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3일 (수)
(홍)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신양 유산: 역사를 위한 증언 -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6-30 ㅣ No.320

[신앙 유산] 역사를 위한 증언 :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한갓 호사가(好事家)의 잡다한 욕망을 만족시켜 주는 지나간 시대의 기록일 뿐인가? 아니면, 과거의 인물들과 대화를 함으로써 오늘의 우리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우리의 미래를 튼실하게 설계해 주는 지혜의 원천인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역사가 호사가의 소일거리에 국한되어서는 아니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대화이며, 이 대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와 문화가 창조되고 있음을 말한다.

 

교회사란 무엇인가? 교회사는 옛 사람들의 이름에 관한 해묵은 이야기인가? 현대의 우리 믿음이나 삶과는 무관한 지나간 시대의 종교적 열정에 관한 기록이 교회사인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역사가 우리의 삶과 직결되어 있듯이 교회사는 우리의 삶과 믿음에 뿌리가 되고 있다.

 

교회사는 하느님 백성들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지상의 도정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증거하려 했던 모든 일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 고백과 증거는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여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도 그침 없는 영감과 용기 있는 행동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사는 죽은 과거의 사건이 아닌 삼아 있는 현재의 일들인 것이다. 교회사는 현재 우리의 삶과 믿음에 개입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교회사의 현재성(現在性) 때문에 우리는 교회사를 소중히 여기며 밝히려 한다.

 

우리는 교회사를 정리하고 밝히려 했던 대표적 인물로 현석문(玄錫文)이나 최양업(崔良業)을 우선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작업을 이어받아 조선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자 했던 인물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7~l866년) 주교를 주목하게 된다. 그는 조선사(朝鮮史) 입문을 위한 비망기[Notes]와 조선 순교사에 대한 비망기를 남겼다. 그리고 이 비망기는 달레(dallet)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저술할 때 대본이 되었다.

 

 

다블뤼는 누구인가?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비망기를 남긴 다블뤼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의 선교사였다. 그는 프랑스 아미앙(Amiens)에서 1817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프랑스의 시민층에 속했으며, 이러한 그의 가정 환경은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했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당시 사회에서 성직자에 대한 편견이 강화되고 있었지만, 이를 도외시하고 자기 희생의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쌩 슐피스 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고, 1841년에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가 다녔던 생 슐피스 신학교는 프랑스에서 가장 대표적인 신학 교육 기관이었다. 그는 서품 후 교구 사제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철저한 희생의 길을 따르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1843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여 동양의 선교를 지망했다. 그는 1844년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그 다음해에 충청도 강경 황산포를 통해 선교지에 입국하여 선교사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1866년 병인 박해로 인해 순교할 때까지 21년 간 조선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이 봉사의 과정에서 그는 조선의 풍습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고 관찰하고 있었으며 조선의 역사와 언어를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854년에 ‘한한불사전’(漢韓佛辭典)의 편찬에 착수했고 역사 연표를 엮어 나갔다.

 

1856년 조선교구 제4대 교구장으로 베르뇌(Berneux) 주교가 취임 한 이후 그의 연구 활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주교의 명에 따라 신심서 및 교리서를 편찬하게 되었고 조선의 천주 교회사와 순교사를 정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베르뇌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고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이후 제5대 조선교구장의 직을 승계했다. 이러한 그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는 당시 선교사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지성과 굳은 믿음을 겸비하고 있었던 인물이라 평가해 줄 수 있다.

 

 

“비망기”란 무엇인가?

 

다블뤼 주교가 작성한 “비망기”는 박해 시대의 교회사를 알려 주는 보고이다. 이 “비망기”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박해 시대 한국 교회사의 상당 부분을 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비망기”가 대본이 되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가 쓰여질 수 있었음을 생각할 때, 이 자료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비망기”는 탁월한 지성과 굳건한 믿음으로 밝힘과 섬김의 삶을 살았던 다블뤼 주교가 한국 교회를 위해 남겨준 가장 큰 선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이 “비망기”를 통해 선교사이며 교회 행정가인 그의 면모뿐만 아니라 신앙인이며 순교자적 삶을 살았던 그 자신의 발자취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료를 통해 역사가로서의 다블뤼를 만나게 된다.

 

다블뤼가 “비망기”를 편찬하기 시작한 때는 1857년이었다. 이 해에 그는 베르뇌 주교의 위촉을 받아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자 전기의 편찬에 착수했다. 그는 이를 위해 1801년 신유 박해 당시 및 초기 교회사의 사료를 수집하려 했다. 그리고 1839년과 1846년에 순교한 사람들 가운데 시복(諡福) 수속이 진행 중이던 인물의 전기 자료를 정리하여 파리로 발송했다.

 

그의 이러한 작업은 1859년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이때 삼복 더위를 무릅쓰고 두 명의 서사생(書寫生)과 함께 편찬 작업을 강행했고, 이렇게 작성된 “비망기”를 1860년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로 발송하게 되었다.

 

그는 이 “비망기”를 작성하며 한국의 역사와 풍습을 밝혀 보고자 했다. 즉, 그는 19세기 당시를 전후하여 전개된 시대적 조건과 조선이라는 지리적 여건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는 교회사를 밝히려 했다.

 

그리하여 그는 두 편으로 된 “비망기”를 작성했던 바 그 첫째 편은 “조선사 입문 비망기”로서 모두 15항으로 구성되어 있고, 둘째 편은 “조선 순교자 비망기”로서 모두 9권으로 되어 있다. 그가 “조선사 입문 비망기”를 작성하게 되었던 것은 교회사의 서술에 앞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19세기 중엽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정리 작업을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통해서는 한국천주교회의 창설과 그 순교로 점철된 증거의 역사를 밝히려 했다. 즉, 그는 이벽(李檗)의 교리 연구와 윤지충, 주문모 신부의 순교 및 1819년과 1827년의 박해에 관해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이에 이어서 그는 조선 교구의 창설 과정과 1839년의 박해 그리고 김대건 신부의 서품과 활동 및 1860년대초 교회사의 전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박해 시대 우리 교회사의 대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비망기”가 소중한 까닭

 

“비망기”는 다블뤼가 지니고 있던 역사학도로서의 특성을 우리에게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망기 그 자체는 한국 교회사와 한국 근대사의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비망기”가 소중한 까닭은 여기에서 초기 교회사의 주요사료들을 확인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정약용의 “조선 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에 관한 부분적 내용들을 알 수 있으며, “윤지충 일기”(尹持忠日記)를 비롯해서 박해 시대의 신앙 공동체에서 작성된 많은 자료들을 확인하게 된다. 이 자료들은 오늘날 그 원문이 없어진 상태이다. 그러나 비록 프랑스어로 번역된 형태를 통해서라도 우리는 그 자료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비망기”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연구사(硏究史)를 밝히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비망기”가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체계적 연구를 시도한 최초의 저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망기”가 없었다면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도 집필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편 “비망기”는 믿음을 밝힌 글임과 동시에 믿음을 증거하고 실천한 다블뤼의 결단을 함축하고 있는 글이다. 우리는 이 비망기를 대함으로써 역사의 실천성이 갖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실천성을 잃은 교회사는 고상한 너스레에 지나지 않음을 다블뤼는 자신의 연구와 삶, 순교를 통해 우리에게 전한다. 이래저래 “바망기”는 소중한 책일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이 “비망기”가 활자로 정리되어 널리 읽힐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경향잡지, 1992년 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교수)]



73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