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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엄광호 다고베르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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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증인] 엄광호 다고베르트 신부 Testes fidei - 신앙의 증인 시복 추진 대상자인 덕원 수도원 소속 사제 및 수사 26명, 연길 수녀원 소속 사제 1명, 보이론 수도원 소속 사제 1명, 원산 수녀원 수녀 및 헌신자 4명, 덕원 자치 수도원구와 함흥 교구 소속 사제 4명의 약전을 소개하고 시복 추진 현황을 알려드립니다. 비텔스바허 김나지움의 종교담당 교사는 그의 내면적 삶과 관련하여 더 중요한 부분들을 알려 주었다. “프라이부륵 학생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이 학생은 뮌헨에 와서도 신독일 청년회(Ubungen von Neudeutschland)의 모든 신심활동에 참여했다. 신앙이 매우 깊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모든 신심활동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과 열의를 보였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사제성소, 수도성소와 선교활동에 대하여 말해왔다. 그의 정신, 모범적인 생활, 순종적인 자세, 절도 있는 태도,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친절, 이기적이지 않은 처신, 성소에 대한 이상적인 지향, 초지일관하는 모습을 감안해 볼 때, 나는 그가 수도성소에 불리었고 선교활동에도 적합하다고 여겨지는데, 다만 그 생활을 감당할 만큼 건강이 요구된다.” 종교담당 교사가 한 이 말은 그가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에 입회하면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1927년 5월 중순 그는 다고베르트라는 수도명을 받고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1928년 5월 14일 그는 첫서원을 발했고, 1931년 5월 17일에 종신서원을 했다. 1933년 3월 26일 그는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성당에서 아욱스부륵(Augsburg) 교구장 요세프 쿰프뮐러(Josepf Kumpfmuller, 1869-1949) 주교에 의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이듬해인 1934년 4월 2일 그는 덕원 수도원으로 선교 파견되면서, 수도자, 사제 그리고 선교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시절의 꿈을 모두 이루었다. 8.15 광복 후 북한에서 정권을 잡은 공산당은 덕원 수도원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정치 보위부에 수도원을 폐쇄하고 몰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들은 우선 1948년 12월 1일 수도원당가인 다고베르트 신부를 포도주 불법 제조및 탈세 혐의로 체포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적발한 포도주는 그해 여름 농업조합에서 수도원 측에 요청하여 담가놓았으며, 이는 조합 측에서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한 일이었다. 공산당이 짜 놓은 각본에 걸려든 다고베르트 신부는 원산으로 압송되었고, 미결상태로 구류를 살았다. 수도원에서는 그를 석방시키려고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결국 그는 1949년 5월 9일 덕원 수도원이 폐쇄된 후 다른 수도형제들과 함께 평양 인민교화소로 이송되었다. 결국 그는 밀주제조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유죄판결을 받은 다른 7명의 수도형제들과 함께 평양 인민교화소로 수감되었다. 반면에 그밖의 수도형제들은 1949년 8월 5일 옥사덕 수용소로 떠났다. 그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도 그는 교화소에 수감 중이었으나 국군이 평양을 탈환할 무렵, 퇴각을 서두르는 인민군에 의해 1950년 10월 3일 총살당했다. * 자료출처 - Todesanzeige(상트 오틸리엔 수도원), Necrologium(왜관 수도원),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1991년), 북한에서의 시련(분도 출판사, 1997년) * 사진제공 - 역사자료실 [분도, 2009년 여름호] 0 988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