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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조상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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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21 ㅣ No.191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조상제사

 

 

오늘날의 교회와는 달리 지난날 박해시대 우리 교회에서는 조상제사를 금지했다. ‘제사문제’는 선교신학 상의 논쟁이었다. 논쟁의 핵심은 중국의 성현인 공자에 대한 공경과 조상제사의 가능성 여부 등에 관한 내용 등이었다. 이 신학적 논쟁과 관련되어 교황청의 금지령은 중국교회뿐 아니라 조선을 비롯한 유교 문화권에 속한 여러 나라의 그리스도교 선교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전례 문제의 발생

 

16세기 말엽 이래 중국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종교 및 관습과 천주교의 관계를 주목했다. 그 과정에서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천주교 신앙이 중국의 전통문화와 관습과 공존할 수 있다고 파악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천주교 신앙이 당시 중국의 지배적 이념인 유학을 보충해서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선교신학적 이론으로 보유론(補儒論)을 제시했다. 그들은 이 보유론을 통하여 중국의 지식층 사회에 접근했고, 가톨릭 신앙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예수회의 뒤를 이어 1631년 설교자회(도미니코회) 선교사가 중국에 진출해 왔고, 이듬해에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선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후지엔(福建) 대목구를 중심으로 하여 파리외방전교회도 선교에 착수했다. 그들은 공자 숭배나 조상제사를 조상신 등 잡신에 대한 미신행위의 일종으로 규정했다. 이처럼 그들은 중국의 전통관습과 문화에 대해 좀 더 엄격한 해석을 시도하면서 예수회의 보유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따라 예수회와 그 밖의 선교회는 중국 전례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전개하며, 그 최종 판단을 교황청에 요청했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1645년 공자 공경과 조상제사를 신자들에게 금지했다. 이 조처에 대해 예수회가 재심을 요청하자, 교황청은 1656년 예수회 선교 방침을 용인하는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이 교서는 1645년의 금지령을 무효화하지 않고, 동일한 효력을 가지면서 각각의 환경에 따라 지켜져야 한다는 절충적 성격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1693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상제사의 불가함을 다시 주장하며 예수회 선교사와 논쟁을 전개했다. 그 뒤 이 문제를 둘러싼 오랜 논쟁과 우여곡절 끝에 1742년에 이르러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칙서를 내려 최종적으로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을 금지시켰다. 예수회의 보유론은 당시 유럽의 가톨릭 신학에서는 수용될 수 없었던 선진 이론이었다.

 

교황청의 이 금지령 때문에 중국교회는 유교적 지식인들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고, 지식인들이 세례를 받으려면 자신과 자손들의 명예와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해야 했다. 19세기의 중국 선교사들은 교황청의 이 금지령에 대한 재검토나 이의 제기를 사전에 막고자 중국인 성직자들이 학위를 취득하는 일마저도 일체 금지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조선에서는 1784년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교회창설에 앞장섰던 이들이 주로 읽은 책자들은 교황청의 금지령이 확정되기 이전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간행한 저술들이었다. 곧 조선교회의 창설자들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보유론적 해석에 입각한 서적들을 주로 연구했다. 그 결과로 교회 창설 당시 조선교회의 지도자급 신도 대부분은 조상제사를 여전히 지냈다.

 

 

조선에서 발생한 제사문제

 

물론 교회 창설 초기부터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을 거부한 신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당시 전래된 한문 교리서인 “성교절요”를 통해서 조상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또한 당시 교회 지도층 가운데 한 사람인 유항검이 1790년을 전후하여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제사문제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고자 윤유일 등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파견했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에게 교회에서는 조상제사를 금지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전달했다. 이에 대해 윤유일은 “조상제사의 근본 의도는 ‘돌아가신 이 섬기기를, 살아계실 때 섬기듯 함(事死如事生)’에 있고, 만일 천주교를 믿으면서 제사를 지낼 수 없다면 매우 곤란한 일인데 어떤 방도가 없는가?”를 문의했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는 교황청의 결정을 제시하며 조선에서도 조상제사를 금지시켰다. 조상제사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정되던 효심의 자연스런 표현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달된 조상제사 금지령은 조선교회에 큰 분란을 일으켰다.

 

신자들은 부모와 천주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받았다. 신자들은 조상에 대한 효심의 표현으로 제사를 지내든지, 아니면 제사를 거부하고 천주 하느님을 섬겨야 했다. 제사를 거부해야 한다는 교회의 태도가 알려지자 “갑자기 제사를 폐하기가 어려워 밥과 국만으로 간략히 제사를 드리는” 신자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신자임을 숨기려고 문묘나 사당을 참배할 때 마지못해 참배하는 시늉만 하는 ‘허배’(虛拜)를 하기도 했다.

 

조상제사가 금지됨으로써 “마음 약한 신자들은 그것이 몹시 무서워서 그날부터 천주교 신봉을 포기했다.” 또한 양반 출신 가운데 상당수가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다. 조상제사 포기는 곧 양반으로서 명망과 특권을 버리고, 가문을 존립시키는 사회적 기반의 포기를 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부의 탄압에 앞서서 양반 문중의 박해가 심각하게 일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교회 창설 초기 주요 역할을 했던 양반들이 탈락되어 갔다.

 

반면에 조선왕조 사회를 철저히 개혁해 보려던 정약종이나 황사영과 같은 혁신적 양반 지식층들은 계속해서 신앙을 실천했다. 조상제사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몰락 양반이나 중인층이 교회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상제사에 대한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농민 등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가 진행되었다.

 

조상제사 금지는 천주교를 탄압하는 명분을 제시해 주었다. 교회에서는 자신들이 충효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지만, 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관리나 백성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1791년의 박해가 일어났고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했다. 그들의 뒤를 이어 많은 신자가 불충불효로 낙인찍혀 순교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리하여 박해의 피 흐름이 1882년경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 세기에 걸쳐서 지속되기에 이르렀다.

 

 

남은 말

 

조상제사에 대한 금지는 우리나라 초기 교회사에 매우 의미 깊은 사건이다. 이 때문에 박해시대 교회는 당대 사회의 지배 지식인이던 양반 지식층과 스스로 단절되는 길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박해시대 우리 교회는 민중중심의 신앙공동체로 자리매김 되어갔다. 물론 민중적 지위로 몰락한 양반들이 박해시대 교회의 문을 그침 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조상제사 금지는 우리 사회에서 천주교를 바탕으로 하는 고급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런 반면에 조상제사 금지로 초창기 우리나라 교회는 혼합주의(Syncretism)의 위험에서 확실히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신자들은 유학과 천주교의 차이점에 대해 뚜렷이 인식할 수 있었고, 보유론적 선교이론을 청산하게 되었다. 이로써 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더 깊게 파고들게 되었다. 조상제사 문제 때문에 일어난 박해 과정에서 신자들은 고난과 고통의 의미를 더 천착할 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자신의 삶을 합치시켜 나갔다.

 

그러나 1939년 교황청은 최종적으로 유교적 전례에 약간의 변경을 가하여 조상제사를 다시 허용하게 되었다. 이로써 가톨릭 복음은 동양문화와 다시 대화를 시작하고, 가톨릭 신앙이 토착화에 큰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고뇌와 경험을 거쳐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천주교 신자들은 개신교도들과는 달리 조상제사를 기꺼이 받들 수 있게 되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의 저술활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12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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