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신앙 유산: 성체 신심의 지극함 - 성체성월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25

[신앙 유산] 성체 신심의 지극함 : 성체 성월

 

 

머리글

 

교회사를 검토해 보면 우리 교회에서는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의 특색 있는 신심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지상의 교회가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가면서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복음을 좀더 잘 선포하기 위해서 특별한 신심을 장려해 왔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교회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신심의 유형들은 그 신심이 성행하던 당시의 특수한 사회적 여건과 그에 대한 교회의 상황 판단에 의해 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해 시대 이래 우리 교회에서는 여러 형태의 신심들이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인 성체께 대한 신심도 이미 그때부터 우리 교회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의 교회에서는 성체께 대한 도타운 신심을 드러내었고, 신앙의 자유가 묵인된 이후에는 성체 현시(顯示)와 성체 강복, 성체 조배 등이 특별히 장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 시대 이래 우리 선조들의 믿음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졌던 성체 신심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1890년에 필사된 “성체 성월”(19.3×16.5cm, 47장,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을 검토해 보며, 아울러 이 신심이 우리 땅에서 전개된 과정을 주목해 보고자 한다. 또한 당시 교회에서 이 신심을 장려했던 진정한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도 함께 추정해 보고자 한다.

 

 

‘성월’ 신심의 특성

 

19세기 후반기 이후 우리 교회에서는 여러 ‘성월’들을 설정하여 특별한 신심들을 장려해 왔다. 우리 나라 교회에서 실천해 왔던 성월로는 요셉 성월, 성모 성월, 예수 성심 성월, 매괴 성월, 위령 성월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또한 일부 수도 단체가 주관이 되어 분도 성월, 복자 성월 등을 기념해 오기도 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교회에서는 성체 성월을 설정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이 성월들은 대개가 특정 성인이나 신심에 관한 축일이 포함된 달을 특별히 선정해서, 그에 대한 신심을 드높이려는 목적으로 설정되었다.

 

우리 교회의 신심들은 그 신심이 성행하던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교회의 신심은 신앙에 대한 이성적 성찰과 시대적 정서의 표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각 시대가 드러내 준 신심의 유형을 통해 그 시대의 교회가 가지고 있던 정신적 특성과 문제 의식의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 교회사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선조들의 신심에 주목해야 한다.

 

박해 시대 우리 교회의 신심은 오늘의 그것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오늘의 신심에서는 개인 구원에 관한 문제와 함께 사회 구원적 요소가 동시에 강조되기도 한다. 그리고 전통적 신심들을 오늘의 시대 정신에 맞추어 새롭게 해석하여 거기에 사회 구원적 의미를 추가하거나 신도들의 실천적 행동을 존중하기도 한다. 또한 오늘의 교회에서는 특수한 교육 과정을 이수시키거나 정기적 집회를 통해 어떤 신심을 장려하고 그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한다.

 

그러나 박해 시대 우리 교회의 신심들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자못 큰 차이를 드러내 주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성화와 구령에 제일차적 목적을 둔 개인 선심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 교회는 이 개인 신심을 장려하고 신도들의 정신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여러 ‘성월’들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박해가 미처 끝나지 않았거나 그 밖의 어려움이 산적해 있던 당시의 교회에서는 단체적인 교육이나 지속적 집회보다는 개인의 기도나 신심 행위를 더욱 장려하게 되었다. 이 신심 행위를 완수한 보상으로서는 한 대사(限大赦) 내지 전대사(全大赦)가 약속되었다.

 

이러한 성월 신섬의 하나로서 성체 성월의 설정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성체 성월을 실천한 구체적 자료가 부족하여 그 실상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이 성체 성월은 아마도 ‘성체 첨례’가 있던 6월에 설정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성체께 대한 지극한 신심은 성체 조배의 장려와 그에 관한 책자들의 간행을 통해 지속되었다.

 

 

선조들의 성체 신심

 

성체께 대한 신심은 초기 교회에서부터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심이 더욱 장려될 수 있었던 것은 중세 교회 특히 13세기 리에즈(Liege)의 성녀 율리아나(Julianae, 1192~1258년)와 아퀴노의 성 토마스(Thomas Aquinas, 1224~1274년) 등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15세기에 이르러 이 신심은 다시금 부흥되었고 16세기말 로마에서는 성체회(聖體會)가 신심 단체로 창설되었으며, 성체께 대한 특별한 신심은 드높아 갔다.

 

동양의 교회에서 성체께 대한 신심이 본격적으로 장려된 때는 18세기 전반기였다. 물론 그 이전부터 중국 교회에서는 성체에 관한 교리서들이 저술 간행되었다. 즉 브랑카티(Brancati, 潘國光, 1607~1671년) 신부는 “성체규의”(聖體規儀)를 지었고, 알레니(Aleni, 爻儒略, l582~1649년) 신부는 “성체도문”(聖體禱文)을 번역하고, “성체요리”(聖體要理)를 저술했다. 또한 페르비스트(Verbiest, 南懷仁, 1623~1688년) 신부는 “성체답의”(聖體答疑)를 북경에서 간행하여 성체성사를 이해시켜 주었다. 그리고 18세기 전반기 도이예르(d’Oooieres, 1722~1780년)가 지은 “성사요리”(聖事要理)를 통해 성체성사의 신비가 널리 알려져 갔다. 그리고 멜라(Mailla, 馮秉正, 1669~1748년) 신부는 1719년에 성체회의 규칙서를 북경에서 간행했고, 성체성사에 관한 해설서를 저술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중국 교회에서는 성체 신심이 퍼져 나갔다.

 

우리 나라 교회에서의 성체 신심도 성체성사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보급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승훈(李承熏),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 등은 북경의 교회에서 성체 배령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초기 교회의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도 신도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다는 기록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후 성체성사는 특별한 은총의 성사로서 구실을 하게 되었다.

 

즉, 이순이(李順伊 누갈다, 1781~1802년)는 주문모 신부로부터 성체를 배령한 이후 ‘그가 마음을 쓴 것은 오직 성체의 효과를 보존하는 것이었고, 그의 유열한 원은 자기 영혼을 모든 덕행으로 꾸미는 것이었다.’ 그는 한 번 받은 성체성사의 힘으로 동정 생활과 순교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밖에도 기해 교난 때에 순교한 이봉금(아나스타시아)의 행적이나 최양업(崔良業, 1821~1861년) 신부의 일대기를 통해서도 박해 시대의 신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체 신심의 지극함을 확인하게 된다.

 

 

“성체 성월”의 편찬

 

1890년에 쓰여진 “성체 성월”은 이와 같이 지극한 전통적 성체 신심을 배경으로 하여 저술될 수 있었다. 이 책은 ‘성체께 대한 묵상을 유도하고 성체께 대한 열심을 항상 새롭게 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성직자나 신심 깊은 신도들이 31일 간에 걸쳐 그리스도의 성체를 묵상하도록 짜여져 있다.

 

“성체 성윌”에 제시되어 있는 매일의 기도는 예비경, 감사경, 앙모경(仰募經)으로 되어 있다. 예비경에서는 ‘누가 오시느뇨’ ‘누구에게 오시느뇨’ ‘무엇을 하러 오시느뇨’ 라는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형식의 기도를 수록하고 있다. 즉, ‘만세에 불사 불멸하는 왕이신 그리스도’ ‘의덕(義德)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직접 오심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리스도를 모시는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모시기에 부당한 ‘방탕한 자식이며’ ‘금세는 거처할 곳을 얻지 못하고 후세의 나라를 찾아가는 행인’에 지나지 아니하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있다. 바로 이 부당한 존재들에게 그리스도는 ‘성실한 벗이 되기를 원하며’ ‘풍성한 잔치를 차려 주려고’ 오시는 것임을 예비경을 통해서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께 감사를 드리고 그를 앙모해야 함을 성월 기간 중의 매일의 기도를 통해 다짐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다. 당시의 중국 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내용의 책자를 가지고 있지 아니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우리 나라 교회에서 저술된 신심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문투는 사역형이 많은 서양어의 번역문인 듯한 인상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맺음말

 

성체 신심은 개항기 이후 성행해 갔다. 조선 교회는 박해가 끝남에 따라 항상 성체를 안전하게 모셔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시된 성체 앞에서 그 신심을 다진다는 것은 새로운 신앙 자유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었으리라. 또한 성체 신심은 중보자의 개념이 약한 조선인 신도들에게 하느님 아들 = 천주 성자(天主聖子)에 대한 인식을 깨우치고 그를 중심으로 한 신앙을 강조해주는 역할을 했다. 비록 그리스도께 대한 의미 부여에 있어서 오늘날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우리는 이 책과 성체 신심의 의미를 올바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1992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66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