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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박해시대의 상본 - 위로와 용기를 준 한 장의 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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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103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박해시대의 상본

 

위로와 용기를 준 한 장의 상본

 

 

믿음의 연조가 깊어져가면서 우리나라 교회는 새로운 말마디들을 만들어 내어 민족의 어휘를 풍부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단어 가운데 상본(像本)이라는 낱말도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이 단어가 천주교의 용어임을 밝혀주면서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 등의 모상”으로 설명하거나 “천주, 천사 또는 성인의 모상”으로 풀어주고 있다. 상본이란 단어는 중국의 고전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었고, 현대 중국어에서도 쓰이지 않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만든 용어임에 틀림없다. 우리 선조들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상본을 좋아했나 보다. 사실 우리나라 교회사에는 그 초창기부터 상본에 관한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상본은 언제 만들어졌나?

 

상본의 기원은 원래 교회에서 공경의 대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던 성화 또는 성화상에 있다. 성화는 대략 5세기경, 동방교회에서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는 성화를 복음전파의 수단으로 활용하였고, 성화에 표현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등 성인들에게 마땅한 공경을 드려왔다. 그러나 비교적 크기가 큰 성화보다는 휴대하기 간편한 소형의 성화가 제작되어 신자들에게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카드 모양으로 제작된 이 소형의 성화를 우리는 상본(像本, image, holy card)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교회에 상본이 전래된 시기는 아마도 교회창설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입국할 때, 그는 많은 ‘책과 상본'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1801년의 박해에 관한 한문기록을 검토해 보면 카드처럼 생긴 상본이 아닌 족자로 만들어진 성화가 주로 언급되고 있다. 당시의 기록에 나오는 ‘도상판(圖像板)’도 상본을 찍어내는 원판이었다기보다는 족자용 성화를 다량으로 제작하는 도구였으리라 추정된다.

 

족자형 성화가 아닌 상본에 관한 좀 더 확실한 기록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 이후에 확인된다. 곧 주문모 신부는 1801년의 순교자 윤점혜가 목격한 성모 발현을 확인하고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상본을 윤점혜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 상본에는 성령이 하늘의 모후 위에 내려와 그 성심 위에 앉는 광경이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신도들은 상본을 자기 신앙의 위로로 삼았다. 그러기에 1801년 박해 때에 충청도 보령 지방의 한 신도는 상본을 사려고 서울에 왔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기까지 했다.

 

한편, 1811년 조선의 신도들은 1801년의 박해 이후 황폐화된 교회의 재건을 위해 교황에게 펀지를 보냈다. 한문으로 쓴 이 편지에서 “주문모 신부가 사용하던 경상(經像)이 모두 없어졌다.”는 언급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경상’이라는 단어는 경본과 상본의 준말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1801년 이전의 신도들이 ‘상본’이란 단어를 만들어 썼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듯 상본은 우리나라 교회의 초창기부터 알려져 있었다.

 

 

특별히 좋아했던 상본들

 

우리나라 교회에 상본이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던 시기는 19세기 전반기를 들 수 있다. 1811년에 편지를 작성해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했던 이 요한은 귀국길에 상본 등 성물을 가져와서 신자들에게 팔아 여행경비를 벌충한 바 있었다. 그런데 중국을 통해 수입되고 있었던 상본을 국내에서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1827년의 박해 때에 체포되었던 이경언 바오로는 교회서적을 필사하여 팔거나 직접 상본을 모사해서 신자들에게 보급하며 생활하였다. 그가 만든 상본 50여 장이 전주의 전라감영에 압수되어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렇게 보급된 상본은 신도들의 신심을 북돋아주었다. 그리고 상본이 때로는 역경에 처한 신도들을 위로해 주었다. 이에 관한 사례로는 1845년 6월 김대건 부제가 페레올 주교를 영입하려고 바닷길로 중국을 향해 항해하다가 태풍을 만났던 때의 일을 들 수 있다. 주야 사흘간 계속되었던 그 폭풍으로 중국 강남지방의 배가 30여 척이나 침몰했다. 배를 타고 있던 신도들도 사흘 동안 거의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이젠 그만이야, 이젠 죽었어!”라고 울부짖었다. 이때 김대건 부제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신 성모님의 기적의 상본을 보이면서 “겁내지 마십시오. 우리를 도우시는 성모님께서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뒤 1849년에는 최양업 신부가 입국했다. 최양업 신부는 1850년 자신의 은사인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우리 주 예수와 성모 마리아, 성 요셉, 세자 성 요한, 사도들, 교회 학지들, 그리고 모든 성인 호칭 기도에 나오는 성인성녀들의 상본들을 보내주십시오. 기회 있는 대로 값을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한 바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1850년대를 전후하여 최양업 신부가 사목하던 당시 신자들도 성모 마리아에 대한 각별한 신심을 가지고 그 상본을 간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토마스 데 아퀴노와 같은 교회학자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행적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었거나, 이를 더욱 널리 알리고자 그들의 상본이 필요했으리라 추정된다. 박해시대의 신도들은 사도들과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며, 상본을 통해 그들과 친밀히 만나고자 했다. 그리고 양반들이 조상의 신주나 초상화를 소중히 여기고, 문성왕 곧 공자의 초상을 받들듯 신자들은 성인들의 상본을 아끼며 간직했다.

 

 

남은 말

 

상본은 성화의 일종이다. 그러나 상본은 성화와는 달리 간편하게 소지하면서 자신의 소박한 믿음을 키우는 데에 더욱 적격이었다. 당시의 신자들은 상본을 갖기를 열망하기도 했다. 김대건이나 최양업 그리고 그밖의 선교사들도 상본을 활용한 교리교육의 효용성에 착목하여 조선 신도들에게 상본을 보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박해시대는 당시 상본을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면 곧 사형까지도 당하게 되던 때였다.

 

1801년의 박해 때에는 이 상본을 구하려다가 순교한 사람도 있었다. 이 상본을 통해 우리는 당시 신자들의 신심 유형을 일부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갖고자 간절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는 새로운 예술품에 대한 무의식적 열광을 얽어낼 수도 있다. 이 상본은 현대의 교회에서도 환영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성모자상과 같은 성화들이 상본으로 만들어져 우리 정서를 담아내며 보급될 수도 있었다. 이경언이 남긴 상본 제작의 전통과 상본을 통해 신앙의 위로를 삼으려던 뿌리 깊은 관념은 이렇게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 조광 이냐시오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로 “한국 천주교회사 1, 2”, “조선 후기 천주교회사 연구”, “신유박해 자료집” 등 저술활동을 통하며 한국교회사 연구에 힘쓰고 있다.

 

[경향잡지, 2004년 10월호, 조광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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