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한국교회는 임진왜란 때 시작되었나?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36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한국교회는 임진왜란 때 시작되었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흔히 그 기원에 관해서 주목하기 마련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의 기원에 관해서도 몇 가지 의견이 제시된 바가 있었다. 이 가운데 임진왜란(1592-1598년)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천주교 신앙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주장을 '한국교회 임진왜란 기원설'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 주장에서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일본군을 따라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했던 사실을 주목하며, 여기에 한국교회의 기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납치되어 간 조선인 피납자들이 신앙공동체를 형성했으며, 조선 땅 안에서도 임진왜란 직후부터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근거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의 성립에 대한 특정 집단의 공헌을 강조하려는 이기적 노력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는 한국교회의 기원을 올려 잡아보려는 아마추어적 열정의 소산일 수도 있다.

 

 

아시아 교회의 성립

 

일반적으로 특정 지역에서의 교회 창설은 선교사들의 공으로 돌린다. 그들의 노력을 통해 하느님 구원의 역사는 특정 지역사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된다. 이 과정에서 지역교회는 또 다른 창설을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까닭으로 지역교회의 경우에도 그 창설과 기원을 논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동양의 그리스도교 선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근현대 아시아 교회의 본격적 성립은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직결된다. '서세동점'은 16세기 '지리상의 발견' 이후 서양의 세력이 동양으로 확대되어 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교회는 지리상의 발견으로 선교지역의 확대를 요구받게 되었다. 유럽인 선교사들은 이 과정에서 동양의 동쪽 끝까지 도달했다.

 

그리하여 극동 아시아에서도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고 실천하는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형성되었다. 16세기 중국에서는 마카오 교구가 성립되었고, 일본에도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파되었다. 이곳에 신앙을 전파한 인물들은 서유럽 출신의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중국 지식층의 교화에 관심을 가지고 한문교리서를 간행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로써 유교문명권 안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놓여있던 조선에 대해서도 천주교 신앙을 전하기 위한 시도가 전개되었다.

 

 

조선왕조에 대한 선교 시도

 

중국이나 일본에 도착했던 선교사들은 선교지 확대를 위해 노력하며 조선을 주목했다. 그들은 조선인 지식인들이 그리스도교를 알기보다 훨씬 먼저 조선의 존재를 파악하고서 조선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이러한 유럽 선교사들의 노력은 조선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에 대한 선교 시도는 우선 1576년 1월 마카오 교구에 내린 교황의 칙서에서 확인된다. 이 대칙서에서는 교구의 관할 구역을 '중국 일본과 인접지역'으로 규정했다. 이로써 막연하게나마 조선은 마카오 교구의 관할 지역 안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말엽 중국에 도착했던 예수회 선교사 리치(Matteo Ricci)는 1599년 '코리아'에 관해서 짧게 언급하여 조선 선교에 대한 관심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그후 1659년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을 중국의 난징대목구(南京代牧區)에 부속시킨 바 있었다.

 

조선 선교에 대한 구체적 관심은 일본에서 선교하던 예수회 계통의 선교사들에게 먼저 나타났다. 곧, 포르투갈 출신 가스파르 비렐라(Gaspar Vilelar) 신부는 1571년 선교를 위해 조선 입국을 시도한 바 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일본에 나와있던 스페인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1511-1611년)는 조선에 입국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을 침략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개인적인 초청을 받아 경상도 웅천에 있던 고니시의 진영에서 일년 가까이 머물었다. 그는 조선 땅을 밟은 첫 선교사였으나 조선에서 일본인 장병들을 위해서 활동했을 뿐, 조선인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의 조선 입국으로 한국교회의 기원을 임진왜란에서 구하려는 빌미가 제공되었다. 그리고 웅천에는 세스페데스의 내한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내한을 기념할 수는 있다 해도 이 사건이 곧 한국교회의 기원이 될 수는 없다. 한국교회는 한국 땅에서 한국인에 의해 형성된 신앙공동체로서 한국인을 위해 복음 선포적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실천된 천주교 신앙

 

세스페데스는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방해를 받아 일본 본토로 귀환하던 도중, 쓰시마(對馬島) 도주(島主)의 집에 피납되어 머물러있던 조선인 소년 한 명에게 빈센테(Vincente)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빈센테는 일본의 신학교를 마치고 선교사가 되었으며, 포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하려고 1614년 북경에 가서 조선 입국의 길을 모색하다가 1620년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이 때를 전후하여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과정에서 피납되었던 조선인들이 대거 그리스도교에 영세 입교한 바 있다. 이는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교회사가 아닌 일본 땅에서 전개된 일본교회사의 일부일 뿐이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바쿠우(德川幕府)가 성립된 이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을 강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일본인 신자가 순교했다. 그리고 조선인 피납자 가운데 일본에서 천주교에 입교했던 신자들도 적잖이 순교했다. 그 조선 출신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일본교회의 복자로 시복되었다. 이들의 순교는 조선과는 무관하게 전개된 일본교회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18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일본교회사를 연구하던 서양인 연구자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에 천주교회가 세워졌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세스페데스 신부를 비롯한 '몇 명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건너가 일본인에게뿐만 아니라 조선인에게도 선교한 것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하여 조선에 그리스도교가 설립되었고, 일본군이 철수한 다음에도 조선에는 적지 않은 '숨어 지내던 신자'(隱伏切利支丹) 들이 있었다고 서술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에서 귀환한 조선인 피납자 가운데 천주교 신자가 있었으리라는 가정은 이와 같은 주장을 더욱 부추겨주었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한 '한국교회 임진왜란 기원설'적 발상은 사료적 근거가 없다. 사료가 없이는 역사도 없다. 그들의 주장은 문학적 상상력의 일부일 뿐이다. 역사는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되어야 한다. 일종의 개연성을 사실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임진왜란의 과정에서 성립되지는 않았음이 분명하다. 한국교회는 1784년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발적 노력으로 창설되었다.

 

[경향잡지, 2001년 2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683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