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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2015년 예비자교리 8--하느님(=천주)에 대하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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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7-31 ㅣ No.1418

8.천주(=하느님)에 대하여 (2)

2015-07-03.

1. 지난 시간에는 하느님의 속성(屬性,=사물의 본질을 이루는 특징이나 성질)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것을 인간의 언어로 반복하면서, 의도하는 바와 다른 것이 드러날까 봐서 꺼렸던 내용의 하나는 사람이 자기가 쓰는 언어로, 하느님을 이러저러한 분이라고 규정하면 그 모든 것을 다 알아들었고, 실제로 알아들은 것처럼 드러낼 수도 있는 태도는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면,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봉투하나를 마련해 놓고, 그 봉투 안에 하느님에 관한 설명한 내용들을 잘 넣고, 그 봉투의 입구를 단단히 묶은 뒤, 그 봉투를 내가 이손에서 저손으로 옮기면서 이 안에 하느님이 다 들어 있다고 말하거나, 하느님은 이 이상 다른 분은 아니지....혹은 하느님은 바로 이러한 분이나 이러한 것이라고 말할 잘못을 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잘못하는 일이지요? 이러한 일이 사람이 말이나 글자로 자신이 알아듣거나 설명하고 싶은 대상을 묘사할 때 생기는 문제점입니다. 어쨌든 사람이 말로 표현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사정을 말씀드렸으니, 제가 하는 말을 듣고서 여러분이 잘못된 길고 가거나 이상한 길로 가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3.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것을 사람의 말로 계속 할 시간입니다. 교리문답 제18번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말 사전에 나오는 전능(全能)이라는 낱말의 뜻은, ‘어떤 일이든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이 능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역시 인간의 언어가 갖는 한계를 감안하면, 우리가 말로는 이렇게 설명해도, 그 의미는 듣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18. () 천주 전능하시느뇨?

() 천주 전능하시니 하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이든지 다 하시느니라.

4. 교리문답18번은 이렇습니다.

전능하지 않은 인간의 입장에서 전능하신 하느님(,=Almighty God)’을 논하거나 그분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까요? 낱말풀이로서는 그럴 듯하게 설명해도 실제로 인간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속이 시원하게 설명해서 알아듣게 하거나 자신이 스스로 인식(認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언어가 갖는 한계입니다. 그런 한계를 지닌 인간이, ‘하느님의 전능성에 대해서 묻습니다. 우리말사전에 나오는 해설이나, 우리가 지금 다루는 교리에 나오는 해설이나 그 표현에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이것도 인간의 언어이고 저것도 사람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5.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우리가 낱말로 규정하고, 그 뜻에 대해서 말합니다만, 사실은 그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인간은 전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못하는 일이 없으신 그 능력이 드러난 일로서 세상에 존재하게 된 전능하지 않은 인간이 그 하느님을 전능하다고 묘사합니다

 

6.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라고 속성을 규정하면, 실제로 무엇이 달라질까요? 달라질 일은 없다고 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 다음 순간에 이렇게 낱말로 규정해놓고, 하느님은 인간의 세상에 그 전능하심을 왜 드러내지 않느냐고 질문할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하느님께서 전능하신데 세상에는 그 전능하신 모습이 왜 드러나지 않느냐고 물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이 말을 달리 해석하면, 그렇게 묻는 사람은 사람이 세상의 모습을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아무행동도 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거나, 다른 말로는 자율권도 없다고 말하고 그 자율권을 드러낼 생각도 없으면서, 하느님께 무조건 복종하는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자세가 그렇게 묻는 태도 안에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말을 하면서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책임을 묻는 용어로만 사용할 거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내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요?


19. () 천주 전선(全善)하시느뇨?

() 천주 전선하시니 모든 선의 근원이시오 또한 우리의 기도를 즐겨 들어주시느니라.

20. () 전선하신 천주께서 이 세상 환난병고(患難病故)를 막지 않으심은 어쩜이뇨?

() 이는 세상 사람에게 죄를 보속하며 공을 세울 기회를 주시려 하심이니라.

7. 다음으로 말하는, 하느님에 관한 속성은 선()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말한 전능하심과 연결되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관련된 것은 교리문답19번과 20번의 두 가지로 나옵니다.

()이란 무엇일까요? 사전에는 착하고 올바름. 어질고 좋음. 또는 그런 일이라는 의미와 {철학}도덕적 생활의 최고 이상(理想)’이라고 나옵니다. 물론 세상의 언어로 이렇게 설명한 어느 것이, 우리 신앙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선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기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날 인간이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 시간이 흐르면서 뜻을 확장하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는 자기의 언어로서 하느님을 올바르게 설명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인간이 알아듣는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하겠다고 덤비는 것 자체가 오류이지만, 어떤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인간들 스스로를 가리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내는 인간을 향하여, ‘제가 함부로 이렇게 말하면 큰일 나겠지요? 사람의 얼마나 위대한데, 그 능력을 믿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인간의 말로 설명하는 것은 좋다고 하겠지만, 그 표현과 내용에 따라 하느님에 대해서 설명하는 소리가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인간을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그 존엄성을 무시했다고 말할 것이며, 조금 과장하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하느님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8.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라고 우리 신앙에서는 말합니다.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나보다 좀 더 선하고, 때로는 대단히 선한 사람을 만날 수는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렇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선 자체(=The Good Itself)’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과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는 대상은 세상에서 언젠가 사멸(死滅,=죽어 없어짐/extinction; annihilation; destruction)존재이고, 그런 존재에게는 선 그 자체라고 하는 칭송은 합당하지 않은 찬사(讚辭)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선에 대한 항목에서는 기도에 대한 얘기와 세상에 드러나는 환난(患難,=근심과 재난)병고(病苦,=병으로 인한 고통)에 대한 애기가 연결됩니다. 하느님은 선하신 존재이기에, 인간이 바치는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너그러움과, 그 너그러움이 드러나지 않는 근심과 재난 또 고통에 대해서 말합니다. 사람이 삶에서 근심과 재난을 겪고 병으로 인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어떤 관련이 있겠습니까? 질문에 대한 대답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이런 질문을 들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10. 쉬운 말로는 인간이 당하는 고통과 재난의 상황을 보니, 하느님은 선하지 않다고 말해야 옳은 것일까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사람은 과연 하느님을 제대로 설명하고 제대로 알아들으려고 하는 사람일까요? 하느님은 모든 것을 관장, 관리해야 하는 분이라고 우리가 알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질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교리와 신앙에 언급된 내용을 조금씩 왜곡되게 발전시키다보면, 인간에게는 항상 좋은 일이 생겨야 한다는 당연한 얘기(!!)를 하면서, 동시에 인간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기만 하고, 아무것도 반항해서는 안 되는 꼭두각시가 되기를 바란다는 얘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살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세상의 현실 모습을 보면서 하느님께 불만을 드러내기는 하겠지만, 꼭두각시가 되기를 바랄 사람은 누가 있겠습니까? 그 낱말의 뜻을 아는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인간의 욕심을 담은 표현이라면, 사람은 자신에게는 늘 좋은 일이 일어나야하며, 어떤 일을 해도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을 자유를 원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율배반(二律背反)입니다. 사람은 세상에 생겨난 피조물이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모든 것을 좌우하고 싶은 내용만 주장하는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1. 세상에 드러나는 선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하느님을 탓하거나 사람을 비난하는 일 대신에, 우리 신앙에서는 같은 일을 다르게 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행을 하고 하느님 앞에 다가설 수 있는 공덕을 마련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철저하게 인간존중의 입장에서라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은 신앙을 중심에 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인간을 우선하는 입장에서라면, 하느님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이 첫째 모습일 것이고 과정이며 결론일 것입니다. 사람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세상에 우리를 던져놓고, 우리들더러 그 고난과 역경을 알아서 헤치고 나오라고 하느냐면서 하느님을 미워하거나 원망할 것입니다. 좀 더 지나치게 말한다면, 그런 하느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삶을 불만으로 대하는 사람은 자신이 그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이 달라질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다고 하는 행동도 결국에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12. 신앙에서 말하는 방식을 여러분은 얼마나 인정하시겠습니까? 물론 그 말을 듣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잘못한 일이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죄가 아니면서도 죄라면 그런 상황이 만들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13. 신약성경의 한 권인 로마서를 보면, 세상에 죄라는 것이 있게 된 것도 율법이 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율법이 죄를 만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행동은 먼저 있었는데 어떤 것이 죄이고, 어떤 것이 잘못이라는 규정은 율법이 있은 다음에 파악하고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론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만, 이 말이 통()하려면, 내가 하는 일은 항상 옳은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짧게 생각하고, 후다닥 말하는 이 순간의 내용으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14. 이러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죄가 규정된 것도 세상을 대하시는 하느님의 뜻인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면, 그 죄가 우리에게서 다시 사라지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에 가능하게 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일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말 사전에 나오는 죄()양심이나 도의에 벗어난 행위. ⑤⦗그리스도교하느님의 계명을 거역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저는 이 죄를 한때, 예비자교리를 하면서, 한자를 풀이하여, 네가 아닌 것, 그렇지만 인간이 행하는 것이라고 나름대로의 논리를 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4가지 아닌 것이나, 잘못된 것을 사람이 선택하는 것은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일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제가 설명한 것이니, 여러분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일이나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21. () 천주 인자하시느뇨?

() 천주 인자하시니 자기 죄를 통회하는 자는 용서하시느니라.

15. 하느님의 속성에 대한 교리문답의 21번 항목은 인자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이 인자하심은 죄의 용서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용서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뜻을 어겨서 세상에서 제 마음대로 사는 행동을 가리켜 죄라고 했고, 그 결과가 죄의 영향으로 사람에게 다양한 일들이 죄의 결과인데, 그 죄의 원천을 차단하면서 인간에게 그로 인해서 생긴 나쁜 결과들이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면, 죄를 규정한 최초의 원인자인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 문답교리에서는 인자하심으로 설명합니다.


16. 용서(容恕)는 것은 내가 처음부터 잘못된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내가 한 행동의 결과는 남아있지만, 그로 인한 삶의 결과가 내 삶에 더 이상 악한 기운을 남기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별할 수 있나요? 물론 이런 일이 우리들의 삶에 이루어지려면, 훗날 다루게 될 고해성사가 필요하게 됩니다. 해당되는 사항은 그때에 가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7. 이 인자(仁慈)라는 말의 의미는, ‘어질고 자애로운 데가 있다는 뜻으로 사전은 해설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느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측량할 수 있을까요? 말이 되는 소리는 아닙니다. 지난 시간들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사멸할 존재인 사람이 그가 가진 무슨 지혜를 동원하면 하느님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내용을 측량이나 측정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능력과 분에 넘치는 일을 하고서도 아무런 탈이 없기를 바라겠습니까?


18. 죄의 용서에 대한 가장 선제(先制)적인 조건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통회(痛悔)라고도 부르는 이 행위는 죄의 용서를 이끌어내고,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이끌어내는 조건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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