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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15: 홍교만과 홍인 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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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15)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38-1801) · 홍인(레오, 1758-1802) 부자 세상 복락 모두 버리고 포천에 복음의 씨앗 뿌려 - 홍교만이 순교한 서울 서소문성지. 한국교회 초창기 전국 각 지역마다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사도들이 있다. 충청도 내포지방 이존창(루도미코 곤자가), 호남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영남 김범우(토마스), 제주도 김기량(펠릭스) 등이 그들이다. 그 가운데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홍인(레오) 부자(父子)는 특별히 경기도 포천지방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이들로 꼽힌다. 황사영(알렉산데르, 1775~1801)은 「백서」에서 홍교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홍교만은 권철신의 외숙으로 경기도 포천에서 살았다. 젊어서 진사시에 합격하고 늘그막에는 경학(經學)을 좋아했는데, 권씨 집안에서 성교(聖敎)를 믿자 그 역시 믿고 좇았다. 그는 벼슬할 생각을 끊고 이웃 사람들을 감화시켜 한 고을의 지도자가 되었다…" 홍교만은 교인들 사이에서 남양 홍씨로 불린 양반집 자손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 일찍이 학문에 힘써 진사가 됐고, 점잖고 사려 깊은 성격과 풍부한 지식으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양에 살다가 포천으로 이주한 홍교만은 양근에 사는 고종사촌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집을 드나들다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됐다. 그가 곧바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먼저 입교한 아들 홍인(레오)에게 교리를 자세히 배우고는 천주교야말로 자신이 찾던 진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794년 입국한 주문모 신부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받은 홍교만은 미신자 친구들과 교제를 끊고, 자신의 학식을 바탕으로 교리 연구에 매진했다. - 홍교만이 주문모 신부가 도피하면서 준 성물들을 집에 보관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그는 세속적 영광을 누릴 만한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가졌지만 세상 복락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냉담교우를 회두시키고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그의 포천 집은 교회 가르침을 들으려고 모여든 교우들로 가득했고, 홍교만은 이들을 권면하느라 밤을 지새우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포천지역에 복음이 널리 전파된 것은 그의 이러한 노력 덕분이었다. 1801년 정조 임금이 재위 24년 만에 죽자 정순왕후는 국가 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으로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신유박해다. 박해령이 내렸을 때 홍교만은 아들과 함께 한양으로 피신했다. 한동안 한양에 숨어 지내던 그는 오랫동안 피신할 수 없음을 알고 아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하느님 섭리를 따를 것을 결심했다. 홍교만은 오래지 않아 포졸들에게 체포돼 한양 의금부로 압송됐다. 재판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운명은 이미 결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문초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끊임없이 설명했다. 박해자들이 그의 용감한 태도에 놀랐다. 당시 재판 기록인 「신유추안」(辛酉推案)은 홍교만과 함께 체포돼 순교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문초와 형벌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홍교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느님은 천지의 큰 부모 되시니, 어찌 큰 부모를 섬기지 않겠습니까? 또 큰 부모를 섬기는 천주교를 감히 사악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천하의 진리이니, 예수 그리스도를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강생하였다'는 설은 예로부터 중국의 성현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인데, 저는 이 책을 자세히 보았으므로 그 설을 독실히 믿는 것입니다. 그 지극한 이치의 소재를 말하자면 시ㆍ서ㆍ역경의 말이 모두 이와 합치하니 이를 사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 홍교만과 홍인이 포천 집에서 포졸들에게 붙잡혀 압송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당시 그를 심문하고 형벌을 가했던 관리들은 홍교만의 결안(結安 : 사형할 죄로 결정한 문서)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평화신문, 2012년 5월 27일, 남정률 기자] 0 1,10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