율법학자들도 세상을 향해서 옳은 일을 한다는 자세로 중풍병자를 대하는 사람이었으니, 그 두 대상 중에서 어느 쪽이 옳은 일을 한다고 여러분은 생각하겠습니까? 실제로 제가 이렇게 묻기 전에, 여러분은 먼저 판단하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대답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사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율법을 수호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라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중풍병자를 대하는 자세에 잘못은 없습니다. 병을 앓고 있던 중풍병자가 그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자세에서라면, 예수님의 자세에 잘못은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자세 가운데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사람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은 예수님의 행적을 전하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요즘 현실 삶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올해 411일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다시 정치이슈로 떠오른 FTA에 대한 문제도 그중 하나입니다. 나라에서 책임 있는 높으신 분들이 추진하는 정책이니까, 제가 이 자리에서 하는 평가는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같은 얘기를 하더라도 내가 하는 얘기는 다 옳고, 다른 사람이 하는 얘기는 전부 그르다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미국과의 FTA에 관한 주장을 찬성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의 사정은 얼마나 살폈는지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고, 내가 FTA에 관한 주장을 반대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찬성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얼마나 받아들여 결정한 마음인지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일은 두 가지를 똑같은 중요성에서 살피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옳은 것을 선택하고 옳은 길로 가는 사람이라는 주장이 많고, 다른 사람은 언제나 틀린 궤변을 늘어놓고 잘못된 길로 간다는 것이 세상정치의 기본자세요 태도이기에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대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대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결정하는 것에도 마찬가지 기준이 적용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내 이름만 높이고 세상 재산을 나 혼자만 다 갖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재산을 공통분배하고, 평등하게 나누어 갖는다면 자유주의 세상에서 세상사는 맛이 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높은 위치에서 남을 내려다봐야 세상 살맛이 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자세는 하느님나라의 기본정신과 맞지 않고, 세상의 자세에만 맞는 자세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내가 세상에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느냐고 물을 분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하는 질문입니다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에 희망을 주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대답은 상생(相生)이요, 공생(共生)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말을 옳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겠습니까? 상생과 공생의 자세는 하느님의 뜻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사는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자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을 미워하지 말아야 하며, ‘내 생명이나 내 목숨은 내 것이니, 어떻게 하든지 다른 사람은 내가 하는 결정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아주 못된 심정으로 죄악과 가까이하는 자세를 갖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상생과 공생을 드러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상생과 공생의 길과는 반대로, 자신을 우선으로 내세우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느님나라와는 아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한다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행복을 포기하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평가는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할 일입니다.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한 없이 크게 할 수 있고, 사람들 사이에 행복을 크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의 뜻을 내 삶과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고 사는 시간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행복을 가져오는 사람의 자세는 어떤 것이겠는지 잠시 마음과 생각을 모아 기도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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